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13. 땅속에 갇힌 지렁이들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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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땅속에 갇힌 지렁이들의 요람(3)
"실비아..!"
"실비아? 대답해...!"
홀로 달려가버린 소녀를 쫓아 마을까지 오게 된 헹겔과 라챤코였지만, 수인들이 있어야할 마을은 쥐죽은듯 고요하다.
소녀가 남긴 흔적을 따라 결국은 지키는 이 없는 경계까지 지나치게 된 둘은 눈앞에 드러난 거리의 모습에 잠시 멈춰 서게 되었다.
"헹겔 님, 설마.."
"이.. 이 멍청이들."
쿠구구구구... 꾸궁..!
화르르륵..!!
타오르고 있는 불길에 삼켜진 집이 허물어지는 소리와 함께 엘프들의 마을 이곳저곳에서는 수인들의 성난 고함소리가 뒤섞여 들려오고 있다.
지독한 탄내와 수많은 수인들이 지나가며 남긴 냄새로 소녀의 흔적이 끊어지게 되자 헹겔은 발을 동동 굴렀다.
"냄새가 끊어졌어. 라챤코 너는 이 주변에서 실비아를 찾아봐, 나는 이쪽으로 가 볼 테니까."
"... 네, 조심하세요."
근처에서 가장 소란스러운 곳으로 향하기 위해 헹겔이 좁은 골목을 지나 건너편으로 빠져나왔을 때, 이제는 세계수와 거의 가까워진 대로에서 한창 대치중이던 엘프와 수인들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
엘프들은 고작해야 상대를 속박하는 등의 마법으로 소극적인 방어를 펼치고 있었고, 수인들은 그런 이들을 전력으로 공격하고 있었지만 전선이 물러나거나 밀려나지 않는 이유는...
분명 엘프들의 사이에서 유난히 밝은 빛을 내뿜고 있는 저 옅은 금발의 아름다운 하이엘프 한 명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절대 대응하지 마세요!"
세레스티아가 직접 내려와 세계수 주변으로 보호마법을 광범위하게 펼쳐, 도망쳐온 엘프들 모두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간신히 안전이 확보된 엘프들이 수인들을 향해 공격을 퍼붓지 않는 이유는, 원로회 수장인 그녀의 단언과 이 보호마법이 절대 뚫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 있을 것이다.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래서야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공격을 받아 여기저기를 얻어맞은 이들, 가족들을 끌어안고 도망쳐와 놀라 울음을 떠뜨린 아이들을 달래주고 있는 이들, 자신의 집이 불타 쓰러지는 것을 바라보는 이들,
엘프들의 사이에서는 이미 수인들에 대한 반감이 생겨나 점점 그 크기를 키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들은 서로 싸울 필요가 없어요. 수인 여러분들, 부디 화를 가라앉혀 주세요!"
"그 미치광이 사제 놈과 그놈을 데려온 엘프 하나만 내놓는다면 우리도 물러나겠어, 그렇지 않으면 타협도 없어!"
수인들에게도 판결문은 공개되었다.
세계수가 어떤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도 이번에야 공식적으로 발표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제가 해결된 이후인 만큼 이러한 일괄 통보라도 그리 반발이 크지 않을 거라고 원로회가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수인들은 같은 주민이고, 세계수가 어떻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위험한 자신들을 이 중요한 문제에서 소외시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태고부터 세계수를 어머니로 따르며 관리해온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그들끼리 해결하려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수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생명도 직결되어 있는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려는 시늉 한 번 내지 않은 것에 대해 불편함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불씨를 키운 건 당연하게도 이번 판결의 형태였다.
역시도 비슷하게, 그들은 원로 재판의 판결을 문건으로 전달받았을 뿐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죽였다는 그 범인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판결에 대해 어느 의견 하나 제대로 내지도 못한 채 일방적인 보고만을 듣게 된 상황이다.
