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10. 은방울꽃은 이슬을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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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은방울꽃은 이슬을 떨군다(2)
내가 지금 이곳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도 바실리카는 새롭게 닥쳐온 위협에 숨통이 조여들고 있을지 모른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 그들.
적룡교와, 그 대주교중 하나.
마물이 아닌 자가 대화재의 흔적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넓은 대삼림에서 정확히 맞닥뜨리게 된 것은 그들이 내 목적지의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 목적지라 함은 당연히 지금 내가 발붙이고 있는 엘프들의 마을이다.
깊은 지하에 거대한 덩치를 잘 은폐한 덕분인지 아직 이곳을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가까이에 놈들이 있었던 데에는 나와 소녀가 이곳을 찾아온 것처럼.. 그들에게도 생명의 나무의 가지가 있던 것이 아니고서야 생각하기 힘들다.
최악의 경우, 이미 바실리카의 내부에 적룡교의 광인들이 숨어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것도 어쩌면 바실리카의 대성당 안에 말이다.
바실리카의 성물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주교이자, 나와 소녀가 대삼림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고있던 인물이라고 한다면.. 우선 그자리에 있었던 다나 대주교님과 우토 주교, 그리고 모르부스로 향한 사절의 이름 모를 주교도대주교님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했으니.. 이렇게 셋 정도다.
대주교님은 논외로 하고,우토의 경우에도 바실리카의 이름있는 가문인 발헤인 가의 자제로서 벽 안에서 태어나 자란 그가 적룡교와 어떠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니 남는 건 모르부스로 향한 그 주교 하나 뿐이겠지만.. 그 또한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사절에 함께 떠났으니 확실한 것은 아니다.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쪽은 아직 묘목조차 손에 넣지 못한 상황이니..
이대로 더 지체할 시간 따위는 없을 텐데도...
"..."
나는 현재 호숫가에 우두커니 서서 불 꺼진이비의집안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집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어째서인지 기척도 없고, 집안의 불도 전부 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렇게 화를 내는 걸 보고 마음 편하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리는 없다.
"하아..."
계속 이렇게 근처에서 수상쩍게 그녀의 집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도 상황이 우습다.
결국은 돌담을 지나, 마당에 가지런히도 놓인 생기 잃은 표본들 사이를 지나..
문 앞에 선 나는 오른손을 들어 손등으로 작게 노크했다.
똑 똑
"..."
하지만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듣지 못한 것인지 반응없는 문 너머.
똑. 똑.
조금 더 힘을 주어 다시 노크했지만 여전히 대답없는 문 너머에, 나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이이익...
최대한 조용히 잡아당겼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이 나무 문은 그러한 내 바람을 전부 무시하고는 흉악한 비명을 질러댄다.
"... 쯧."
괜히 한번 혀를 차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에는 다시 한번 인기척을 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던 거지만, 이 어두운 방 안에서 별다른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
바깥보다 어두운 집 안에 점차 눈이 익숙해지고, 그래도 여전히 어두운 가운데 그녀의 책상 위로 수선이 끝난 하얀 사제복이 놓여있는게 눈길을 끈다.
더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자신의 침대 위에 가운도 벗지 않은 채 몸을 늘어뜨리고 숨소리를 내고 있는 이비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씩씩대며 뛰쳐나가더니 제풀에 지쳐 잠들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로 몸을 내던진 것인지, 침대 위에 엎드려 고운 은발을 이리저리 흐트러뜨리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도 별다른 반응은 없다.
집안이 왜 어두웠나 싶었는데 설마하니 정말 잠들어 있었을 줄이야.
"... 후우.."
맥빠지는 느낌에 한숨을 내뱉으니, 불편한지 뒤척거리는 이비.
"으으..."
내 한숨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곧바로 이어진 그녀의 심음에 괜히 움츠러들 뻔했지만 단순히 잠결에 내뱉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엎드려서 잠들어서야 불편할 수밖에.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내가 신세를 진 침대맡을 바라보니, 관은 제대로 쇠사슬에 감겨 한구석에 얌전히 놓여있다.
이대로 조용히 내 물건만 챙겨 나가볼 생각이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더 신세를 지는 것도 불편했으니 말이다.
".. 안돼..."
"...?"
하지만, 다시 한번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 으흐으... 으으.."
뒤척이다 결국 옆으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이 인상과 식은땀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하필 이런 때에..
"... 안돼.. 안돼.."
