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12. 불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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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불의 계약(5)
"허억...!"
털썩..!
허공에서 나타나 뚝 떨어져내린 은발의 엘프는,
자신이 떨어져 부딪힌 곳이 나무로 되어있는 단단한 바닥임을 깨닫고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오히려 몸을 늘어뜨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으.. 흣흐흐.."
이마와 손발에서 식은땀이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입꼬리를 잡아올리고 있다.
셀렌 님이 마나를 끌어모아 눈속임을 해준 덕분에 자신이 전이를 사용한 것은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부탁을 할 때에 미리 그녀에게 말해두지 않은 것이라면, 전이 마법이 주변과, 전이지점 사이의 경로에 있는 다른 마나의 간섭에 몹시 예민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엘프마을 주변을 감싸는 결계를 신경써서 지상으로 오고 갈 때에 항상 마을 밖을 경유한 것이고 말이다.
한 마디로 그녀는 방금 전, 불확실한 가능성에 자신의 목숨을 내맡긴 것이었다.
성공할 가능성이 반, 그리고 실패할 가능성이 반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감행한 것을 보면, 에단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그녀의 이유모를 집착의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전이 도중에 실패를 직감했었다.
착지 위치가 어긋난 것이 그 증거였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다.
신체가 동강나지도 않았고, 겨우 이정도의 오차 범위...
아니지.. 겨우라고 말하기에는, 위가 아닌 아래쪽으로 어긋났더라면, 자신의 하반신은 나무 바닥에 기괴한 형태로 일그러진 채 합쳐져 있었을 것이다.
혹은 조금 더 위였다면, 머리가 그렇게 되었을 테고 말이다.
실패했지만.. 그 와중에 운이 따라주었다.
"후우우..."
두 다리가 아직 덜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비틀거리며 주변부터 살폈다.
지혜의 줄기 최상층에서 어머니의 나무로 연결된 통로.
그 통로는 어머니의 나무의 기둥 안쪽, 숨겨진 공간으로 이어져 있다.
금서고, 애초에 지혜의 줄기가 만들어진 이유도 이곳 때문이었으니 당연하다.
어머니께 선택받은 자의 앞에서만 그 문이 열리는 곳이었지만 자신은 손쉽게 전이마법을 사용해 침입했다.
사실 금서고에 침입한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지금보다도 더 탐구에 빠져있었던 과거의 자신이 금서고를 그냥 지나칠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금방 들켜 쫓겨났지만...처음에 왔을 때에는 참 놀랐었다.
금서고라고 하면 위험한 책들이 잔뜩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아, 고작이라고 할 수는 없으려나.
뚜벅, 뚜벅, 뚜벅.
밀폐된 공간인 만큼 발소리가 귀를 울린다.
나무 바닥을 차분히 밟아가며 세계수의 기둥 안쪽으로 향하는 좁을 통로를 따라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성소와 비슷한 크기의 어두운 공동 내부, 세 줄기의 은은한 빛이 천장으로부터 내려와 제단처럼 생긴 구조물을 비추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 필요한 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
제단처럼 생긴 곳에 주저없이 오른 이비는 세 빛줄기의 바로 아래에 각각 놓여있는 세 권의 금서를 바라보았다.
세계수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생겨난 것처럼 이끼와 가지, 줄기가 서로 엉켜 책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들은 신비한 빛줄기 아래에서 각각의 오오라를 뿜어내고 있다.
이비는 곧, 우측의 금서가 올려져 있는 제단의 받침을 살피다 손바닥을 가져다대고 그 나무 줄기들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콜록... 콜록.."
그러자 각각의 금서 아래에 선조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엘프들의 고어가 드러난다.
이미 이전에 왔을 때에 발견해 둔 것이었지만, 그 이후로 또 몇 십년이 지났으니 다시 먼지가 쌓인 모양이다.
"이게.. 과거.. 저쪽이 그럼..."
수 천 년도 전에 쓰이던 언어였지만, 자신의 경우 요람 내부에 남아있는 각종 서적들을 공부하기 위해 셀렌 님께 어느정도 가르침을 부탁했던 만큼, 그녀만큼 능통하다 까지는 아니어도 보고 읽을 정도의 실력은 되었다.
과거의 서, 현재의 서, 미래의 서.
뚜렷한 정의 없이 각각 과거, 현재, 미래의 이름만이 붙여진 수상쩍은 금서들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선조들은 후세에게 그리 불친절하지 않았기에 아래쪽의 먼지를 더 털어내자, 긴 문장 여럿이 멋들어진 필체로 아래에 더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고어로 쓰인 이 설명들을 어느 정도 해석해 본다면..
미래의 서는 책을 펼친 자의 미래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세 가지 사건들을 알려준다.
펼치는 것은 자유,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된 순간을 기점으로 절대 그것을 바꿀 수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다소 소름 돋는 문구가 함께 적혀 있다.
과거의 서는 세계수가 현재까지 축적한 아케라의 모든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 종결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섣불리 기록되지 않았기에, 자신이 이렇게 결과를 뒤바꾸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이상 이 금서를 통해 지금 사건의 전말을 알아낼 수는 없다.
그리고 현재의 서...
엘프 고어로 이 단어는 지식, 진리, 현재를 의미하는데, 양 옆의 과거와 미래라는 단어를 보면 맥락상 현재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실상은 앞의 의미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목숨까지 걸어가며 이곳에 온 목적이었다.