정말로 세계수가 괜찮아졌는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은 이 상황에서 이대로 엘프들을 마냥 믿고만 있다가는 정말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안감이 수인들을 자극했다.
생명의 요람이라는 이 마을에서, 세계수의 은혜를 받아 함께 살아가는 주민이었지만... 엘프들은 자신들을 같은 주민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고, 수인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배척감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 가장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들의 의견을 대신 소리내어줄 대표 헹겔조차 파면된 시점에서 그들이 투쟁을 선택한 것은 어찌보면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세레스티아는 알았다. 앞으로 계속 이 요람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번 분쟁에서 수인이든 엘프든 어느 누구든 죽는 이가 나와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처럼 서로의 감정이 격화된 상황에서 실수든 고의든 불씨가 하나 떨어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대로 끝이다.
상처는 아물고, 감정과 기억은 잊혀진다. 불타 허물어진 집은 다시 지으면 된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것이 있다.
불씨는 누군가의 죽음이 될 수도,
그리고 누군가의...
"아아."
스스스스스...!
"...!"
"....?!"
털썩!
라챤코는 거리 위에서 그대로 힘없이 주저앉았고,
헹겔 역시 몸을 훑고 지나간 불쾌하고도 거대한 마나의 폭류에 중심을 잃고 크게 비틀거렸다가 한쪽 무릎을 땅바닥에 붙이는 것으로 겨우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다른 수인들이나, 엘프들도, 심지어는 원로회의 수장인 세레스티아 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작스레 들려온 그 가볍게 목을 푸는 듯한 남성의 목소리는 보호막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대치중이던 엘프와 수인 모두를 멈춰세웠다.
이들 모두는 이 불길한 목소리가 지혜의 줄기 저 높은 곳에서부터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 반갑습니다. 깊은 땅속에 갇힌 지렁이 여러분들."
그렇기에 이어진 언사는 다소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매한 그대들의 구원자, 카마엘이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
지혜의 줄기 최상층,
마을의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금서고 입구 앞의 탁 트인 이 공간에서는 불쾌한 침묵이 강제되고 있었다.
".... 으.. 윽.."
당당하게도 자신의 정체를 밝힌 그는 본격적으로 힘을 꺼내 모든 이들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이비는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 떨림이 멎지 않는 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지만 그가 멋대로 지껄이는 것을 듣고 있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두려울 만큼이나 농밀하고 거대한 마나를 숨 쉬듯 자연스럽게 다루고 있다.
저게 정말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힘인지 의문이 먼저 들 정도로 상식밖의 괴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소름 끼치는 건, 저게 그의 완전한 힘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윽...! 그윽..!"
털썩!
그가 장악한 마나를 조금이라도 끌어오고자 발악해 봤지만, 결국 이비도 무릎을 꿇고 제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온몸을 짓누르는 이 느낌은.. 맹수를 앞두고 본능적으로 떨기 시작한 두 다리가 받는 심리적 압박과도 비슷하다.
조금 다르다면, 물리적으로도 그 압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욱..."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배가 된다.
원로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떨구고 빈속을 게워내며 구역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하다.
"... 퉤에."
하지만 그럼에도 이비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분명 대단하지만, 엘프들을 해칠 수 없는 그는 지금처럼 발목을 붙잡아두는 것까지가 할 수 있는 한계다.
확실한 한계가 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괴물에게도 분명히 정해져 있다.
그러니 아직, 기회는 남아있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선택을 맡기고자 합니다."
카마엘은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흘깃 뒤돌아 이비가 자세를 무너뜨린 채로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저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저 열기 넘치는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힘없이 바닥을 향하게 되었을 때, 옆에서 손을 내밀어 주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는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자신이 있는 목적은 신도를 늘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카마엘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혼란스러운 요람 내부를 내려다 보며 묻는다.
"외면을 택하고 평화를 얻으시겠습니까, 아니라면 진실을 택하고 멸망의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이는 이곳 생명의 요람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주어지는 몹시 단순한 선택지였다.
