〈 57화 〉 9. 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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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7)
엘프들의 마을 생명의 요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수인들의 대표,
헹겔.
그녀의 작고 초라한 오두막집에는 비록 잠깐이지만 어린 수인 소녀 하나가 얹혀살게 되었다.
"실비아~"
".. 응."
지낼곳을 제공받는 대가로 소녀에게 주어진 일과는 몹시 단순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좁은 집안의 청소를 하고, 아침을 먹고.
몇 있지 않은 빨랫감을 손빨래하고, 점심을 먹고.
집주인인 헹겔이 키우는 고양이를 연민의 시선으로 놀아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는 일찍 잠에 들거나 그녀가 장작을 패는 것을 옆에서 돕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그 일과를 수행하게 된 소녀는 헹겔이 준비한 저녁을 함께 먹고 있는 중이다.
"우물우물.."
"..."
"히야아.. 네가 와서 정말 다행이다냐~ 너처럼 성실하고 착한 꼬맹이는 처음 봤다냥."
".. 응."
고양이와 놀아주는 게 의외로 다른 집안일들보다도 힘들었다고 생각하며, 배가 고팠던 만큼 식탁 위에 오른 고기에 온통 신경이 쏠려있던 소녀는 헹겔의 칭찬에도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자신의 머리만큼이나 큼지막하게 구워져 눈앞에 놓인 고기를 주어진 작은 포크 하나로 어렵사리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손으로 먹으면 될 텐데, 너도 참 별냐.. 별나다냥."
커다란 고깃덩이를 양손으로 잡고 마음껏 뜯어먹고 있던 헹겔의 그 들으라는 듯한 혼잣말에도, 포크로 살코기를 기어이 뼈에서 발라내고는 손에 묻히지 않고 입안으로 가져가는 데까지 성공한다.
"흐우웅.."
냘름.
이러나저러나 잘 먹고 있었기에 소녀와는 달리 기름낀 양념이 잔뜩 묻은 손바닥을 그 작고 뾰족한 혀로 핥고 있던 헹겔은 괜히 눈치가 보였는지 눈앞의 포크를 들어 올렸다.
곧 포기했지만 말이다.
애초에 손님이 왔기 때문에 식탁이 비어보일까 예의상 내놓은 것뿐이었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고는 살이 잘 오른 고기를 와구와구 먹어치우는 헹겔.
아이를 데리고 있는 건 귀찮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말하는 건 아직 서툴어 보이지만 집안일을 조금 가르쳐 보니 머리도 좋고, 나이에 맞지 않게 불평 하나 하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
그렇다고 대충하는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인다.
지금 그녀의 머리칼과 옷가지에 수북하게 묻어있는 앙리의 털뭉치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많이 먹어라냐. 그래야 키도 쑥쑥 큰다냥."
"... 응, 고마워."
게다가 이렇게 꼬박꼬박 인사도 빼먹지 않는 소녀에게 헹겔은 함께 지낸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벌써 기특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으후~ 배부르다냥."
저녁식사 이후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아침에 배운 대로 식기들을 깨끗하게 설거지한 소녀는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소파에 녹아내린 것처럼 퍼져있는 헹겔에게 다가가 물었다.
"장작.. 할거야?"
"응? 오늘은 됐다냥."
저녁을 먹고나서 정해진 일과는 장작패기를 돕는 것.
오늘은 괜찮다는 대답에 그렇다면 이제 잠에 들어야 되는 건가 싶었던 소녀는 딱히 잠이 오지는 않았기에 잠시 멈춰서서 그녀의 소파 옆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무기들을 바라보았다.
긴 막대 끝에 날카로운 칼날이 붙어있는 무기.
그보다는 조금 짧은 막대에 두꺼운 칼날이 양쪽으로 붙어있는 무기.
자신도 셀틱에서 흔히 보았던 도끼나, 단검도 있지만 정말 여러 종류가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먼지가 두껍게 쌓여있는 게, 한참을 사용되지도 관리되지도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 헹겔의 집, 무기.. 많아."
"관심이라도 있는 거냥?"
... 끄덕.
"냐하하~ 아무리 강한 수인들도 강철로 된 이빨 하나쯤은 필요하다냐. 필요하지 않은 건 아마 순혈자 뿐일 거다냥."
"...!"
긴 세월을 살아온 수인인 그녀 딴에는 가볍게 던진 농담이었지만, 하필 그 농담은 소녀에게 일전의 일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 아."
소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그 작은 어깨가 덜덜 떨리기 시작하자 그걸 보고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헹겔.
"무어.. 뭐냥...? 농담이었다냐.. 꼬맹이, 괜찮은 거냥..?"
