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13. 땅속에 갇힌 지렁이들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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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땅속에 갇힌 지렁이들의 요람(2)
"대담하시군요. 결단에서 실행까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니."
"... 이걸로.. 너도 곤란해졌지?"
푸르기스 원로의 몸을 빼앗은 그의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에는 주변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일렁여 비치며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놀랍다는 감탄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앞의 엘프를 주시했다.
"설마하니 엘프가.. 어머니의 나무에 불을 지를 줄이야."
화르르르르륵...!!
금서고의 외벽, 다시 말해 세계수에 시뻘겋게 타들어가는 불이 옮겨붙게 만든 범인은 다름 아닌 이비였다.
주변의 마나를 붙잡았으니 그녀에게 도망칠 방법은 이제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오산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마법 수준을 얕보아서 생긴 오산은 아니었다.
"난 말이지, 꿈꾸는 건 질색이거든. 그게 악몽이라면 더 그렇고...!"
이비의 양손에서 불덩이 두 개가 시간차를 두고 날아들었지만, 그는 그저 손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들을 가볍게 흩어내었다.
어찌나 독한 엘프인지.. 주변에 옮겨붙는 불길을 자신이 흩어내는 것과, 그녀가 세계수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불길을 번지게 만드는 속도는 거의 비등비등하다.
물론 이 작은 불로 세계수가 타죽을 리도 없기는 하지만
이래서야 누가 악역인지...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툭 찼다.
탄내와 연기가 점점 이 좁은 공간을 메우고 있었고, 곧 바깥의 이들도 금서고에 생긴 이상을 눈치챌 것이다.
힘에서 상대가 안될 거라는 판단에 이곳의 이변을 알려 조력자를 부르려는 것이었다.
물론 누가 오든 그를 막을 수는 없을 테지만, 아직 이행되지 않은 계약과 그 조항에 있어서만큼은 상관이 있었다.
이비는 그가 유일하게 곤란한 곳을 정확히 짚어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작이 영리한 엘프 하나로, 종족 생존의 이해에 따라 진행된 이 계획을 뒤엎을 수는 없으리라.
"후후후.."
"...?"
일렁이는 불의 그림자 속에서 그의 표정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뭐, 상관없습니다. 아직 계약이 이행될 여지는 있고, 만에 하나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가 첫 번째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이야기의 흥미가 떨어질 테니,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포기한 눈치는 아니었지만, 결말이 어찌 될지를 기대하고 있는 듯한 저 꺼림칙한 눈빛에 이비는 괜히 불안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 계약 이행의 세 가지 조건. 어머니의 나무가 안정화되어야 하고, 엘프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하고.. 나머지 조건은 뭐지? 여태까지 몸을 빼앗지 못 한 걸로 봐서는.. 요람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거려나?"
"비슷합니다. 과연 명석하군요. 두 번째만 아니었더라면 당신을 가장 먼저 재로 되돌렸을 겁니다."
"..."
이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름 돋는 말을 입에 담는 상대를 노려보며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그는 비식 웃으며 그녀를 짓누르던 위압감을 덜어냈을 뿐이다.
그의 팔 주변으로 일렁이던 검붉은 불길또한 깨끗하게 모습을 감춘다.
이비는 그의 그 돌발행동이 자신을 방심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경계했지만, 그는 이내 뜬금없는 말을 던져왔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잠깐 시간이 남는 동안 대화나 하도록 하죠. 이브 양."
"너한테 날 그렇게 부르라고 허락 한 적 없어."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워낙 기억들이 뒤죽박죽인 탓에.. 흠흠, 이비 양."
"..."
대화나 하자는 그 말에 이비가 경계를 풀리 없었지만, 많은 기척들이 이곳을 향해 오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도망칠 생각은 커녕, 그의 몸을 돌려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이대로 정체가 드러나도 괜찮다는 걸까?
"우선, 정말 훌륭한 추리였습니다."
".. 무슨 꿍꿍이지?"
"아니요. 그저 순수한 감탄입니다. 아직까지도 이 땅밑에 지혜라는 것이 계승되고 있다는 증거를 직접 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
에단에게 들려주었던 자신의 추리에 대해 마찬가지로 알고 있을 그가 진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에단은..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다.
어째서 자신에게 확신을 안겨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걸로 자신이 거리낄 이유는 전부 사라졌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유일한 변수였습니다. 수인들도 엘프들도, 심지어는 에단 그 자 역시도, 작은 위화감 정도는 내놓아진 결론 앞에 수긍하리라 여겼으니 말입니다."
"... 푸르기스 원로 님이 셀렌 님의 눈앞에서 거짓을 말할 수 있었던 건?"
"아, 그게 궁금하셨군요? 아마 당신이 짐작하고 있는 대로일 겁니다."