이것은 어머니의 나무가 현재까지 받아들인 모든 경험을 통해 축적한 영원불멸의 지식, 그 모든 것을 알려주는 금서였다.
그런 만큼, 한 생명이 펼칠 수 있는 횟수 또한 세 번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미 자신은 이전에 이곳에 와서 두 번을 펼쳤으니, 남은 것은 단 한 번.
하지만 지금 당장 자신이 물어볼 것을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좋아..."
들어올 때는 셀렌 님의 도움이 있었지만 나갈 때는 도움 없이 전이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 만큼, 이곳에서 확실하게 모든 의문들을 마무리 짓고 나가야만 상대에게 대비할 틈을 주지 않을 수 있다.
".. 불의 계약에 대해 알려주세요. 어머니."
이비가 현재의 서의 앞에서 자신이 알고 싶은 지식에 대해 말하자, 앞에 놓인 금서는 저절로 펼쳐져 책장이 바람소리를 내며 넘겨지기 시작한다.
촤르르르르르르륵...
그리고..
수많은 글자들이 쓰인 책장이 넘어가 도중에 끊어져 깨끗하게 비어있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빈곳을 순서대로 채워가며 글씨들이 저절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여태까지 현재의 서를 펼친 이들이 바란 지식들이 전부 기록되어 남고 있는 것이었다.
그 앞에는 다름아닌 자신이 바랐던 두 가지 지식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사자의 부활'
'영혼과의 접신'
"..."
그리고...
'불의 계약'
그 글씨가 선명해진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정보들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윽...! 끄흑...?!"
풀썩..!
이미 두 번이나 겪어보았기에 찾아올 두통에 대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정도가 이전에 비할 바 없이 어마어마하다.
이비는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곧장 주저앉아 차가운 나무바닥에 이마를 맞대고 고통을 인내했고, 한참 뒤에서야 두통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하아... 하아...."
이제 자신은 현재의 서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잃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있다.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게 된 그녀의 입가에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 있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금서가 알려준 이 지식은... 단순히 이번 사건으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다시 빛을 되찾아 주고,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을 이 요람의 이름을 한 감옥에서.. 수인과 엘프 모두를 해방시켜줄 용사 일행의 그 누군가에게...
반드시 전해져야만 하는 지식이었다.
"이걸로... 의문은 전부 풀렸어. 남은 건...?"
이제 남은 건 잘못된 것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뿐이라고 이비가 생각한 순간이었다.
흠칫..!
"...!"
뚜벅. 뚜벅. 뚜벅.
일정한 보폭으로 소리를 크게 내지도, 그렇다고 발소리를 숨기는 것도 아닌 품위가 배어있는 발걸음이 가까워지고 있다.
금서고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의문의 인기척을 경계하는 이비의 반응이 무색하게도, 상대는 먼저 말을 걸어왔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어린 엘프야."
이비는 자신의 코끝에 옅게 스며드는 불길한 탄내에 인상을 찌푸리며 당장 전이하려 했지만,그자는 여전히 자신의 발소리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왔고,
이내 금서고 내의 희미한 빛아래.. 원로를 상징하는 고급스러운 금색 자수가 들어간 새하얀 의복이드러나는 것을 보고 그녀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아니.. 어떻게가 아니다.
'그' 가 알려준 것이겠지.
머릿속에 새롭게 자리잡은 지식은 지금 이 상황에 대한 타당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계약자는 에단을 통해 알아낸 그의 기억을 공유해주었을 테고, 당연히 자신이 금서고로 향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되자마자 이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한 발 늦은 것이다.
자신이 당황할 이유는 없다.
이미 필요한 것은 모두 손에 넣었다.
"세레스티아 님 없이는 그 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 했을 텐데요.. 푸르기스 원로님."
"... 급한 마음에, 불경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지."
이내 어두운 통로에서부터 걸어나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상대로.. 긴 장발을 뒤로 늘어뜨린 말끔한 외모를 한 낯익은 하이엘프 남성이다.
"당신...!"
담담한 눈빛으로 이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푸르기스 원로.
그의 왼손 주변으로 화르륵 피어올랐다 흩어져 사라진 검붉은 불길을 보고 이비는 두 손 가득 마나를 끌어올리고 저항할 준비를 했다.
자신의 앞에서 계약의 존재를 더 숨길생각도 없어보이는 그를 바라보며 또한 생각했다.
이곳에서 자신이 저자를 제압한다면.. 더 이상의 피해 없이 이번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
여차하면 전이할 수도 있으니, 두렵지 않다.
"... 너무 경계하는군. 나는 그저, 이야기를 하러온 것 뿐인데 말이야."
하지만..
입을 막기 위해 곧바로 자신을 공격해 올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푸르기스 원로는 이야기를 하러 온 것뿐이라는 영문모를 말과 함께 자신의 두 팔을 늘어뜨렸다.
"읏...?"
그러자 놀랍게도 자신의 양 손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던 모든 마나가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하이엘프이자, 마찬가지로 한 명의 뛰어난 마법사이기도 한 푸르기스 원로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정교한 마나간섭이었다.
자신을 무력화시킨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찾아올 공격을 대비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과 조금 떨어진 그 자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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