이미 그 공포는 머릿속에 각인되어 그저 떠올리게 된 것만으로도 코가 짓눌리는 것 같았지만, 소파에서 화들짝 몸을 일으킨 헹겔이 급히 다가오자 그녀의 냄새가 위로 덧씌워지며 몸의 떨림도 점차 잦아든다.
"..... 응.."
그 존재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에게서 역시 강자의 기척이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헹겔은.. 싸움 잘해?"
"무.. 물론이다냐. 수인들의 대표를 맡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냥."
소녀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망설이고 또 주저하는듯 보였지만 끝내는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부여한 일과에서 벗어나는 일이었지만, 이미 한 번 부탁을 들어준 그녀에게 뻔뻔하게도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럼, 나... 가르쳐줄수.. 있어?"
"뭘.. 가르쳐 달라는 거냥?"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맥락상 분명했지만, 헹겔은 구태여 물었다.
"..."
하지만 곧, 소녀의 은회색..
지금은 그보다도 더 진한 빛으로 확고히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진은색 눈동자를 보게 된 헹겔은 자신도 모르게 소녀의 정해져 있던 대답을 대신 중얼거리게 되었다.
"싸움을..?"
".. 응."
소녀는 가르침을 부탁해왔다.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닌 전투에 대한 것.
마을에서 코나 흘리며 돌아다니는 꼬맹이들과 고작해야 몇 살이나 차이가 날까 싶은 어린 소녀였지만, 그 진은색 눈동자에 담겨있는 것은 이 지루한 지하 요람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분명한 투지였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몸을 떨던 가녀린 소녀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다.
"네가 원한다면.. 뭐.. 가르쳐주지 못할 이유는 없다냐."
긍정적인 대답에 늑대 소녀의 두 귀가 쫑긋거리고, 헹겔의 시선은 그 잘려나간 귀 끝의 흉터에까지 닿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아있는 듯 보인다.
"...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다냐, 그전에 네 대답을 들어야 하니까냥."
"대답..?"
"싸움을 배우고 싶다는 건, 강해지고 싶다는 거다냐."
그리고 누군가가 강해지기를 원할 때에는 분명 그 힘에 뒤따를 무언가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소녀는 무엇을 바라기에, 이토록 확고하게 강해지기를 원하는 것일까.
"실비아, 이건 중요한 질문이다냐.. 너는 왜 강해지고 싶은거냥..?"
"..."
이를 확인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 흙내 나는 지하 요람에 갇힌 자신에게 남아있는 거라고는 앞으로 썩어갈 시간과, 이미 녹슬어 무뎌져 버린 칼날뿐이다.
그렇기에 소녀의 저 부탁이 만약 한순간의 흥미로 인한 것일지라도 지루함도 잊어버릴 겸 가볍게 승낙하여 임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소녀가 그 무엇보다도 진심으로 부탁해오고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신중하게 거절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 무서워."
"..."
"그리고.. 분해."
소녀는 그 작은 주먹을 힘주어 꼭 쥐고, 오늘 하루 말한 것 중에서도 가장 길게 대답한다.
"... 강해지지 않으면. 할수있는 것.. 없어."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자신의 옆에 있으면 분명 안좋은 꼴을 당할 거라고.
그는 항상 그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외롭게 있으려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이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같았다.
단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타인의 발목을 잡고, 위험에 처하게 하고, 아파하게 만드는 나 자신을 보며..
... 무서웠다.
.. 두려웠다.
그리고 그건, 그 공포스러운 존재의 말대로 자신이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의미 없이 목숨을 내던지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이 괴물의 손톱에 찢겨죽는 것만이 유일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꾸우욱..
그렇기에 분했다.
내가 사랑하는,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주던 엄마와 헤어지고, 차갑게 식은 몸 위로 흙을 덮으며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에게도 아직 이 땅 위에서, 살아가며..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것이 비록 하찮고 별거아닌 일이라고해도, 그 사람의 옆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앞으로 더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래서는...
이래서야 자신은 그의 곁에 남아있을 수 없다.
계속 약자로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얻을 수 없다.
"강해지면... 지킬수있어.. 아무도.. 아프지않게. 내가 막을수있어."
"..."
자신은 그 공포스러운 존재는 커녕, 눈앞의 그녀도 평생 따라잡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게 포기해야할 이유는 되지 않으니까.
그러니 헹겔이 이전에 말해준 것처럼, 쉽게 포기해 버리지 않겠다.
괜찮다.
"세상은, 원래.. 태어날때부터. 불공평하니까."
"... 실비아.."
"그러니까..."
여태껏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착해오던 소녀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지금.
더 나아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에 두고 있다.
그리고, 지금 소녀가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나는.. 강해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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