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69화 (69/137)

〈 69화 〉 11. 불신과 맹신

* * *

11.불신과 맹신(4)

넓은 회랑은 나를 둘러싼 거북한 시선들로 가득차 있었음에도 적막을 유지하고 있다.

등불이 흩뿌린 빛이 매끈한 바닥에 비치어,

나는 고개를 숙여도 이 밝은 빛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고개를 드세요, 에단."

익숙하지만 다른 목소리.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애써 차갑게 몰아세우는 것처럼..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고개를 들라고 한 것은...

원로회의 수장, 세레스티아다.

그녀의 연녹색 눈동자는 이미 은은한 빛을 흩뿌리고, 이전과 다름없이 내게 진실을 요구해 오고 있다.

진실...

"당신이.. 아이들을 죽였나요?"

"... 기억나지 않습니다."

벌써 세 번째.

똑같은 물음이었고,

내 대답 역시 세 번째가 되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왜 계속 그렇게 대답하시는 건가요.. 말해주세요. 당신은 아이들을 해치지 않았다고요."

애원하듯 말해오는 그녀를 보면서도, 나는 동요없이 대답했다.

"... 제가 한 짓일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

"어째서 계속 그렇게.. 전부 포기해 버린 것처럼...!!"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세레스티아는 입술을 깨물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어온다.

".. 세계수를 정화하기 위해 매일같이 두 팔과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죽음마저 몇 번이고 견뎌내던 당신이... 갑자기 경계를 넘어, 수인 아이들을 목졸라 살해했다는 그 말을... 제가.. 제가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세레스티아님, 저 자의 정신은 몹시 불안정합니다. 평범한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 프루기스 원로..! 그는 우리들을 위해서...!"

세레스티아의 목소리가 보기 드물게 높아졌지만,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하아..."

".. 애초에 이번 사건은 너무나도 이상해요. 하필 이비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니요, 오히려 그녀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겠죠."

"...!"

"그녀는 뛰어난 마법사입니다. 저 광인에게는 그야 걸림돌이었겠죠."

덜덜덜...

탁상 위로 올려놓은 세레스티아의 고운 손이 주먹을 쥐고 안쓰럽게 떨려오고 있다.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당장 그 발언...!"

"왜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까 세레스티아 님, 정신 차리십시오. 그가 이곳에 오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이런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아이들이 죽기 직전 사건 현장 근처에서 그의 모습을 봤다는 수인들의 목격담도 있고, 무엇보다... 후우.. 그동안 그와 계속 함께 있었던 저 어린 엘프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 이브..?"

푸르기스의 입에서 이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뜬 그녀는 이비에게 고개를 돌려 많은 의미가 담긴 시선을 보내온다.

"..."

이비의 고요한 눈동자는 나를 한 번 거치고, 세레스티아에게로 가 닿는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비를 보고 세레스티아는 결국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린 엘프여, 증언하십시오. 제게 말했던 그대로 말입니다."

주도권을 잡은 푸르기스는 세레스티아 대신 심문을 이어나간다.

"... 어머니의 나무에게 맹세코, 이 자리에 선 저는 진실만을 입에 담겠습니다."

"이브..."

세레스티아의 입에서 애처롭게 이비를 부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처음과 같이 변함없이 고요하다.

"제가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에단은 가끔 침대에서 일어나 말없이 제 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에 앉거나, 관의 앞에 우두커니 서있기도 했고요. 단순히 잠걸음으로 생각해 당시에는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지만.."

"정신불안은 잠걸음을 유발하기도 하죠."

"... 잠걸음이 아닐 수도 있지요."

하나 둘 거들어 오기 시작한 원로들.

이곳에 세레스티아의 의견을 따르려는 이들은 없어 보인다.

역시나.. 그녀는 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여러가지 이유에서 말이다.

"그날, 자리를 비운 건 푸르기스 원로 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원로 님은 에단의 위험성에 대해 인지하고 계셨고, 사제에게도 적용되는 마법 구속구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의 저주에 대해 개인적으로 연구하며, 아직 알아내지 못한 위험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저는 단순히 혹시모를 상황의 대비를 위해 그 의뢰에 따랐습니다. 금방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

피의 독기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저주는 나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그 사악한 용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위험하다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에 늙지도 죽지도 않는 인간을 보며, 무서웠겠지.

나도 스스로가 품고 있는 위험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터져나갈지 몰라 두려운데, 그들이 보기에 나는 사악한 용에게 은총을 내려받은 마물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오히려 이상한 것은, 나에게 믿음을 보이고 있는 세레스티아 뿐이었다.

