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59화 (59/137)

〈 59화 〉 9. 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

* * *

9.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9)

어느 순간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오직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어윽.. 컥!

가쁘게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깊은 물속에라도 있는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

심한 멀미가 찾아와 머릿속을 어지럽게 뒤집어놓고 있는 가운데, 질식의 위협에 발버둥 치던 나는 곧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을 쉬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

...?

.. 어떻게?

애초에 이곳은 어디지?

나는 어떻게 된 거고?

분명 나는 엘프들의 성소에서..

눈앞으로 팔을 들어올려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어둠 속이라서?

아니, 애초에 나는 지금 정말로 팔을 들어 올린 게 맞을까?

처음 당황하고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발버둥을 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쯤 되니 알 수 있다.

팔다리는커녕 몸의 그 어느 곳에도 감각이 없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호흡이 불가능한 데다가, 전신의 감각마저 없다.

앞으로 어둠이 보인다는 것조차 지금 내가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상태라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정신만큼은 그저 어지러울 뿐 아직까지 생각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평생을 자연스레 느껴온 오감과 충만하던 은총까지도, 그 무엇도 느낄 수가 없는 이 상황에서 점차 내 존재에 대한 인지가 흐릿해져 가는 느낌을 받는다.

이 지워져가는 듯한 느낌은.. 정말이지 소름 끼치기 그지없다.

이에 어떻게든 정신을 붙들려 했지만 시간개념조차 확실하지 않은 이곳, 과연 이곳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은 것인지도 모를 미지의 공간에서 나는 결국 생각하는 것도 그만둔 채 어둠 속에서 홀로 언제까지고 불명확한 기다림을 가졌다.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쩌면 고작 1초가 지금처럼 길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른다.

눈을 뜨고, 혹은 감으려고 해 보아도 변함없는 어둠.

변하지 않는 이 상황을 유일하게 타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은총은 가루 한 줌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의 결손은 막연한 두려움으로까지 이어진다.

이게 죽음인가?

이미 한 번 고해를 통해 경험해 본 죽음은 이것과는 달랐지만,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드는 이 불쾌한 느낌만큼은 다르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 봐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 점차 생각에 필요한 단어의 배열이 흐트러지고, 문자 하나하나의 형태와 의미도 희미해져간다.

이 어둠에 정신마저 완전히 잠식되어가는 느낌은 의외로..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을 꾸는 것처럼,

편안하고..

안락하다...

"...!!"

구르르르르륵!

철퍽...!!

"....커허윽....!"

어둡게 흩어져가는 정신을 갑자기 나타난 수많은 갈고리들이 낚아채 강제로 끌어올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나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육신의 감각이 다시금 내게 주는 저릿한 고통을 곧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구르르륵.. 구르르르르르륵....

액체와 기체 그 어느 쪽도 아닌 기이한 어둠의 덩어리가 내 옆으로 찢어져 내리고, 이내 빈틈없이 매끈한 무채색의 바닥에 스며들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몸을 움직이는 게 몹시 힘들었지만, 뻑뻑한 시야로 누군가의 맨발이 보인다.

"..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

"...?"

"조금만 참으세요. 익숙해지는 걸 도와드릴 테니."

힘이 담겨있지 않아 불안하게 흔들리는 가녀린 목소리와 함께 내게 가까워진 존재, 그리고 내 이마 위로 닿은 이 부드럽고도 청량한 느낌.

이전에 한 번 겪어본 적이 있는 세레스티아의 마나가 떠오르는 푸르른 기운이다.

"... 아.."

그 기운에 닿은 것은 비록 잠깐이었지만 몸 전체로 파문이 일듯 퍼져나가 손끝과 발끝, 그리고 어지럽던 머릿속까지도 맑게 일깨워 준다.

드디어 제대로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있게 된 내 시야로 들어온 것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잿빛의 공간.