그냥 이대로 모른척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악몽을 꾸게 된 이유가, 내가 무심히 그녀의 민감한 곳을 건든 게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 발목을 붙잡아 온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점차 표정이 안좋아지는 이비의 눈가에 결국에는 눈물까지 맺히는 것을 보게된 나는..
"이비...!"
"...!"
그녀의 두 여린 어깨를 붙잡고, 그대로 잡아당기다시피 일으켜 세워 잠을 깨웠다.
"... 아빠..?"
"..."
막 깨어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마찬가지로 영문모를 소리를 하며 나를 바라보던 이비는
"아빠..야..?"
"...?!"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품속으로 파고들어 양팔로 내 허리를 껴안았다.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 가지 마..."
"...!"
아예 두 눈을 꼭 감은 채 나를 안은 두 팔에 더욱 힘을 주고 있다.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힘을 주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당황하여 앞으로 뻗은 두 손을 그저 허공에 어색하게 들어 올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연신 뺨을 문지르고 있는 이비.
그녀가 화를 내던 모습이 겹쳐 보였던 만큼, 무엇보다 부담스럽고, 뒷일이 걱정이 되었지만.. 그녀의 행동에 담긴 감정이 몹시 절박하고 안타까워 차마 밀쳐낼 수가 없다.
다만 이대로 계속 둘 수는 없었기에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이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그녀의 길고 뾰족한 귀끝이 한 차례 움찔하고,
멈칫.
다행히 이번만큼은 목소리를 제대로 들었는지 가슴팍에서 조심스레 얼굴을 떼어낸다.
"....."
"..."
물기 젖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이비.
그녀는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당황스러움을 눈빛에 드러내고 있다.
나는 내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나 역시 곤란해 하고 있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 미안..해요."
말을 더듬거리며 사과해오는 그녀를 보며, 내 무심함에 대한 대가를 이렇게 치르고 싶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 악몽을 꾼 모양인데.."
"... 네."
"자주 그러는 편인가?"
.. 끄덕.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몹시 풀이 죽어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여 오는 이비.
"잠깐 내 물건들을 가지러 온 건데, 그러니까..."
"..."
이 적응 안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까지 괜히 말하기 불편하다.
더 그녀의 감정에 말려들기 전에 어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그대로 뒤돌아 떠나려다 팔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저항감에 엉거주춤 멈출 수밖에 없었다.
"... 가지.. 말아요."
"..?"
나를 껴안고 있던 팔은 풀어주었지만, 끝내 내 옷자락을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이비.
그녀의 손이 안타까울 정도로 떨리고 있는 게 보인다.
"이비,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 부탁.. 할게요."
"..."
부탁한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내가 이를 들어주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끝내 시선을 떨어뜨리는 이비.
내 옷자락을 잡은 손에도 힘이 점차 빠지는게 느껴진다.
"..."
"..."
.. 당황스럽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되어버린 상황인지는 어떻게든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내게 가지 말라며 붙잡는 이유만큼은 전혀 모르겠다.
그렇게 화를 냈으면서.. 지금은 남아달라는 건 어째서인지.
마음이 약해진 상태로 누가 되었든 그저 옆에 있어주기만을 바라는 거라기에는..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 상대로는 적합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대답 없이 침묵할 뿐인 내게, 그녀는 그저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가녀린 어깨를 작게 떨고 있을 뿐이다.
이 성가신 엘프가.. 이렇게까지 나를 곤란하게 해올 줄은 몰랐다.
세계수의 조언에 따라 연구에 대해서는 도움을 받아야 했던만큼, 나는 그저 지내는 곳만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거절했다가는 그 거리가 내 의도보다 훨씬 아득히 멀어질 거라는 거라는 예감이 든다.
... 세계수의 조언은 과연 여기까지 내다본 것인지.
때문에 안타깝게도 지금 내게 더 주어진 선택지는 없다.
".. 평소처럼 행동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에단은.. 제가 싫다고.. 했잖아요."
싫다고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같은데..
그 평소의 모습이 대하기 피곤하다는 말이야 분명 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딱히 변함이 없고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보다는 그편이 나으니까."
지금처럼 주변을 붙잡아 늘어뜨리고 끌어당기는 이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보다는 조금 피곤한 편이 나았다.
"..."
내 요구대로 자신의 입가에 힘겹게 미소를 띠어올리는 이비.
"이렇게요..? 에헤..헤."
복잡하게 감정들이 섞인 엉망인 얼굴이었지만,
억지로 애쓰고 있는 게 보였기에 대놓고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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