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12. 불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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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불의 계약(6)
아직은 이 방대한 정보를 조금씩 빼내어 떠올리는 수밖에 없는 만큼, 그의 진의를 금방 파악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확실한 건, 눈앞의 그가 불의 계약을 이룬 하나의 씨앗이고... 이미 불씨를 틔울 준비를 거의 끝마쳤다는 사실이다.
"저를 해쳐야만 하는 상황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거겠죠. 이곳에서 저를 죽였다가는 모든 일이 엉망이 되어버릴 테니까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단다.. 부탁이니, 내 말을 들어주길 바란다. 어린 엘프야."
이미 수인 아이들 다섯이 죽었다. 저 말을 순순히 믿을 만큼 자신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호소해 오고 있다.
"이건... 어머니의 나무가 몰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 손 하나 더럽혀 요람의 모든 이들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그걸로 나는 충분해."
"대체 언제 손을 더럽히셨죠? 제가 알기로 이번에 손을 더럽히게 된 건, 에단 씨 뿐이에요."
"나 역시.. 마땅한 대가를 치를 거다."
"... 물론, 그렇게 될 거예요."
이비는 푸르기스 원로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동요하지않고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이비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거슬렸다.
저건 꼭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릇된 신념을 가진 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린 엘프야, 너 역시도 이대로 어머니의 나무가 몰락하여, 요람의 엘프와 수인들 모두가 말라죽기를 원하는 건 아닐 텐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지?"
"... 타인의 거짓된 희생으로 연명하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희생하는 자를 본다면 그리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그의 희생으로부터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만 해."
희생 그 자체가 아닌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부터, 그는 이미 희생이라는 하나의 숭고한 행위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게 희생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그리고 수인들 이야기는 입에 담지도 마세요. 언제부터 그들을 그렇게 생각했다고 그러시는 걸까요."
"..."
자신에게는 선택을 중용하고 있었고, 수인 아이들에게는 심지어 그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뻔뻔스럽게 수인들을 위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하나의 희생으로 요람의 모두를 지킬 수 있게 되었지."
"아이들의 죽음은요? 그건 또 다른, 어떠한.. 필요한 희생이었다고 말할 건가요?"
".. 그래, 그건 필요한 희생이었어. 하지만 보거라, 덕분에 요람은 평화를 되찾았어. 이제 더 이상 우리들은 몰락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
"... 그러면 이제 여섯의 희생이 되었네요."
"..."
그는 희생과, 희생양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나 역시 원로직을 내려놓고 바깥으로 향할 것이다."
".. 뭐라고요?"
".. 모든 것은, 더 많은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서..."
그의 뒤이어진 중얼거림에 이비는 황당함을 숨길 수 없었다.
원로직을 내려놓고 바깥으로 향하겠다는 그의 말은, 불씨를 틔울 장소를 바깥으로 옮기겠다는 말 밖에는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이것이 더 많은 생명을 지켜내기 위함이라 말하고 있다.
"... 이제 알겠네요. 당신이 대체 어떤 일그러진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저 말을 듣고 나니, 앞선 그 대답들이 어떻게 원로라는 자의 입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우리'와 '생명'에는 엘프와 어머니의 나무를 제외한 그 어떤 타 종족들도 들어가 있지 않다.
요람의 수인들도 그에게는 생명을 입에 담기 위한 하나의 보기 좋은 구색과 상황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물에 불과했다.
그는 오직 엘프들을 위한다는 일념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라면 그래, 당연하다.
신탁의 사제를 어머니의 나무에 영원히 묶어둘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 세상이 완전히 멸망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땅속 깊은 곳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붙잡아두고, 영원히 이 옥살이를 계속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엘프들을 천천히 말려죽이는 것이라는 걸, 그는 정말로 모르는 걸까?
"호수 위에서 아름답게 부서지던 태양 빛을... 당신은 벌써 잊어버렸나보네요. 어쩌면.. 포기해버린 건지도 모르고요."
"...?"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그 눈빛에도 이비는 흔들리지 않고 제 할말을 했다.
"당신은 죗값을 치르게 될 거고, 에단은 풀려날 거예요."
"... 아무래도 내 뜻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구나."
"아니요. 아주 잘 이해했어요. 그러니 말해줄게요. 당신은 틀렸어요."
꿈틀.
자신이 틀렸다는 그 말에 드디어 푸르기스 원로의 눈 주변이 미약한 움직임을 보인다.
"엘프든, 인간이든... 수인이든, 그 어떠한 생명도 좁은 요람 속에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어요. 모두가 건강하게 자라서, 요람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어리지 않은 당신의 역할이었고요."
"그 바깥은 이미 죽음이 내렸다. 어린 엘프야. 너는 무엇을 그리 확신하기에 그를 믿으려는 거지? 그는 배반자야. 이미 한 번 믿음을 저버리고, 세계와, 심지어는.. 자신마저 저버린 가엾은 인간이란 말이다."
구원에 실패한 구원자, 사악한 붉은 용으로부터 살아 도망친 배반자.
전부 사실이었지만, 이비가 본 그는 아직 모든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집착하여 스스로에게 묶고있는 그 관이 하나의 증거였고,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규격 외의 괴물을 상대로 자신을 미끼삼아 수인 소녀를 살리려고 했던 그 행동이 또 하나의 증거였다.