그리고 내 눈앞에는 엘프로 보이는 이가 서 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길고 뾰족한 귀 끝을 보고 내가 섣불리 생각한 것일 뿐, 일반적인 엘프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머리카락이 있어야할 곳에서 대신 시작된 녹빛이 만연한 덩굴과 잎줄기를 길게 늘어뜨려 한 벌의 의복처럼 나신을 가리고, 중간중간 그 사이로는 형태부터 색까지 다양한 수천 가지의 꽃들이 수수한 것과 화려한 것들을 가리지 않고 피어나 있다.

게다가 그녀의 등 뒤로 피어나 허공으로 이어진 두꺼운 나무뿌리들은 마치 그녀가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도 느껴지게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언뜻 보기에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지만.. 이렇게나 푸르른 초목과, 많은 꽃들이 피어나 있는데도 초목의 풀 내음과 꽃향기 따위가 일절 맡아지지 않는다는 점은, 단순히 그려놓은 덧없는 환상처럼 느껴져 오히려 더 삭막하게 느껴진다.

"..."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

세레스티아와 닮은 녹색 눈동자는 그보다는 더 진한 빛깔을 띠고 있었지만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린 탓에 끝내 메말라 버린 것처럼 한없이 고요하고, 공허하다.

스르르르르륵...

"...?"

그녀의 머리칼과 의상을 이루는 덩굴 중 몇 개가 안심하라는 것처럼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싶더니, 나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워준다.

"... 당신은.."

... 끄덕.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맞다고 말 하는 것처럼.

"제가 세계수의 깊은 곳에서 본 것은.. 당신입니까?"

이어진 내 질문에 그녀는 긍정한다.

".. 맞아요. 하지만 다르지는 않아요. 세계수가 곧 저이고, 제가 곧 세계수이기도 하죠."

"..."

"동시에 저는 어머니이기도, 현자이기도, ... 당신들의 구원자이기도 하겠네요."

어머니,

현자,

그리고 구원자.

내가 알고 있는 구원자라 함은, 성양경에서 태양을 가지고 세상에 내려온 소테르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신이 구원자이기도 하다는 그녀의 말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우선.. 당신에게 사과드릴게요. 엿보는 시선을 느끼고 당황한 탓에 억눌러 오던 본능을 잠깐이지만 제어하지 못했어요."

".. 애초에 이곳은 대체 어디입니까?"

나는 대체 어떻게 엘프들의 성소에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 이곳은 제가 거처하는 곳. 세계수의 깊은 곳에 분명 존재하지만, 실재하지는 않는 작은 영혼의 회랑이에요."

실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실재하지 않는 장소에 발을 들이고 있는 거지?

"본디 영혼과 육신은 서로 다르기에, 육신을 가지고서는 독립된 영혼을 직접 볼 수는 없죠."

설마..

그 의미라 함은,

"네, 지금의 에단 당신은.. 생명력을 잃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난 독립된 영혼이기에 저와 대면할 수 있는 거예요."

"... 그렇습니까."

그녀는 자신의 본능을 잠시 제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모든 생명력을 세계수에 흡수당해 결국은 죽음에 이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분명 무한한 은총을 지닌 나였지만, 흡수당하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몸안의 모든 기운이 사라지는 지점에 한 순간 도달했던 것이라면 납득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

"저주로 인해 여전히 당신의 영혼은 육신에 묶여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스르륵...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늘어뜨리고, 한 번 고개를 숙인 뒤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내가 얼떨떨하게 그 사과를 받고 서있는 걸 본 그녀는 표정에 이렇다할 변화는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몹시 안절부절 못하는 것같다고 느꼈다.

그녀의 머리카락 덩굴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말이다.

"역시.. 소중한 생명을 빼앗은 빚을 사과 한 번으로 갚는 건 어렵겠죠."

".. 아뇨, 그런 게 아니라.."

"... 저는.. 아케라의 대륙에 두껍게 쌓여온 대지의 기억을 모두 보고 들은 역사의 증인이자 지혜 깊은 현자이기도 해요. 사과에 대한 성의의 표현으로 당신에게 몇 가지 조언을 드리는 건 어떨까요."

애초에 내게 있어 삶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불과하다.

죽음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저 지금은.. 고통이랄 것도 그다지 느끼지 못했던 만큼, 내 목숨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어색했을 뿐이다.

