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13. 땅속에 갇힌 지렁이들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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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땅속에 갇힌 지렁이들의 요람(5)
철퍽!
"... 으.. 윽.."
얼굴부터 떨어져 내리며 흙바닥에 코를 처박자, 골을 울리는 통증이 안면에서부터 퍼져옴과 함께 짙은 흙내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동시에, 마치 진흙 위로 떨어진 것 같은 이 물소리가 무엇 때문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비린 핏내도 섞여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비는 자신의 정신이 여전히 깨어있다는 것에 절망했다.
사고할 수 있다는 것,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핏내섞인 흙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
이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반증이었지만, 마찬가지로 곧 찾아올 더 거대한 고통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 ...! 어.. 윽, 끄흐으.."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으로부터 반박자 늦게 머리를 태울 듯이 몰려들기 시작한 고통에 이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신경을 맨손으로 잡고 쭉쭉 찢어내리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차라리 이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싶었지만, 이 끝나지 않는 고통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자신의 정신을 강제로 붙잡고 끌어올리고 있다.
아파... 아파..
"....!!! .... 그...!! 흐극..."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새까맣게 변했다 반복하는 것을 눈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느끼며, 고통만으로도 죽어버릴 수 있겠다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컥... 헉..!"
하지만 지금 자신이 아직 깨어있는 거라면, 반드시 확인해야만 하는 게 있었다.
자신이 함께 전이시킨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빨갛게 물들어있는 듯한 시야 속으로 보이는 건 낮은 돌담이 길게 늘어져 있는 광경이다.
엘프와 수인들의 생활영역을 나눈 이 경계 바깥에 지금 이비는 전이해 있었다.
이곳은 세계수의 생명력이 사라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마나의 이동을 차단해둔 역방향의 결계가 쳐져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전이 마법을 통해 이를 강제로 비집고 빠져나오려 한 결과.. 이런 꼴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피가 어느 정도 빠졌기 때문인지 현기증으로 고통이 감화되면서 이비는 흔들리는 초점을 겨우 맞출 수가 있었다.
어느새 깨물고 있었는지 너덜거리는 입술에서는 진한 피맛이 느껴지고 있다.
"흐.. 윽... 아파아.."
그리고 이비는 드디어 자신의 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팔꿈치에서 손목으로 이어지는 도중, 있어야 할 양손과 손목은 사라지고, 얼린 과일을 썰어낸 것처럼 말끔한 절단면만이 남아있다.
... 바로 근처에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져 있는 자신의 두 손이 보인다.
결계로 인해 마나의 흐름이 지연되면서, 두 팔이 뒤늦게 전이가 완료되어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을 이비는 이런 와중에도 이해해 내고 있었다.
"아파... 아파아.. 으으.."
그리고 허리가 끊어진 건 아닐까 지레짐작했지만 허리는 물론 오른쪽 다리도 의외로 멀쩡히 몸에 붙어있는 게 보인다.
다만 왼쪽 다리의 경우에는 바깥쪽 허벅지에서 무릎 쪽으로 사선으로 말끔하게 잘려나가 흙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이비는 그 기괴한 절단면을 보면서도 허리가 끊어졌다면 다리가 아플 일은 없었겠구나.. 하고 자신의 짐작이 틀렸다는 인지를 해내었다.
"..."
바로 자신의 근처에 마찬가지로 떨어져내린 카마엘 역시도 그 꼴은 자신과 비슷하다.
그를 거쳐간 절단면은 이비와는 다르게 둘뿐이었지만 오히려 상태는 그쪽이 훨씬 심각하다 할 수 있었다.
어깨채로 잘려나가있는 오른팔.
복부에 위치한 정교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이나 말끔한 수평의 절단면으로 서로 떨어진 그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보인다.
상반신의 절단면에서는 내장이 뜨거운 김과 함께 흘러내려 흙바닥과 하얀 원로복을 붉은 피로 물들이고 있다.
안쪽의 장기과 척추까지도 말끔한 절단면을 가지고 있는 것을 눈에 담게 된 이비는 생리적인 거부반응으로 인해 구역질을 하며 위액을 쏟아냈다.
"우윽..."
후두둑... 투둑..
입술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피가 조금 섞였을 뿐, 입에서 쏟아낸 게 핏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운이 따라주어 치명상을 피해 갔다는 의미였지만..
그럼에도 이비는 자신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붉은 피를 보고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한심장에정신이 돌아올 법도 했지만,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인지 간신히 붙잡은 시야도 점점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어이.. 저질러 주었군요. 쿨럭.."
울컥 울컥.
말 한마디를 간신히 내뱉고, 이내 그 배는 될법한 피를 울컥거리며 토해내고 있는 카마엘의 검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
그의 눈매는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다.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징그럽게 웃고 있는 그 모습에 이비는 순수한 공포를 느꼈다.
"이 결계.. 그렇군요. 당신 역시도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테니 그야 최후의 수단이라고 말할 만합니다..."
"..."
"어째서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쉽군요. 아쉽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최후는 정말 아쉽습니다... 차라리.."
"..?"
