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12. 불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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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불의 계약(4)
은발의 엘프는 닫힌 문을 열기 전 얼굴에 최대한 힘을 풀고, 멀지않은 허공에 두 눈의 초점을 맞췄다.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고개를 살짝 앞으로 숙여 눈가에 그늘을 만들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준비는 끝났다.
힐끗.
뒤를 돌아보자, 이미 정신을 잃고 늘어져 있는 에단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이번 사건에서, 그리고 재판에서 그가 느낀 위화감에 대해서 말이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곧 돌아올 테니까.."
그는 듣지 못하겠지만 작게 중얼거린 이비는 닫혀있던 성소의 문을 직접 열고 나섰다.
두 엘프 경비가 성실하게도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소리를 차단하는 장막을 몰래 걷어낸 이비는 그들 중 하나에게 다가가 깊이 잠긴 목소리로 전했다.
".. 구속구에 문제는 없어요. 앞으로 백 년마다 제가 직접 확인할 거라고 전해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엘프.
이비는 자신의 말을 누구에게 전해달라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이렇게나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데에는 이들에게 이미 푸르기스 원로의 입김이 깊게 닿아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용건은 그게 다라는 것처럼 말없이 그들을 지나쳐 계단을 반쯤 올라왔을 즈음에야, 이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무표정이 불편했는지 두 손을 양쪽 뺨에 가져다 대고 몇 차례 문질렀다.
"불의 계약.. 이란 말이지."
에단이 말해준 위화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동기의 부재.
바실리카에서 몸의 통제권을 잃고 큰 소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그 앞길을 막는 모든 이들에게 가차 없이 무력을 행사한 탓에 다친 이들이 나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인 아이들 다섯이 죽었고, 그들의 죽음을 자신의 목적이었다고 생각하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야말로 주의 깊게 들을만한 것이었다.
재판장에서 이루어진 푸르기스 원로의 추궁이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세레스티아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형편 좋은 것들 뿐이었다는 이야기다.
이곳 생명의 요람에서는 알고 있는 이 없을 바실리카에서의 그 사건을 알고 있는 것처럼,
소녀와의 첫 만남에서 이루어졌던 그 작은 불상사를 직접 옆에서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던 자신이 속으로 추궁해줬으면 하는 모든 부분들을 푸르기스 원로는 정확히 짚어왔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그 상황에서 전혀 할 수 없는 질문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이미 포기한 상태로 자신에 대해 무슨 판결이 나오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던 그가 위화감을 느낄 정도였다면, 짚고 넘어갈 필요는 분명 있어 보인다.
".. 흐음.."
이비는 성소에서 1층의 입구로 이어지는 계단의 끝에 잠시 멈춰 서서 차분하게 다음 계획을 생각했다.
금서고로 가기 위해서는... 셀렌 님을 설득하거나.. 전이 마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른 시점에서 자신이 셀렌 님과 함께 움직이게 되면 당연히 의심을 피할 수 없을 테고...
원로들은 하나같이 마법에 능통하니 이 가까운 곳에서 전이 마법을 사용했다가는 그 어색한 마나의 뒤틀림을 눈치챌 것이다.
어느 쪽을 고르더라도 쉽지 않다.
"... 좋아."
그렇다면 우선은...
"흐윽... 흑.."
자신의 침대 위에서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연한 금발을 늘어뜨리고 있는 그녀로부터 이따금씩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함께 그 가녀린 어깨가 들썩이고 있다.
수인 아이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에단을 포기해 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
그에게 영원히 고통 속에서 죽음을 반복해야 할 형벌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내리게 되었다.
자신이 옆에서 지켜본 그의 모습은.. 비록 그간 많이 흔들렸다는 것이 눈에 보였을지라도,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만한 광인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이 알려준 진실은 여태껏 보아온 것과는 달랐다.
"흐윽... 어째서.."
"... 셀렌 님."
"...!"
아무도 없어야 할 자신의 침소에서 다른 이의 기척이 나타나자 다급히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어 올린 세레스티아 였지만..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서 혼자 슬픔에 빠져있었는지,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와 지저분한 눈물자국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브..?"
"쉿, 지금 우리 둘이 만나는 건 비밀이어야 하니까요."
"... 읏.."
분명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비의 모습이 차갑기 그지없는 생소한 무표정이었던 만큼,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손가락 하나로 자신의 입술을 구욱 눌러온 그녀를 보며 혼란을 겪었다.
"... 좋아요. 셀렌 님,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요..?"
다짜고짜 자신의 방에 나타나 부탁이 있다는 말부터 전하는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그 부탁의 내용은 더 했다.
"지금 바로.. 제게, 어머니께 받은 그 눈의 능력을 사용해 주세요."
"..."
"갑작스러운 부탁인 건 알지만... 부탁해요. 부탁드릴 게요, 세레스티아 님."
"... 이브..?"
그녀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했기에 세레스티아는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이 눈 앞에 놓이기를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몰래 자신의 방까지 숨어들어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
"셀렌 님..?"
하지만.. 역시 주저하게 된다.
어머니에게 직접 하사받은 이 지혜로운 눈동자에 자신은 자부심마저 가져왔지만, 오늘은 반대로 자신의 의사마저 부정당하고.. 그를 포기하게 되었다.
자신들을 위해 악인을 자처하여 막힌 성소의 길을 다시 내고, 스스로의 고통과 심지어는 죽음마저 인내하며 어머니의 나무를 정화하기 위해 힘쓴 그를..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자신이 말이다.
".. 많이 힘드셨나 보네요. 자, 이리 와요."
