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12. 불의 계약
* * *
12.불의 계약(1)
스으윽..
생기를 얻고 건강한 빛을 되찾아가는 세계수의 가지를 쓰다듬고 있는 것은 긴 머리칼의 하이엘프 남성이다.
그의등 뒤로 늘어진 결 고운 머리카락을 한번 모아주는 매의 형상의 은 장신구가 눈에 띈다.
그는 가지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왼손을 빤히 바라보다, 격식 차린 의상 탓에 길게 늘어진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
긴 옷소매에 가려져 있던 그의 손등이 드러나자 함께 나타난 것은, 그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붉은 문양이다.
여러 개의 날카로운 칼날처럼도 보이는 그불길한문양이.. 활활 타오르는 불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곧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후.."
그는 한참동안을 그 문양을 노려보다, 끝내 제풀에 지쳐 시선을 거두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은.. 이행될 것이다.
그 전에 이 일을 마무리 짓고... 자신은..
"모든 것은... 더 많은 생명을 지켜내기 위함입니다."
*
밝은 빛에 슬슬 눈이 익숙해져갈 즈음 다시 문은 닫혔고, 누군가가 저 앞에 서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어둠 속 실루엣이다.
깜빡.
그게 누구인지는 곧 확인할 수 있었다.
"... 이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 당신을.. 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어째서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걸까.
깜빡.
"..."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메마른 눈동자로 말없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탁!
"...?"
그러나 이내 그녀의 손가락이 튕겨지는 소리와 함께, 끊어질 듯 깜빡거리고 있던 성소의 조명들이 일제히 환하게 밝혀진다.
"꼴이 말이 아니네요."
"...?"
나는 그녀의 그 목소리를 듣고, 상황에 들어맞지 않는 위화감에 미간을 좁혔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던 그녀의 눈동자에 피어오른 것은 나를 향한 우려와 미안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해도 대답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거라 마음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터벅 터벅.
"심한 말로 상처를 준 것같아서 미안하네요. 하지만 원로회에 의심을 사지 않고 당신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이 방법뿐이었어요."
"상처...? 미안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데."
"흐음.."
꾸준히 빨려나가고 있는 은총에 가만히 있어도 숨이 가쁠 정도였지만, 나는 간신히 목 아래에 힘을 주고 끝까지 말을 토해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이걸 어떻게 한다... 하는 작은 심음을 내뱉은 이비는 여전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너...?"
"..."
구욱...
"...!"
내 허리를 감싸안는 그녀의 가녀린 두 팔과, 가슴께에 기대어진 머리의 감촉이 전해져 온다.
"으..."
하지만 이내 옅게 인상을 찌푸린 그녀는 내게서 떨어지며애써 미소지어 보였다.
그 발걸음이 비틀거리는 이유가 내게 닿자마자 마나를 흡수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래는 이러고 못있겠네요. 우리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목이 마르신 건지."
그 덕분에 내게는 조금이지만 여유가 생겨났다.
"... 지금 이거, 뭐하자는 건데."
"위로를 해 주고 싶었어요. 제 편 하나 없이 얼마나 외로워하며 저 깊은 곳에 홀로 틀어박힐지 걱정이 됐거든요.. 그런데... 얼굴을 보아하니 제 생각대로 잘 되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에헤헤.."
"그러니까... 너.."
스윽...
"입 벌려요. 음식은 힘들어도 물 정도는 숨겨올 수 있었거든요."
"..."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품속을 뒤져 작은 수통 하나를 꺼내든 이비였지만, 나는 당연히 그 도움의 손길을 거부했다.
입을 벌리지 않고 버티는 나를 보며 입을 삐죽이는 이비.
"정말...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네요."
"토라졌다니 누가... 읍..?"
어린 아이에게나 할 법한 그 말에 내가 반사적으로 반응하자 이때다 싶었는지 물통을 내 입에 들이 붓는 그녀와, 기어이 이마저도 거부하려는 나 사이의 작은 몸부림 탓에 결국에는..
"커흑.. 콜록.. 콜록..."
"아니,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요? 이만큼 했으면 적당히 마셔주던가 해야지."
"콜록... 갑자기 왜이러는 거냐고 묻고 있잖아."
수통에 담겨있던 물 대부분이 바닥에 쏟아진 것을 보며, 이비는 또 한번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내쪽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내 유죄에 힘을 싣어주는 증언을 한 건 물론이고, 내 앞에서는 그러한 말까지 했던 그녀가 어째서 하루만에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후우... 경비대는 푸르기스 원로님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만큼, 지혜의 줄기 내부에는 그의 눈과 귀가 도처에 깔려있다고 봐도 무방해요. 따라서 그를 속이기 위해서라도, 저는 모두의 앞에서 그런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연기..?"
그게.. 연기였다고?
"에단 씨도 알다시피.. 제 연기는 서투르잖아요. 그 대신 무표정이라면 한 번도 남들 앞에서 지어본 적 없는 만큼 속여넘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어요. 어때요, 깜빡 속으셨나요?"
눈은 여전히 미안함을 담아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면서 입꼬리를 잡아당겨 어설픈 미소를 지어온다.
그 익숙한 얼굴에 안도할 법도 했지만 당장은 속에서 차오르는 거부감이 그것을 틀어막고 있다.
