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12. 불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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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불의 계약(3)
시체...?
그녀의 그 의견은, 아이들 모두가 묶여있지 않았음에도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없이 목이 졸려 죽었다는, 그 사슴 수인의 증언에 들어맞는 살해 방법이었다.
아이들을 목 졸라 죽인 게 틀림없이 나의 이 죄 많은 두 손이라고, 세계수가 굳이 내 손을 짚어온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을까?
... 아니, 아니겠지.
그럴리가 없다.
"어때요 제 추리는?"
"..."
"에단 씨가 어린 수인 아이들을 죽이는 데에 집착하는 미치광이 살인마일 거라는 추리보다는 낫지 않나요?"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할 수 없다.
그럴 수 없다.
나는..
"차라리 듣고 싶지 않았나요?"
"...!"
"이대로 스스로에게 죄를 씌우고, 여기까지 와버리고 말았으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며.. 그렇게, 포기할 명분을 얻고 싶었나요?"
은발의 엘프는, 그 푸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스스로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하고 생각해 본 적 있죠?"
"... 뭐..?"
"분명 있을 거예요. 당신은 항상 나쁜 사람인 척을 하잖아요. 그건,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 아닌가요?"
그녀의 말은 마치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거북한 곳을 더듬어 왔다.
"전부 다 이해한다고는 말 못 하겠네요. 사람마다 겪은 일들도 생각하는 것도 전부 제각각이잖아요. 하지만 절망 속에 서있는 이들은, 그들 모두가 마음속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니까요."
"... 너는.."
"상실의 아픔은, 그걸 내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절망으로 변해 마음을 좀먹기 시작해요."
그녀의 저 눈동자는..
익숙하다.
거울 속에 비치던,
술잔 안에 비치던,
타인의 눈동자에 비추어지던...
나의 눈동자가..꼭 저런 썩은 물고기 같은 흐리멍덩한 빛깔을 띠고 악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질척거리는 감정의 늪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 있기는 해요."
푸스스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던 나뭇조각들과 함께 그 질척거리는 감정들을 모조리 바닥으로 쏟아버리고 손바닥을탁 탁맞부딪혀 털어내면서 말을 이었다.
"마음속 소중함을 버리는 거예요. 이 나뭇조각들처럼요."
"..."
"그리고 그건.. 나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회피죠."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이것을, 그녀는 아주 훤히 꿰고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서 궁상떨지 말고 밖으로 나오면... 제가 좀 더 나은 방법을 하나 알려드릴게요."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나를 나오게 하고 싶어 한다고?
"... 어째서 그렇게까지 너는, 나를.."
"그 질문에 대해서는 이미 대답하지 않았나요?"
내가 아이들을 죽였을 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대답했었다.
그래,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묻고 있는 건 그게 아니었다.
"네가 틀린 거라면? 너도 네가 틀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지금 이렇게 자신 있는 척을 하고 있는 거잖아."
"음.."
"넌 네가 말한 대로 똑똑한 녀석이니까. 그러니까 알 거야. 네 그 추리들에 얼마나 커다란 빈틈들이 있는지."
"..."
"그러니 날 찾아온 거겠지."
그녀가 단순히 내 꼴을 구경하려고, 혹은 물 한 잔을 건네려고 나를 찾아온 건 아닐 터였다.
내 추궁을 부정할 수 없었는지, 나와 쭉 눈을 맞추고 있었던 그녀는 힘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얕은 헛웃음으로 숨을 몇 차례 털어냈다.
".. 맞아요. 제가 의심하고 있는 푸르기스 원로님은 셀렌 님의 앞에서 '진실'을 이야기했으니까요."
"그래."
"하지만 그 진실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이 가혹하기만 한 건지.. 에단 씨는 잘 알고 있잖아요."
"..."
"제가 아는 셀렌 님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어머니께 받은 그 눈을 너무 맹신한다는 거죠."
나는 수긍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그 말을 듣고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그 눈을 맹신했기에, 나는 그녀가나를포기하게 만들 수 있었다.
"셀렌 님을 자극해서, 스스로의 결백을 어머니의 능력을 통해 증명하려 한 거라면..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겠지만... 대체 어떻게 한 걸까요?"
"내게 묻고 있는 거라면,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흥, 끝까지 심술을 부리시네요. 기껏 마음 써서 와준 사람한테.."