고뇌에 빠진 자신을 일깨운 것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다그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두 팔이 자신의 목 주변으로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는 것이 느껴지고...
이내 끌어당겨져 얼굴을 파묻게 된 품 속에서는 맑은 호수의 냄새와 체온..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박동이 상냥하게 자신을 진정시켜준다.
"셀렌 님이 늘 저한테 해주시던 거잖아요. 안통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이제 좀 괜찮아요?"
"... 이브.."
"괜찮아요. 어머니께서 셀렌 님을 선택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
"..."
늘 자신이 끌어안아주었던 그 어린 엘프는 손쉽게 자신의 고뇌를 알아채고 자신을 위로해 주고 있다.
지금의 이 상황이 새삼 신기하기도, 고맙기도 했기 때문일까?
"훌쩍... 흐윽.. 흐으윽..."
"앗.."
세레스티아는 결국 더 자신보다 오백 살은 더 어린 엘프의 품에 안긴 채한동안 눈물을 털어놓았다.
".. 으후으... 훌쩍."
"이제 좀.. 진정됐어요?"
"..."
끄덕 끄덕..
세레스티아가 자신보다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것 같은 그 모습에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비는 그럼에도 진득하게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그녀의 성격으로 이번 일을 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조금을 더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은 정리가 된 것인지 세레스티아는 푹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고,
그 연녹색 눈동자에는 이미 은은한 빛이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비는 빛을 발하는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 쓸데없이 참견 많고, 성가시기만 한 하이엘프."
"...?!"
글썽글썽...
"아아아, 또 울지 말아요. 처음 제가 셀렌 님을 만났을 때 그렇게 생각했던 것뿐이니까요."
세레스티아의 눈동자의 빛이 불안하게 깜빡거리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하자 이비는 다급하게 해명하면서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충격인걸요.."
"엣흠.. 흠...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때요? 처음 제 말을 들었을 때, 거짓말 같았나요?"
"... 아..?"
거짓말이라고 느꼈다면 그렇게 충격을 받을 일도 없었다.
...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해명까지도.
"하지만..."
"처음 셀렌 님을 만났을 때를 마음속에 그리면서 말한 거니까요. 거짓말은 아니었죠."
"..."
어째서 이비는 이런 갑작스러운 말로 어머니께서 주신 이 능력을 시험한 걸까..?
"저도 시간이 많이 없는 터라.. 무리해서라도 확인 할 필요가 있었어요."
"확인이라면.."
"어머니께서는 분명 셀렌 님에게 그 능력을 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받아들이게 된 진실에 대해 지혜롭게 고민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 건 아니잖아요?"
"진실에 대해... 아."
언젠가 한 번은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너무나도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탓에 그녀가 내려준 능력에 감히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말이다.
꼭 자신이 말해주지 않더라도 지혜로운 그녀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깨달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급했다.
그리고, 역시나 이 짧은 대화만으로도 무언가 눈이 트인 것처럼 맑고 선명하게 빛을 머금고 있는 세레스티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비는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셀렌 님은 너무 착해서.. 누군가 이렇게 까지 자신을 속이려 할 거라고는 쉽게 생각하지 못했겠지만요."
*
탓탓탓탓탓...!
탁탁탁탁탁탁탁..!
철그럭! 철그럭!
지혜의 줄기에는 시끄러운 기척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 한껏 소란이 일었다.
지혜의 줄기를 지키는 엘프 경비들 전원이 비상경계태세가 되었고, 지금 당장은 지혜의 줄기 내부 복도를 수 명의 무장한 경비들이 다급하게 내달리고 있다.
가장 먼저 불안정한 마나의 휘몰아침을 느낀 푸르기스 원로의 지시 때문이었다.
그 진원지는 다름 아닌 세레스티아의 침소.
의심스러운 정황을 확인하자마자 누구보다 발 빠르게 대응한 것이었다.
쾅쾅쾅!
"그 안에 계십니까?! 세레스티아 원로님!"
"실례하겠습니다!!"
꽈앙..!
"...!!"
"....?!"
대답 없는 침소 너머에 망설임 없이 강제로 문고리를 부수고 안쪽으로 진입했지만,
그 안쪽에서 볼 수 있었던 건, 한 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마나를 갈무리하고 있던 세레스티아의 모습 뿐이었다.
그녀는 이내 자신의 침소에 들어온 두 엘프 경비를 보며 놀란 눈을 하고는 마나를 거두어 들였다.
"아... 다들 미안해요. 심란한 탓에 요동치던 마나를 진정시키느라.. 그만 소리를 듣지 못했네요."
당황스럽기는 엘프 경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실례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세레스티아 원로님. 문을 부순 건.."
"아아..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여러분들은 마땅히 의무를 다한 것뿐이고.. 무엇보다 저를 걱정해 주셨기 때문이잖아요?"
"..."
그 상냥한 미소를 바라보며, 문을 박차고 들어왔던 두 엘프 경비들은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단순히 갈무리만으로도 알 수 있는 웅혼한 마나를 느끼고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푸르기스 원로로부터 혼란과 실의에 빠진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지를 지도 모르니 잘 감시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제지하라는 명령까지 내려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각오에 대해 세레스티아는 누구보다 상냥한 눈빛으로 다소 무례했던 그들의 행동마저 이해해 준 것이었다.
"... 실례했습니다. 문은.. 금방 사람을 보내 고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바빠 보이시지만 부탁드릴게요. 수고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엘프 경비들이 다시 한번 사과하기 위해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떠나자,세레스티아는 작은 목소리로 그들이 떠난 문쪽을 바라보며 미안함을 담아 사과했다.
"저야말로.. 속여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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