그는 보란듯이 검붉게 변한 눈동자를 원래의 맑은 빛으로 되돌렸다가 다시 불길한 색으로 채워올린다.
손등의 문양이 여전히 선명한 빛을 내뿜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속았을 지도 모르는 감쪽같은 변용이다.
"재판장에서... 당신이었어?"
끄덕.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
"그녀는 푸르기스 원로의 이름을 부르며 질문했지만, 대답한 것은 저였으니까요. 그 눈이 진실만큼이나 융통성이 없는 능력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왜, 전부 말해주는 거지?"
너무나도 순순히 자신의 의문을 풀어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흠, 그야.."
"...!"
말꼬리를 잡고 늘리는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며 징그러운 미소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를 정면에서 보게 된 이비는 서늘한 공기가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더욱 짙은 무력감과 절망스러운 감정에 시달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
"너무 상심하지는 마시기를. 이 세상의 모두가 당신처럼 그리 지혜롭지도, 양심적이지도 않습니다."
그 자신 넘치는 태도에 이비는 입안이 바짝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금서고에 자신이 먼저 도착하는 것을 막지 못한 그를, 이제 몰아세웠다고 생각했다.
모든 의문이 풀렸고 그의 입으로 그 진위까지 확인받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금서고의 문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안쪽으로 진입하겠습니다!"
이젠 목소리가 들릴 만큼이나 가까워진 기척들이 좁은 통로에 발소리를 크게 울리며, 쿵. 쿵. 쿵. 하고 커져가고 있다.
이들이 드디어 도착했으니 안심이 되어야 했지만, 이비는 자신의 심장이 그들의 발소리만큼이나 불안하게 쿵 쿵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푸르기스 원로님..?"
"... 저 엘프는..?! 이비?"
잔불이 남아 어두운 내부를 일렁이며 밝히고 있는 금서고 내부에 마주보고 서있는 두 인영.
자신들의 기척에 돌아선 그의 불길하게도 검붉은 색으로 타오르는 눈동자와, 주변으로 가득한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고 단번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엘프 경비들은 더 이상 다가오기를 주저했다.
본능적으로 이 앞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푸르기스 원로..!"
"잠깐, 푸르기스 원로... 그 모습은 대체?"
뒤이어 원로들도 하나 둘 금서고 내에 모습을 드러냈고, 역시나 마찬가지로 그 사악한 본질을 꿰뚫어 본 이들은 불타버린 그의 옷소매로 인해 드러난 손등 위로 불길한 문양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마나 보호막을 둘러 경비병들과 이비를 보호했다.
하지만 그러한 경계가 무색하게도, 푸르기스 원로의 몸을 차지한 적룡교의 대주교, 카마엘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포위한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들이밀어진 날카로운 창끝과 요동치고 있는 마나를 분명 보고 느끼고 있을 텐데도, 당당하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당연히 엘프들의 속은 타들어갔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함부로 공격을 할 수도 없었다.
일단 겉으로는 그가 영락없이 푸르기스 원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먼저 공격을 해오는 게 아니었다면, 성급하게 손을 쓰기에도 애매한 상황이다.
"계약의 조항에 따라 저는 당신들을 해칠 수 없지만, 당신들 역시도 이 하이엘프를 섣불리 공격할 수는 없겠죠."
저벅. 저벅.
금서고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그리고 자신들의 존경하는 원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그들은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엘프 경비들과 원로들의 불안한 눈빛들이 이리저리 교차하며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있었지만, 끝내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하나 둘 그의 앞길을 비켜주고 만다.
"거기 멈춰..!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쐐애애애액!!
챙그랑..!
그런 와중에도 이비는 날카로운 얼음창을 만들어 내 그의 등 뒤로 있는 힘껏 집어던졌지만, 그는 잠시 멈춰 섰을 뿐. 얼음 창은 허공에서 부스러지고 만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이비를 향해 웃었다.
"무슨 짓을 하다니요, 저는 그저 당신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것뿐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은 둘째치고, 저 웃는 낯이 너무나도 불쾌하게 느껴진다.
그가 엘프들을 해칠 수 없다는 제약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 치잇!"
그리고,
결국 금서고를 나서는 그의 뒤를 쫓는 수밖에 없었던 이비는 순간, 좁은 통로를 빠져나오자 마자 바깥에 펼쳐져 있던 혼란을 뒤늦게시야에 담고는 놀란 마음에두 눈을 크게 떴다.
"... 이게 어떻게 된..?"
마을의 경계로부터 시작된 혼란이 그대로 엘프 마을을 덮치고, 소란스러운 기척들이 어머니의 나무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함성과 비명, 마을 이곳저곳이 타오르며 까만 연기를 내뿜고 있기까지 하다.
그는 이 광경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아쉽다는 듯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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