".. 그만 좀 해."
이젠 지겹다.
그녀의 저 친한 사이를 흉내내는 행동들, 내가 받아줄 거라는 기대를 아직도 버리지 못 한 건가?
"난 단 한 번도, 네게 마음 써달라고 한 적 없어."
아니라면... 그녀는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왜 나 같은 걸 위해서.. 이런 위험을 감수하려 드는 거냐고.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닌데 왜?"
그 차가운 물음에 잠시 굳어있던 이비는... 입가에 간신히 머금고 있던 웃음기마저 놓쳐버리고, 자신의 입술을한 번 세게깨물었다가..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입술을 떼었다.
"... 그야."
...?
".. 제가 그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신이 꼭 필요하니까요."
여태까지의 자신있는 목소리들은 내 말대로 전부 연기였다고,
더는 숨기는 게 힘들어 체념한 듯이불안하게 떨리는 가녀린 목소리로 내게 호소해 오고 있다.
그 간절함이 내겐 당황스럽다.
"무슨.. 소리를."
"당신이 이대로 이곳에 묻히면, 난 안돼요. 어떻게 찾아낸 건데... 절대 이대로는 못 놔줘요."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
그녀의 눈빛이, 표정이, 목소리가.. 전부 진심 같아 보였기에 더더욱.
"당신이 없으면 나는 살아갈 수 없다고요. 그게 이렇게 아득바득 당신이 결백하다는 생각을 고집하고 있는 이유에요.. 됐어요?"
"... 아니, 그럴리가 없잖아..? 그런 이유를 날 더러 믿으라고?"
"왜요. 거짓말 같아요?"
연기를 못하는 제 단점을 오히려 설득을 위해 들이밀어오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 그건.. "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니,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그때... 저를 악몽에서 깨워줬잖아요."
"악몽..?"
악몽, 그래.
그대로 그녀의 곁을 떠나려다 멈춰선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때 악몽을 꾸고 있던 그녀를 깨워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내뱉은 말들이 악몽의 계기가 되었을까 하는 찜찜한 마음에 쓸데없는 감정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 정도의 행동이었다.
"그 이상은... 아직 말 못 해줘요.. 그게 약속이니까."
"무슨 그런 억지가.."
그녀도 자신의 말이 억지이고, 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는 거라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
약속은 또 뭐고...?
"재판 직전에 만났던 그때, 에단 씨는 제가 무사한 걸 알고 안심했었죠?"
"... 그건.. 내가 너를 해쳤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정말 저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있겠어요?"
죽게 내버려둬..?
내가?
왜 네가 죽는걸, 내가 내버려둔다고 표현하는 건데.
".. 까득"
어금니가 엇나가 서로 부서지는 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 신경질적인 투정조차 지금의 내게는 크나큰 체력소모로 이어졌던 만큼, 배 아래로 힘이 쭉 빠지며, 머리가 어지럽다.
"정말 그럴 수 있겠어요?"
"후우..."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되레 협박이라니..숲과 생명을 사랑한다는 엘프가 할 수 있는 말인가는 둘째 치더라도, 말이 맞지 않는다는 걸 본인도 알 것이다.
하지만 나라고 해서 이것에 대해 대놓고 뭐라고 말 할 수는 없는 답답한 상황이다.
그녀의 저 억지는 정말 나를 협박하기 위한 의도만으로 내뱉은 것이 아니었다.
"... 대답해줘요."
그녀는 지금,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느끼던 여태까지의 혐오와 환멸로부터 생겨난 부끄러움을 잠시 잊고서라도 내가 나아갈 수 있을 명분을 주기 위해 저런 식으로 매달리듯 말을 하고 있는 거였다.
내가 그녀의 제안에 승낙할 수 있도록 마음 편한 길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 때문에라도, 이제야 세계수의 그 영문모를 말들이 이해가 되었다.
세계수는 내게 질문하고 있었다.
이 유혹에서 내가 스스로 벗어날 의지가 과연 있는지를 말이다.
"... 싫어. 그러고 싶을 리가 없잖아."
이곳에 남는다면.. 나는 또 다시 신탁에 휘말려 소중한 이들을 잃는 경험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처럼... 타인들의 경멸의 시선에 온몸이 꿰뚫려, 나 자신을 포기 할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않아도 된다.