둘 모두 자신이 직접 본 것이니만큼, 아무리 눈앞의 그가 자신보다 오랜시간을 살아온 하이엘프이자, 지혜로운 엘프들의 원로라고 할지라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줄게요. 당신은 너무 지나쳤어요. 그래서 주어진 역할마저 잊어버렸죠. 아이가 세상의 빛을 보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요람에서부터 벗어나야 해요."
"평화로운 영원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어머니의 현 상태만 보더라도 바깥이 얼마나 썩어들어갔는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너는 그 의미없이 이어진 가시밭길에 사랑하는 아이들을 내보낼 수 있다는 건가..!"
"당신의 그 생각들은 기만이자, 자기만족에 불과해요. 아니라면 그냥 두려운 거겠죠.당신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영원히 이 좁은 곳에 누워있을 것을 강요하고 있어요."
"기만...? 자기만족..? 하이엘프인 내가 더러운 불의 문양을 받아들일 때, 어떤 각오를 했는지 안다면 그렇게는 말하지 못할 거다."
그는 엘프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훌륭한 원로다.
이를 위해 어머니께 선물받은 고고한 자신의 육신에 불쾌한 불의 문양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릴 만큼이나.
하지만.. 모든 불의 계약은...
"모든 불의 계약은... 계약자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돼요. 당신이 어떤 욕망에 이끌려 어떤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이미 당신의 계약자는 당신의 욕망을 게걸스럽게 탐하고 있죠."
"... 그럴 리 없다."
"알아서 생각해요, 이제 당신의 인정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모든 전말을 알게 된 수인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 것 같나요?"
"...!"
"당신이 받아들인 불의 문양과 그 의미를 깨닫는다면, 다른 엘프들이 여전히 당신을 따를까요?"
이비는 푸르기스 원로의 저 당황스러운 기색조차도 불쾌했다.
자신의 뜻을 전하면 반드시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는 듯한 저 반응은,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 틀릴 리 없다는 오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이젠 더 이상 그와 말싸움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비는 당장 전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는...
아니, '그'는 이비를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 당신은...! 윽...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고통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부여잡고 한 번 비틀거린 그의 왼팔로부터 검붉은 불길이 치솟아오른다.
"당신은 저 어린 엘프를 해쳐서는 안됩니다..!"
앞에 있는 이비를 내버려 두고 다른 누군가와 혼잣말을 하던 푸르기스 원로의 몸이 한 순간 덜그럭하고 부자연스럽게 멈추고,
콰르르르르르륵!!!
꾸르르륵...!!! 구르르르륵!!!
일반적인 화염과는 다른, 마치 탐욕스러운 뱀의 똬리를 보는 것처럼 불길하기 그지없는 형상을 한 검붉은 불꽃이 크기를 키웠고, 그의 긴 옷소매를 불태우고 불의 문양을 드러내보였다.
그 불길한 형상의 문양은 선명한 붉은 빛을 발하고 있다.
"..."
푸르기스 원로는 이내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하고, 이비를 주시했다.
그리고 이비는 그의 달라진 분위기를 몸소 느끼고 있었다.
우선 저 어울리지 않는 말투부터.
"... 계약에는 이런 조항도 있었죠. 당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나는 성심성의껏 도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저 눈동자...
지금 당장은.. 조항의 효력으로 잠시 주도권을 가져온 건가?
"저 어린 엘프 하나를 도망치게 두면, 요람의 평화는 무너지게 됩니다. 엘프를 지키겠다는 그 마음가짐은 훌륭하지만, 이것 역시 당신이 좋아하는 그.. 필요한 희생이라는 녀석입니다."
프스스스스슥...
"뭐, 그리 성을 내지는 마십시오. 저 역시 계약에 따라 엘프를 해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단지.. 깨어날 수 없는 긴 꿈을 꾸게 하려는 것뿐이죠."
"읏...?"
"그게 악몽이 아니었으면 하는군요."
주변의 마나가 불길하게 일렁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불의 계약.
이비는 푸르기스 원로의 몸 주변으로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나오고 있는 힘의 조각들만으로도 계약자인 '그'가 얼마나 상식밖의 존재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저 정도의 그릇을 가지고, 완전히 계약이 이행되었을 때의 그 모습은 감히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이비는 두 손 위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전이마법을 과감하게 흩어내고, 당장 이 불타오르는 듯한 공간에서 메말라가는 마나를 집요하게 끌어 모았다.
상대가 단순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공기중의 마나가 요동치고 있었으니... 전이 마법은 이제 하나의 자살 수단으로 밖에 여겨질 수 없다.
심지어는 저 힘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것이라니...
"일단은 초면이니만큼 인사드리겠습니다."
"..."
목소리에 담긴 농밀한 마나에 그의 주변으로 일렁이는 기운이 반응하여 일제히 요동친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한 쪽 팔을 마치 인간들의 귀족예법을 흉내내는 것처럼 접어들고는 다음으로 배꼽 근처로 절도 있게 당겨 내리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를 부르실 때는 ... 마르튀스, 소테르, 혹은.. 흠."
절도있는 인사끝에 고개를 들어올린 그는, 그 검붉은 눈동자로 이비를 바라보며 소개를 마쳤다.
"적룡교의 대주교, 카마엘 정도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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