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78화 (78/137)

〈 78화 〉 13. 땅속에 갇힌 지렁이들의 요람

* * *

13.땅속에 갇힌 지렁이들의 요람(1)

신념, 믿음, 의지와 같은 이 일종의 바람들은 그 사람을 움직이는 훌륭한 원동력이지만, 아주 조금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금방 광신과 집착, 욕망으로 변모하여 그 사람을 집어삼키고는 한다.

이는 시대를 불태울 마른 장작이자, 기름을 뒤집어쓴 깃발이다.

잿더미의 냄새를 맡고 찾아온 사악한 불은 그들에게 속삭인다.

네 바람을 이루어주겠노라고.

그 꺼림칙한 불길의 혓바닥을 보며 망설인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한계에 직면한 이들에게 이 유혹을 견뎌내기를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불구덩이 속에 몸을 내던지고 마는 것이다.

불길에 휩싸여 고통스럽게 바닥을 구르다, 주변을 몽땅 불태우고 나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미 늦었다.

자신을 속인 그 사악한 불에게든,

어리석게도 속아넘어간 자신에게든,

분노는 불길을 더욱 키울 뿐이었으니 말이다.

뼛속까지 불태워져 끝에는 사악한 불의 재림을 미련하게도 일구어내는 이것을 보며 사람들은 불의 계약이라 일컬었다.

*

기이이익... 긱.

조용한 집안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심하게도, 이 집구석의 퍽퍽한 흙내와 먼지 냄새는 그저께 집을 나섰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말없이 자신을 따라 들어온 작은 기척이 문을 닫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지혜의 줄기를 나서고 지금까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

"..."

철컥,

떨그렁...!

이 침묵이 불편했기 때문일까, 늘 벗지 않았던 어깨 견갑이 답답하다는 듯이 바닥에 벗어던진 그녀는 그대로 폭신한 소파 위에 몸을 내던졌다.

조금은 편해지는 마음이 들 법도 했지만 애석하게도 문 앞에 가만히 서있는 저 작은 실루엣을 보면 그럴 수도 없었다.

".. 네 탓이 아니야."

결국 그녀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저 아이의 탓이 아니었다.

"..."

"에단은... 그런짓을 할사람이.. 아니야."

"....."

"아닌데.. 어째서... 그렇게.."

"냐우우우.."

그때, 영리하게도 홀로 집으로 돌아와 있던 앙리가 소녀의 발치에 다가와 머리를 문대 온다.

소녀를 반기고 있는 것이었다.

"... 실비아, 네 탓이 아니야."

헹겔은 소녀에게 변함없이 이야기했지만, 스스로가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에단.."

"..."

그가 자신을 해치려 한 적이 있는 것도, 목을 붙잡힌 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먼저 그를 죽이려 한 자신에게의 당연하디 당연한 반응이었을 뿐.

분위기에 압도되어 모두의 앞에서 말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후회가 되어 돌아왔다.

자신의 엄마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게 해주었고,

돌아갈 곳 없는 자신을 데리고 다니며 몸에 난 상처를 치유해 주고,

무서운 마물로부터 지켜주고,

생에 처음보는 맛있는 먹을 것들까지 챙겨주었다.

뒤따르는 것을 허락해준 그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알게 해준 사람이었다.

하얀 재로 뒤덮여 있던 숲의 오두막에서, 자신은 그가 잠든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며칠씩이나 잠들지 않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던 그가 간신히 잠들었을 때조차 그는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악몽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다.

그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을 때...

그는 다가온 누군가를 해치기는 커녕 과격한 움직임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작은 손을 구욱 맞잡아왔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아이들을 죽였다고,

한순간이라도 불신을 가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소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헹겔, 에단은.. 나를 항상 지켜줬어. 해치려 하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말했잖아, 그곳에서 그의 냄새를 맡았다고."

"..."

"아.. 아니야. 널 탓하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하아아.."

똑똑똑.

움찔.

얼마나 심란해 있던 건지, 자신의 집 앞까지 찾아온 누군가의 기척조차 일찍 알아채지 못했던 헹겔은, 그녀의 뾰족한 귀를 쫑긋 세우고는 허리를 곧게 폈다.

"음.. 들어갈게요?"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열린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진료소의 사슴 수인, 라챤코였다.

그녀의 머리 위 뿔에 달려있던 수많은 장식들은 떼어놓고 온 것인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애석하다.

"... 라챤코, 여긴 왜 찾아온 거야? 이제 나는.."

"물론 헹겔 님이랑, 실비아를 보러 온 거죠. 당신이 대표라서 지금껏 제가 살갑게 대한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조금 실망인걸요?"

빙긋 웃어주는 라챤코로부터 헹겔은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마을 사람들.. 나한테 많이 실망했겠지."

"글쎄요... 그나저나 냥냥 하던 말투는 이제 고친 거예요?"

"긋, 그런 건 상관 없잖아."

휙 하고 고개까지 돌려버린 헹겔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가,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견갑을 발견하곤 이를 주워든 라챤코는 적당한 선반 위에 먼지를 털어 올려놓고는 안쪽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헹겔 님은.. 아이의 부모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기 위해서.. 엘프들이 멋대로 원로 재판을 열기 전에 그를 처형하려 했던 거죠?"

"... 그냥, 그때 내 기분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야."

".. 제 앞에서까지 그러실 거예요?"

"..."

말없이 라챤코를 바라보았던 헹겔은, 다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며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뭐.. 결국은... 그것조차 실패했지만."

항상 보아온 그녀와는 상반되게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는 그 모습을 보며, 라챤코는 가슴 한 쪽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 이 슬픔이 조금 진정되고 나면 그래도.. 헹겔 님에 대한.."