전부 놓아버리고,놓아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마저 나에게 주어진 형벌을 핑계 삼아 마음 편해질 수 있다.
앞으로 겪을 힘들고, 슬프고, 절망스럽기만 할 이야기들을 모조리 생략하고, 나의 본래의 목적과 동일한 죽음을... 이곳에서 얻는다.
허무 속에 잠겨지면... 더 이상 노아와 아가사를... 기억나지 않는 내 소중한 이들을 더는 기억해내려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된다.
"... 빌어먹을.."
불안과 걱정 없이 묻힐 수 있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내가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마저 끝까지 안고서 앞으로 나아가서는 마지막 진실을 확인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앞으로 신탁의 사제로서 마땅히 받들어야 할 의무를 이행할 각오가 되었는지를 세계수는 묻고 있었다.
"이만큼 참고, 견뎌왔으면... 된거잖아."
대체 언제까지 나를 붙잡아 놓을 생각인 걸까.
"도망치지 말아줘요."
"도망...? 하하.. 하....나라고 해서 전부 내던져 버리고, 포기해버리고..!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는 줄 알아?"
차라리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남김없이 불태워졌으면, 내가 이렇게 남겨져 고통 받을 일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나라고 해서 여태껏 일구어온 내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놓아버리는 게 과연 쉬웠을까?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나 혼자 짊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난 기꺼이 따랐어. 하지만, 내겐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어. 모든 건 다 끝나버린거야. 그런데 왜 이제와서...!"
"아직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대체 뭘?
또 다시 그 사악한 용에게 내 모든 것을 빼앗기고, 경멸과 두려움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라고?
내 부글부글 끓는 속에는 쌓여가는 절망과 자기혐오를 가득 가득 눌러담은 채로?
"나는.. 참았어."
"...?"
"....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참고.참고.참고!또 참고...!! 견뎌왔잖아!"
온몸의 얼마남지 않은 힘까지도 끌어모아 목 깊은 곳에 응어리진 울분을 토해내듯 뱉어냈다.
"커헉.. 콜록, 콜록.. 이젠... 놓아줄 때도 됐잖아.. 날 내버려둬 제발... 쉬게 해줘...."
나 스스로가 지금의 내꼴이 단순히 도망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이젠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여태껏... 백 년간 나 스스로에게 조차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그녀에게 털어 놓았다.
무슨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잔뜩 상처입은 어린 짐승같은 내 이런 추한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고도 그녀는 이렇게 말해왔다.
"제가... 당신에게있어 나쁜 사람이 되어줄게요. 절 욕해도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말할 거예요."
"..."
".. 당신은 아직 쉴 수 없어요."
"... 하아...."
영혼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긴 한숨이었다.
그 한숨에는 얼핏 안도의 감정이 섞여있는 것 같아, 그럴리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렇게 말해주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젠... 묻지 않을 수 없다.
아직까지도 끈덕지게 남아있는 불안과 이기적인 기대가 섞인, 나의 마지막 조건에 대한 물음이었다.
"... 내가 들고 온 관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 대답은 곧바로 흘러나왔다.
"사슬에 꽁꽁묶인 그거라면.. 호수 밑바닥에 숨겨뒀어요. 저 잘했나요?"
"... 쯧."
다른 것은 일체 묻지 않고, 그게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벌써 숨겨뒀다고 말하는쓸데없이 철저한 그녀를 보며 나는 작게 혀를 찼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아마 반가운 소리였을 것이다.
분명... 세계수가 말해준 게 있었지.
"... 불의 계약."
"네...?"
"금서고에서 불의 계약에 대한 걸 알아내. 그게 아마 네게 필요한 정보일 거다."
결국은 말하고야 말았다.
그냥 무시하고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묻고, 하루빨리 잊혀지기를 바랐던 것에 대해 말이다.
이젠... 그녀에게 달렸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이곳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만큼, 세계수의 그 마지막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건 내가 아니었다.
"금서고라니... 에헤헤.. 갑자기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해 오시다니."
"... 네가 지금 나한테 하고 있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니고?"
"으음, 뭐어.. 그렇네요."
그녀의 관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그래, 이 엘프의 말대로 아직나는쉴 수 없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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