두 번씩이나 고해를 통해 목숨을 내던지려 했을 때에도 결국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내 목숨이 이렇게 허무하게 끊어져 버렸다니 우습기는 했지만..

그로인해 세계수와 접촉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조언까지 듣게 된 것은 의도치 않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편이 제 마음이 더 편할 거예요."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겠죠."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잠시동안 눈을 감았다가 뜬 이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당신이 이곳에 오게된 이유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하늘 위로 다시 태양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면 세계수의 붕괴는 막을 수 없어요."

막을 수 없다. 그 이외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단언하고 있다.

"걱정마세요. 당신이 전해준 은총을 통해 마지막 생명의 정수를 나누어 드릴 테니까요. 그러니 성소에 대한 접근은 이제부터라도 금지하도록 전하세요. 이것이 제 첫 번째 조언이에요."

구르르륵... 구르륵..

그녀의 시선이 내 주변에서 일렁이는 검은 기운에 닿는다.

"... 저주가 당신을 부르고 있네요."

대화 도중 언제부터 나타난 것인지 모를 검은 기운은 내 주변으로 점점 짙게 피어오르고 있다.

같은 어둠이지만 허무의 안락은 고사하고, 그저 불쾌하고, 집요하게 질척거려올 뿐인 기척이다.

그녀의 말대로 내 안식을 바라지 않는 저주가 직접 나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 이곳, 생명의 요람에서 당신은 잠시동안 머물게 되겠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당신에게도 그리고 당신의 일행에게도 필요해요. 그렇다고 너무 오래 있어서도 안되겠지만.. 저주에 대해서는 알아두는 편이 좋겠네요. 이것이 제 두 번째 조언이에요."

내 일행..?

당장 내게 일행이라고 할만한 이는 그 소녀뿐이다.

그리고 저주.. 저주에 대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안그래도 피에 관심을 보이는 평범하지 못한 엘프에게 마지못해 어울려주고는 있는 중이었다.

여러 의문들이 생겨났지만, 눈치채지 못한 사이 벌써 내 두 눈 바로 아래까지 끈적거리는 어둠이 몸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어둠이 뒤덮은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이곳에 오기 전 처럼, 어둠 속으로 다시 모든 감각들이 잠식되어가는 느낌. 심지어 아직 이 어둠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여전히 위를 향해 오고 있다.

.. 나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위해서.

"그리고..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금서고에서 당신은, 그 너머의 여정에 있어바라지 않지만 그럼에도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것이.. 저의 마지막 조언이에요."

잠깐,

잠깐만.

이 조언들은 분명 내게 하고 있는 것들이지만,이래서야 세계수의 죽음을 막기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오히려 의문이 늘어났을 뿐, 내가 정말로 묻고 싶었던 것들에 대답은 전혀 되지 않았다.

마치 내 질문을 회피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이라도 끌려는 것처럼..

내가 느낀 그 감정들이, 내 착각이 아닌 실제 그녀가 품고 있던 감정이라면...

설마..

"...!"

고독을 품은 그녀의 슬픈 눈동자는 어둠 속에 집어삼켜져가는 나를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결국 시선을 돌린다.

시야 위로 어둠이 거미줄을 치듯 뒤덮어간다.

그리고 곧.

"커허윽, 허억.....!!"

나는 깨어났다.

"허억..! 헉.. 허억..."

억센 손길에 붙잡혀 있던 목이 이제 막 해방된 것처럼, 꺽꺽대며 수차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에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어둠과 잿빛의 공간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일단 이곳은 당장 내가 누워있는 침대와 이불도 보이고, 침대 주변으로 쳐져 있는 얇고 가벼운 천과 각종 가구들에까지 시선이 닿는다.

정말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누군가의 방..

.. 누구의?

"... 히끅?"

그렇게 천천히 돌아간 시야는, 입을 벌린 채 차마 소리를 밖으로 내지 못하고 그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은발의 엘프에게까지 닿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귀신이라도 본 것같이 흔들리고 있었고, 끝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딸꾹질을 하며 어깨를 크게 움찔한다.

"... 이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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