"엘프들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그녀의 위로를 끊고 들어온 헹겔은 마을의 분위기에 대해 물었을 뿐이다.

"그야.. 헹겔 님을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고, 결과적으로는 그 에단이라는 자의 신변도 엘프들이 전적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니까요."

아픔을 겪은 건 수인들인데, 이에 대한 처분을 위해 움직인 헹겔에게 판결을 내리고, 범인의 신변까지 자신들이 전부 관리하겠다는데 수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물론 먼저 엘프 경비들을 제압하고 경계를 넘은 건 헹겔이었기에, 엘프들의 입장상 그녀에게 어떠한 제제도 가하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아.. 실비아는 잠깐 잠이라도 자고 있을래? 많이 피곤하지?"

"..."

무언가 더 말을 하려던 라챤코는 문 바로 옆의 어두운 구석에 멀뚱히 비켜 서있는 실비아를 보고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동그란 알약들이 여럿 들어있는 작은 유리병이다.

이를 보고 헹겔은 약간의 경계심을 가지고 그녀에게 묻는다.

"그건..?"

"수면 유도제에요.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주기도 하고요. 그런 일들을 겪었으니.. 실비아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요."

라챤코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수면유도제 한 알을 삼키게 된 실비아는, 곧 두 눈을 꿈뻑거리기 시작했고, 라챤코는 소녀를가볍게 들어안아먼지 쌓인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예상대로 피로가 쌓여있었던지 금방 잠들어버린 소녀의 머리를 한동안 쓰다듬어준 라챤코는 이불까지 제대로 덮어주고 나서야 선반 위에 약병을 올려놓고 다시 헹겔을 바라보았다.

"헹겔 님.. 하지만 뭔가 이상해요."

"...?"

"제가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봤잖아요."

그녀에게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 살펴달라는 부탁을 한 것도 자신이었고,

원로 재판에서도 함께 있었기에 그녀가 품고있는 의문이 무엇인지는 안다.

하지만 그 의문은 하이엘프 원로의 의견 하나로 일축되었다.

"분명 원로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죠. 그에게 모르는 수 한두개정도는 당연히 있을 거라고요."

"그렇겠지, 목이 잘려도 죽지않는 인간인데...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 붙잡고 놓아줘."

자신이 분명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키기까지 했음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눈앞에 나타난 놈이다.

그 하이 엘프 원로의 말대로 무슨 짓을 더 어떻게 저지를지 모르는...

"그런데 그런 자를 같은 엘프조차 들어가기 힘든 세계수의 성소에 가둔다고 했잖아요. 그 걱정 많은 엘프들이... 심지어는 원로들조차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내려진 결정이라기에는 너무 성급하지 않나요? 꼭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라챤코, 너도 알고 있었을 거 아니야. 세계수가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고, 엘프들 사이에서도 최근 작은 소란이 있었다는 거."

"..."

매일같이 흙 내음을 맡아가며 밭일을 하는 수인들은 일찍이 느끼고 있었다.

이전에 비해 저조해진 수확량만 보더라도 사실 추측할 수 있는 문제였다.

이에 대해 엘프들 사이에서 여러모로 말이 나오고 있었다는 것 역시도.

계속해서 생명력을 잃어가는 세계수..

무언가에게 쫓기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상한걸요. 그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세계수에.."

하지만 라챤코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다.

"그냥 믿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 누가 믿고 싶겠어요..!"

"..!"

툭 던지듯 밀어 넣은 그 말에 라챤코가 목소리를 높이자 헹겔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을 밖에서 인간 하나가 찾아왔는데, 사실 그놈은 미친놈이었고 그래서 그 미친놈이 잠결에 아이들을 전부 죽인 거라고, 아이들의 부모에게 어떻게 그렇게 말하냐구요!"

"..."

"저는.. 단지 모든 의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듣고 싶은 것뿐이에요. 차라리 모든 것이 명확해지기라도 해야 저라도 먼저 납득을 할 테니까요."

라챤코의 저런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나 그녀가 뭔가를 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금방 머릿속에 도움을 줄 수 있을만한 인물이 한 명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 녀석을 이제 더 볼 일은 없다.

"이브라도 있었다면.."

"그 녀석 이야기는 하지도 마, 매일같이 뺀질거리면서 나타났다가 정작 필요할 때는... 실비아?"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난다는 것처럼 투덜거리던헹겔이곤히 잠들었을 소녀의 이름을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 우리가 너무 시끄러웠지? 금방 나갈 테니까...아?"

침대에서 스르륵 몸을 일으킨 소녀가 이불이 발치에 끌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멍하니 걸어 나와 문 앞에 섰기 때문이었다.

기이이이익..

그러고는 망설임없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걸어나간다.

라챤코가 먼저 소녀를 붙잡기 위해 곧바로 뒤따라 나갔지만, 마당에서 우뚝 발걸음을 멈춘 소녀의 어깨에 손이 닿기 전에 그녀는 무언가를 보고는 똑같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헹겔의 오두막집 마당에서 훤히 올려다 보이는 세계수, 그 주변을 감아올라간 지혜의 줄기의 끄트머리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아오르고 있었다.

"... 무슨 일이.."

마찬가지로 뒤따라 나온 헹겔도 세계수로부터 솟아오르고 있는 검은 연기를 발견하고 당황하여 멈춰 섰다.

뒤늦게서야 코끝에 걸려들어온 옅은 탄내. 하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헹겔의 시선이 향한 곳은수인 마을과 엘프 마을 사이에 위치한 경계였다.

그 경계로부터 들려오는 이 소란스럽고도 불길한 기척은 이곳에서 상당히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큰 규모로 느껴지고 있다.

"설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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