나를 이해시키기 위한 그녀의 설명에도 오히려 내 머릿속은 더 혼란스워질 뿐이다.
갑자기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는..
왜 이제 와서...
"그 대신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두통이 일어 머리가 안쪽에서부터 깨져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 말을 믿으라고...? 애초에 너한테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왜 없어요. 재판장에서도 분명 말했잖아요. 저는 당신이 맨정신에 이런 짓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
재판장에서 세레스티아의 두 눈을 앞에 두고, 이비가 그런 말을 했다는 기억은... 있다.
하지만..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제멋대로 일을 꾸민 거예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거대한 흐름 속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휘말려 있었고.. 신중하게 상황을 살피고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미리 설명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어요. 이해.. 해 주실 거죠?"
이해하고 말 것도 없이, 나는 그녀에게 내가 들어야 할 말을 들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미 나는 이곳에 나를 묻을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지금 그 행동들이 전부 다른 이들을 속이기 위한 연기였다고 내게 말하고 있는 거다.
"사실 이것도 에단 씨가 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겨우겨우 생각해낸 임기응변이었어요. 그때의 제게는 주어진 정보가 너무나도 적었고.. 거기다 푸르기스 원로님이 워낙에 의심이 많아야죠."
그녀는 나를 범인으로 단정지은 그 커다란 흐름에 편승하는 척 그 안에서 상황을 살피고, 이후에 나와 만나기 위해서라도 쓸데없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들과의 신뢰를 쌓은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당장 이렇게 붙잡혀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게 된 내게 어떤 것을 더 원해 굳이 번거롭게 그녀가 이런 연극을 할 리도 없었기에, 더더욱혼란스럽다.
그녀는.. 진심인 건가?
"이번에 이렇게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구속구의 마법진을 새롭게 설계한게 저라서 내구성 확인을 위한 명분으로 푸르기스 원로님께 겨우 허락을 받아낸 거예요."
"... 푸르기스."
재판장에서의 세레스티아 대신 심문을 주도하던 원로.
이곳에서 쓰러져 처음으로 세계수와 대면하게 되었던 그날, 세레스티아의 옆에 서있던 또다른 원로의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재판이 그의 주도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둔 덕분에 제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도 분명 있으니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주세요. 제가 머리가 좋은 편이기는 해도 미래를 예지한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라서요."
"... 네가 하는 말들, 하아.. 모르겠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
잠자코 들으라는 듯. 단호하게 치고 들어오는 이비.
그녀답지 않게 서두르는 그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상황을 꾸민 누군가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번 사건에서의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풀려요."
이젠 내 앞에서 제멋대로 떠들고 있는 그녀를 멈출 수도 없을 것 같다.
애초에 온몸이 결박된 내게 그럴 방법도 없었고.
"에단 씨는 위화감 같은 걸 느끼지 못했나요?"
위화감...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건 그저 바실리카에서처럼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미 세계수로부터 아이들의 목을 조른 것이 나라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까지 전해 듣게 되었다.
"..."
"있었나 보네요. 말해 주세요. 분명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도움을 운운하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그 시선이 거북했기에..
나는 그녀를 일찍이 단념시키기 위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것 같아 말해주겠는데, 아이들을 죽인 건.. 나야. 내가 이 손으로... 아이들을 죽였다고."
"그건, 어머니와 또 한 번 만나신 건가요?"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만을 반복해왔던 내가 처음으로 단언한 것이었기에, 금방 내가 세계수와 만났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비였지만..
".. 그래. 그러니까...?"
그런 내 단언에도 이상하리만큼 그녀는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알아요."
"뭐...?"
"그게 아니고서는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수긍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평소의 목소리였기에 내겐 더 큰 충격이었다.
".. 너 지금 무슨 소리를..."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에단 씨가 느낀 위화감에 대해서요."
내가 죽인 걸 이미 알고 있다면서,
게다가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해놓고서...
여전히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는 그녀의 말이 꼭 나를 놀리고 있는 것만 같아 짜증이 솟구친다.
세계수가 보인 그 앞뒤가 안맞는 말들을 그녀가 또 한번 내 앞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죽인 게 맞다면, 이대로 내버려두면 될 일이다.
대체 뭘 위해 그녀는 나를 도와주겠다며 이렇게까지 매달려 오고 있는 걸까.
"이만 돌아가. 나는 도와달라고 말한 적 없어."
"... 순순히 대답해줄 생각은 없어 보이네요."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있는 그녀와 나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그녀의 눈동자는 집요할 정도로 내게서 시선을 놓지 않고 있다.
"좋아요.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들은 전부 제 혼잣말이에요. 어차피 에단 씨는 지금 귀를 막을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잠자코 거기서 듣고 있어요."
"... 무슨."
그녀답다고 해야할만한, 뻔뻔함을 내세워 내 말문을 틀어막은 이비는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가장 의문이었던 목적에 대해서는 재판의 결과를 통해 알아낸 만큼, 어느 정도 정리는 끝났거든요."
... 목적?
"지나친 완벽함은 오히려 의심을 부르는 법이죠. 푸르기스 원로님은.. 그 의심 많고 꼼꼼한 성격 탓에 오히려 흔적을 남기고 말았고요."
그녀는 마치 흥미로운 것을 발견해낸 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주저 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요, 시작은 그날이었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