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60화 (60/137)

〈 60화 〉 9. 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

* * *

9.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10)

"으흐으으음.."

스으윽..

"..."

"으흐으음..?"

스으윽... 슥..

"... 이봐."

"네?"

나는 불쾌함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이 파렴치한 엘프를 노려보았다.

"아아..? 죄송해요. 이건.. 음.. 정말 귀하네요. 뭐랄까, 단단하기도 하고요."

사과를 하면서도끝까지내 가슴팍을 더듬거리는 손을 치우지는 않는다.

탁.

결국 내가 손을 들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억지로 떨어뜨리고 나서야 더 이상 간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살아났어요. 심장이 멈추고 한 시간은 지났을 텐데, 몸만 깨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게도 있었지만 정신도 멀쩡해 보이네요."

".. 한 시간?"

"언어장애도 없어 보이고요."

겨우 한 시간,

같은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폭발로 먼지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불타버린 육체를 수복해야 하는 수고는 없었기 때문일까?

이건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는 정도의 느낌인데..

"우윽..."

"어, 어어..? 잠시만요. 담을만한게..!"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눈앞이 핑 도는 현기증과 함께 헛구역질을 하자, 이비는 소란스럽게 주변을 살피더니 손에 딱히 집히는 물건이 없자 대신 급하게 자신의 양손을 모아 내 쪽으로 내밀어온다.

그 모습을 보고 오히려 더 필사적으로 뱃속에서 역류하는 쓴물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나는 따가운 목구멍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양손을 멀찌감치 밀어냈다.

"콜록 콜록.. 대체 뭘 앞으로 가져다 대는 거야."

"그야.. 귀중한 연구 자료인걸요. 이미 한 번 죽은 자의 조건을 충족했던 사람이 이렇게 멀쩡히 일어났으니까요."

".. 레베카에게 저주에 대해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불로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더해 불사.. 그것도 죽음에서조차 되돌아오는 불사의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 능력?"

지끈..!

텁.

"... 이건 결코.. 능력이나. 축복이.. 아니야."

나도 모르게 이비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부릅뜬 채 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말을 뚝뚝 끊어 내뱉었다.

다시 한번 동그랗게 떠진 그녀의 눈.

"그..렇죠. 저주.. 였죠.. 죄송해요."

불로불사.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축복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

"....."

사과가 담긴 대답을 받아내고 나서야 손을 떼어내니 그녀가 입고 있던 하얀 가운의 어깨 부분 옷자락이 심하게 구겨진 것이 보인다.

내가 얼마나 세게 그녀의 어깨를 쥐고 있었는지를 그제서야 눈치채고 한순간에 달아오른 머리가 식어간다.

"... 아프다고 말이나 하던가."

"에헤헤.."

그녀의 어깨 위로 어색하게 떠있던 손으로 은총을 끌어올리자, 치유의 기운이 그녀의 어깨와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보인다.

은총을 꺼내는 데에도 별다른 이상은 없다.

"... 어울리지 않게.. 일단 네가 모르는 거라면 과도하게 집착하는 면모가 있군."

처음에는 단순히 식물이나 마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줄로나 알았지만,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그녀의 흥미분야는 어느 한두 가지에 그치지는 않는 듯 보인다.

"으음.. 그야, 궁금하니까요?"

그런데 그 대답은 호기심이라고 한다.

물론 호기심과 지식탐구는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녀는 달랐다.

새로운 것에 대한 집착과 강박마저 보이는 그녀의 비틀린 탐구욕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의문이 남는다.

"그걸 믿으라고? 네 행동을 보고 있으면 하나같이 의문투성이야."

나와 소녀를 구해줄 때에는 마을을 위하는 성실한 엘프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세레스티아 원로나, 수인족 대표 헹겔의 앞에서는 마치 그들의 절친한 친구나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행동했으며,

미지의 것에 대한 탐구에는 광적인 집착과 노골적인 욕망을 조금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에서 모두 벗어났을 때 그녀는 그 이외의 모든 것에 관심을 끊고, 지루함과 나태함을 몸소 보여주며 성의나 진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생각하지 않는 빈 깡통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생각할 수록 꺼림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나마 수정빛이 잠든 호수에서의 그 뜬금없는 이야기가 내게는 오히려 듣기에 편했을 정도다.

"솔직히, 난 네가 불편해."

"으으음.. 갑자기 이런 쓴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요. 제가 뭔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잘 모르겠다는 것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그녀.

딱히 저런 것에 대해서도 나는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저..

"넌 내게 너무 스스럼없이 다가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엘프는.

"아, 혹시 부끄럽다고 생각한다던가.."

"하.. 아니. 네가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어서, 일일이 반응해 주는 게 피곤하다고."

"..."

결국 본심이 나왔다.

저주에 대해 알아두라는 세계수의 조언 때문에라도 그녀와는 앞으로 몇 번을 더 어울려 줘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만큼, 지금 여기에서 확실하게 선을 그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비의 대답은 이번만큼은 평소의 그 멍청한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가식적인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가는 게 보인다.

"...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하면서도 끝까지 차갑지는 못한 당신처럼요?"

"뭐..?"

"미움받고 싶으면 끝까지 그렇게 행동하면 될 텐데, 결국 마지막에는 다르게 행동해서 주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잖아요."

여태껏 보지 못한 굳은 표정으로 차갑게 식은 푸른 눈동자를 향해온 이비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제 할 말을 뱉어낸다.

"미움을 받고 싶어 해..? 내가..? 나는.."