"저는 그가 맨정신에 이런 짓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저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용의 저주의 어떠한 위험이 그의 몸을 움직여 이런 짓을 벌였다고 한다면, 고의성의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그를 구속하는 것은 옳은 판단입니다."

"어린 엘프여, 솔직하게 말해주어 고맙군요. 하지만 고의성에 대해 마냥 저주를 탓하며 넘길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그가 겪었고, 그 사실을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푸르기스 원로의 주장은 합당했다.

처음 일어난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만약 이게 처음이 아니라면 위험을 알고도 아무런 대비도 대처도 하지 않은 내게 반드시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미 내가 수인 아이들을 죽인 범인으로 확정되어가는 분위기에서, 세레스티아는 이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기 위해... 아니, 내가 이를 붙잡게 하기 위해.. 간절히 물어온다.

"... 에단.. 이런 일이... 이전에도 있었나요..?"

그리고 나는.

"..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세레스티아에게 대답했다.

"그건.. 언제..."

"바실리카에 있었을 때입니다."

"알고 있었다면...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

나의 이 침묵은..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그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 이렇게 까지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

이기적인 내 속내는 그들의 입에서 내 죄에 대한 무거운 판결이 나오기만을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모든 질문에 대해 거짓없이 대답했다. 숨길 이유도, 그럴 의지도 없었을뿐더러 그녀의 저 능력 앞에서 나는 진실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진실이란 무엇일까.

모두가 진실이라 믿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내 마음속의 의문과 불안이 이를 거짓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것은 내게 있어서 손쉽게 거짓이 되어버리는데 말이다.

불안하게 눈빛이 떨리고 있는 그녀를 보며 이 의미없는 재판을 끝내기 위해, 푸르기스는 문앞의 경비들에게 손짓했다.

"필요에 의해 수인 소녀 하나를 증인으로 본 재판에 참석시키겠습니다."

그의 지시에 경비들이 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아.. 안돼. 아직 저놈을 만나게 해서는...!"

그 수인 소녀가 누구인지 모를리 없는 헹겔은 소녀가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며 다급하게 이비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마법에 의해 허공에 고정되어 꼼짝도 하지 않는 구속구가 애석할 뿐이다.

"이비... 너..!"

끼이이익..

결국 문은 열렸고, 양쪽으로 선 엘프 경비들의 감시를 받으며 그 작은 손목에 마찬가지로 두꺼운 구속구를 찬 소녀가 회랑 안에 불안으로 떨리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바로 뒤로는 사슴 수인 하나가 뒤에 서서 소녀의 어깨를 연신 토닥이고 있었지만, 소녀의 텅 빈 눈빛에는 그 어떠한 변화도 없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소녀의 시선을 느낀다.

"..."

그 눈빛에는 잠시 이채가 서렸던 것 같지만, 이내 그 위로 덧씌워진 불신은 소녀의 눈동자를 검게 물들인다.

"아직 어린 애라고..! 당장 저거 풀지 못해?! 저 아이는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아직 어리고, 저항하지 않았기에 두 손만을 구속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저 수인은 그의 일행입니다. 잊으셨습니까?"

"....크... 으읏!!"

그녀가 손목이 부러져라 힘을 줘 보아도, 구속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얌전히 있으십시오. 당신은 경계를 지키는 엘프 경비 둘을 폭행하고, 경계를 허락 없이 침범한 것도 모자라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그 대상이 저자였기에 망정이지, 지금 당신을 구속한 것 때문에 수인들이 들끓고 있는 건 알고 있습니까?"

"젠장...! 젠자앙...!!"

헹겔이 나를 죽이려 한 것도, 이를 위해 무리하게 엘프의 영역을 침범하는 선택을 한 것도,

내가 이렇게 나타나서는 안된다고 한 것도.

그녀가 소녀를 대하는 태도나 눈빛을 보니 이해가 된다.

그 모습을 보며.. 우습게도 나는 이걸로 한시름 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세레스티아님. 저 어린 수인에게 질문하십시오. 저자가 자신을 해치려 한 적이 있는지 말입니다. 그 대답이 긍정이라면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해야 하는 거죠?"

"제정신이든 아니었든 저자는 굳이 수인 아이들만을 목졸라 죽였습니다. 그가 저 소녀를 일행으로 데리고 다닌 이유를 우리는 아직 확실하게 듣지 못했지 않습니까."

"에단이.. 그럴 리가..."

하나같이 나를 살인자로 지목하는 증언이 쏟아지자, 결국 혼란에 빠진 세레스티아는 푸르기스 원로의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을 잃고 흔들리고 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물어보십시오. 에단이 그녀의 목을 조른 적이 있는지, 혹은 죽이려고 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지 말입니다."

"..."

진실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를 알고있는 만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걸로.. 끝이구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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