삶인가, 죽음인가.
"이곳, 생명의 요람은 머지않아 세계수의 종말과 함께 조용히 역사의 단편 속으로 스러질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만큼이나, 그들에게 있어 가장 소중할 자신의 목숨을 두고 선택을 해야했으니..자신은 감히 거짓을 입에 담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때, 한 가지 방법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놀랍게도 불사의 능력을 지닌 이 사제는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세계수를 회복시켰습니다."
이 좁은 구덩이 안에 조용히 불을 놓는 건 쉽다. 하지만 자신은 이런 자연스러운 방식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그 하나의 희생이 있다면, 이곳 생명의 요람에 있는 모두는 살 수 있게 됩니다. 후세들 역시도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상의 불길은 이 깊은 곳까지는 닿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기왕 이렇게 드러나게 된 것. 이들이 스스로 불이 되어 타오르 것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배반자이기도 한 그자에게 숭고한 희생을 바라기란 요원한 일입니다. 따라서 저는 그에게 누명을 씌워 형벌로써 그를 이곳에 붙잡아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수인 아이들 다섯이 희생되었고, 끝내 그를 세계수에 가두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만.. 진상에 의문을 품은 지혜롭고 용감한 한 명의 어린 엘프와, 불길처럼 일어난 수인 여러분들을 위해 이렇듯 고해합니다."
범인의 자백이다.
하지만 그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백을 들은 저들의 분노가 끝내 자신을 향할리 없다는 확신에서였다.
"후후후.."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을 지닌 악 그자체이기 때문에,이 우매한 이들이 그들의 처지가 이리 된 것에 대해 감히 용을 탓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인 용사를 탓하고, 죄없는 수인들을 탓하지 않았는가.
이들은 이제 누구를 탓하게 될까.
의심받을 위치에 있었던 에단?
그를 요람에 데려온 이비?
푸르기스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세레스티아?
"하지만 궁금하군요. 그래서 당신들은 어떤 결과를 바라는 것입니까?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으니 이 배반자를 풀어줄 겁니까? 그 결과.. 이곳이 당신들 모두의 이름 없는 무덤이 된다 해도?"
우습고, 또 우습다.
"그는 이미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저버리고 운명으로부터 도망친 죄인입니다. 아무런 죄 없는 수인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에 동조한 푸르기스 원로 역시, 그 스스로가 불이 되어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만... 당신들은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는 귀를 열고 들려오는 수많은 혼란스러운 목소리들을 들으며 감상에 잠겼다.
수인들과 엘프들 사이에서 각각의 이유로 일어나기 시작한 분열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며 입장과 선택의 자리로 모두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카마엘은 짙게 웃었다.
양심과 생존 사이의 문제에서, 이들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물론 그 결과는 타오르는 불길을 보듯이 뻔했지만..
이를 지켜보는 것 또한 여흥의 하나이다.
"... 크읏.."
양심을 택하고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일지, 혹은 살기 위해 외면할 것인지를 묻는 노골적인 질문이다.
이비는 원로들 사이에서 오가는 미묘한 시선을 느끼고 인상을 구겼다.
진실이 목숨과 저울질하는 이런 방식으로 저들에게 들이밀어져서는.. 가망이없다.
이대로라면...
"... 음?"
서로 갈라져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 지렁이들을 내려다 보며 그가 기분좋게 웃고 있던 때였다.
그는 이 주변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을 민첩한 기척 하나가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고 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조금 늦었던 것일까?
푸욱...!
"크으..?"
몸을 비틀어 확실히 피해냈다고 생각했음에도, 자신의 어깨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온 날카로운 쇠붙이의 감촉을 느끼며 카마엘은 빼앗은 몸일지라도 전해져오는 고통을 느끼고 옅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기꺼이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서로다른 눈동자 색이 인상적인 고양이 수인 하나가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다.
"... 멋대로 지껄이지마.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네가 아이들에게 손을 댔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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