"당신말고 누가 있나요. 미움받는 걸 오히려 편하다고 느끼면서, 행복해질 욕심은 가득한, 어중간한 피학성 성격장애를 가진 분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네요. 당신은 말이죠? 헹겔 님이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남자예요. 누구보다 이성적이라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 속은 정작 뒤틀려 있기만 하죠."

"피학성.. 뭐?"

"좋아요. 말해줄게요. 당신은 정말 불쌍해요. 이제 좀 기분이 괜찮아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문을 쿵 하고 닫고 나가버리는 이비.

밖의 복도로부터 감정이 담긴 선명한 발소리가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간다.

"..."

귀끝을 쉴새 없이 움찔거리며 한번에 말들을 쏟아낸 이비는 그대로 방을 떠나버렸다.

내가.. 행복해질 욕심이 가득하다고?

그럴리가.

그리고... 불쌍해?

그게 내가 듣고싶어하는 말이라는 것처럼 제멋대로 말을 내뱉고는..

... 적어도 여기가 어딘지는 알려주고 가던가.

".. 연초."

.. 연초가 절실하다.

덜컥.

"무.. 무, 무슨 일이... 아..?"

"...?"

연초가 소녀의 배낭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재차 한숨을 내쉬려던 순간 곧 닫힌 방문을 열고 다시 들어온 것은..

이전에 본 것보다는 몸을 가린 얇은 천의 겹수가 현저히 줄어들어 살빛이 비치고 있는, 비교적 편한 차림의 세레스티아였다.

"에단 님..? 정말로 깨어나셨네요..! 방금 이브가.. 아.. 그런데 왜인지 화가 나서..?"

"..."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세레스티아.

씩씩대며 걸어나가서는 마침 마주친 그녀에게 내가 깨어났다는 말만큼은 성실하게 전한 채 그대로 떠나버린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저.. 때문입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네? 이브가요...?"

하지만 그녀는 어째서인지 몹시 놀랐다는 반응이다. 그것도, 그녀의 화를 돋운 것이 바로 나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놀라고 있는 것 같다.

"... 그게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어릴 적부터 지켜봐왔지만..이브가 화를 낸 적은 이전에 겨우 한 번이었던 걸요.이브는.. 그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에 너무 익숙하거든요. 안쓰럽게도..."

"..."

".. 죄송해요.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너무 많이 말해버린 것 같네요. 늦었지만 제가 한 말들은 부디 잊어주세요."

감정을 숨긴다는 표현이 맞는 걸까?

오히려 나는 그 스스럼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부분이 불편했던 건데.

"이브는 착한 아이에요.. 뭐든 자기 탓으로 돌릴 줄만 아는 서투른 아이니까요."

".. 그런데 저 때문에 화가 났군요."

"... 그건.."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반응들을 보니 내가 괜한 말을 꺼낸 건가 싶다.

그래도 뭐.. 일단 이곳이 어딘지는 이제 알겠다.

아마도 지혜의 줄기 상층부에 있다던 세레스티아의 거처가 틀림없다.

이 침대, 익숙한 향기.

잠깐.. 향기?

왜 나는 이 향기가 익숙한 거지?

"그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그것보다는..."

저벅 저벅..

"정말.. 다시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에단 님.."

내가 이 익숙한 향기에 대한 의문으로 잠시 멍하니 있던 사이, 세레스티아는 한 걸음 한 걸음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나는 괜찮다.

잠시 몸속의 기력을 전부 빼앗겼던 것뿐이다.

몸에 특별한 외상도 없었기에 이렇게 금방 일어날 수 있었고..

"정말.."

그야 불사의 저주에 대해 모르고 있었을 테니, 이들에게는 다소 충격이 컸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내가 쓰러지고 난 다음, 바로 달려온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자는 괜찮은 건가?

"다행이에요..."

"어..?"

상념에 깨어난 순간,

나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던 세레스티아가 이쯤이면 멈출 거라고 생각했던 거리에서 한 발자국을 더 내딛는 것을 보며 당황스러움이 섞인옅은단말마를 내뱉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녀의 양팔이 양옆으로 스르르 벌어지며, 자연스레 그 가운데로 시선이 간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가까우면 침대에 앉은 채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나로서는 이것을 볼 수밖에 없다.

"잠...?"

이에 홀리듯 멍해지는 머릿속을 겨우 다잡은 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으나,

잠깐이라고 그녀를 멈춰세우기도 전에 그 사이 그녀는 또 한 발자국을 내디뎠고,

늦었다고 생각한 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당겼지만 이미 그녀의 양손이 내 머리를 감싸안듯 가두고 있었다.

포옥..

그렇게 도망칠 곳 없이, 나는 그녀가 내 머리를 껴안아 자신의 가슴 사이로 끌어당기는 행위를 그대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안면과 그 주변으로 좋은 향기가 나는 얇은 천이 먼저.

그리고 곧,

한참 복잡하던 머릿속을 부드럽게 끌어안은 풍요로운 가슴이 주는 극상의 포용감에 나는 머릿속으로 떠올린 말을 차마 입 밖으로까지 내지 못했다.

포오옥...

처음 봤을 때도 괜히 시선을 주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가슴에, 그 깊은 골짜기에 지금 이렇게 얼굴을 파묻고 나니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달리 보이는 것이 없다.

당황스러움은 둘째치고 내 안면을 뒤덮고 있는 이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두 살덩이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하고도 달콤한 살내음에 머릿속의 모든 고뇌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구름처럼 붕 떠버리고 만다.

긴장이 풀어진다.

이대로 잠들어버리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가 끌어안으면 끌어안을 수록 나는 더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겨졌고, 이 상냥한 품속에서 내 입은 결국 떨어지라는 말 대신, 긴장 풀린 신음을 진하게 내뱉고야 말았다.

"하아..."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