흔들리는 시야 속으로 보이는 것은 유일하게 남은 왼손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 문양으로부터 검붉은 불길을 피워올린 카마엘의 모습이었다.
"차라리... 그전에 제가 그 목숨을 거두어 드리겠습니다."
"..."
그 불꽃을 보며, 이비는 뜨거움이 아닌 서늘함을 느끼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 저지른 행동은 아니었다.
홀로 남겨져버린 그날 이후.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놓지 않고 스스로를 몰아세웠지만.. 자신의 재능으로도, 금서고의 지식으로도,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하더라도... 그날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언니.. 엄마..."
보고 싶다.
기억력이 뛰어난 자신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이 점점 흐릿해져간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들의 목소리가 희미해져 간다.
"아빠...."
그 어떠한 소중한 감정이라도,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감정한 시간은 이를 풍화시키고 마모시킨다.
그리고 점차 그들에 대한 기억이 잊혀져 갈수록,
자신은 더욱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고, 다른 방법을, 또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가리지 않고 이 세상의 지식을 탐구했다.
어쩌면, 탐구에 빠져있는 그 순간만큼은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낼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정말 멍청한 행동이었다.
너무나도 아까운 시간들이었다.
지금은 이미 흐릿해져버린 그들에 대한 감정과 기억이라 할지라도..
이대로 죽어버리면...
그것조차.. 떠올릴 수 없게 된다.
그 따스한 감정을... 더이상 느낄 수 없게 된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마음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차라리 전부 잊어버리면 홀가분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나날들이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도 후회된다.
누가...
제발..
헹겔 님..
셀렌 님...
...
"에단..."
.. 도와줘...
그러나 그녀의 그 마지막 소망에 답해주는 것은, 당장이라도 손짓하여 불길로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카마엘의 서늘한 눈빛뿐이다.
절망했다.
자신의 멍청함을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되어, 이렇게 후회하며 죽어가야 한다니..
"읏..!"
이비는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자신의 이런 한심한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 어둠보다도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
곧 자신을 덮칠 거라 생각했던 살갗이 타오르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에일 듯 스며들던 불꽃의 한기도 아직 그대로였다.
"으흠..?"
카마엘 역시 의문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비를 향해 이 검붉은 불꽃을 휘두르려 했지만,
마치 누군가가 그의 손목을 붙잡아 세운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이를 막아선 것이 누군지는 곧 알 수 있었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가 어느 순간 맑은 빛을 띠고 처참한 꼴의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눈빛에 담겨있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후회의 감정이다.
"이미 계약은.. 아니지, 계약보다는 내 목숨부터가 끝난 것 같소만."
"... 푸르기스 원로 님."
문양 위로 불길한 빛이 깜빡거리는 자신의 왼손을 내밀어 이비에게 남은 마나를 전해주고 있었다.
이미 카마엘에 의해 험하게 쓰인 그릇이었기에 얼마 남지도 않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남은 마나를 모두 이비에게 전해주며, 그녀의 생명이 이대로 끊어지지 않도록 그 손을 함께 붙잡아주고 있었다.
"... 어린 엘프야, 너는 아직도 나를 원로라고... 불러주는구나."
"지나쳤을 뿐이지.. 원로님이 바란 것에 대해서 만큼은.. 이해하니까요."
아마 그와의마지막대화가 될 것이라 생각한 이비는 자신이 알게 된 것을 전부 그에게 알려주기로 했다.
"혹여나.. 계약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곳을 지킬 수 있는 건 아니었다고 말씀드릴게요."
그가 마지막은 원로로서 갈 수 있도록.
사악한 불에 속아넘어간 그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로 했다.
"불의 계약은... 상대의 몸을 차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자의 삶으로 축적된 모든 기억과.. 지식마저 빼앗아가요. 요람의 위치나 엘프들의 모든 중요한 지식과... 지혜가.. 소중한 추억들조차 전부 그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의미예요."
"아아.. 그랬구나..."
계약자가 먼저 제시할 수 있는 세 가지 조항은얼핏불의 계약이 공정한 거래 끝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 착각하게끔 하지만, 실상은 아주 적은 부담으로 상대의 모든 것을, 말 그대로 모든 것들을 앗아가는 사악한 속임수였다.
욕망을 불태우고, 열기로는 그의 눈을 가리는 것이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저는..."
결국 그의 눈동자는 점차 불빛이 희미해져가는 것처럼 빛이 멀어져간다.
그리고 곧, 그의 눈동자는 다시 검붉게 물들고야 말았다.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 생명의 타오름으로 잠시 통제권을 빼앗은 모양이지만 결국은 이 거대한 악에 스러지고 말았다.
"하하..."
방해꾼이 사라졌기에, 그는 하려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이제는 체내의 마나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몸은 불꽃을 전처럼 일으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카마엘은 이를 보며 조소한다.
"당신들은 나름 잘 분발해 주었습니다만.. 결국은, 아무것도 해낸 것이 없군요."
그것은 푸르기스와 이비, 이 두 엘프들에게.. 혹은 이 요람 안의 지렁이들에게 보내는 비웃음이었다.
그릇이 파괴되어 불의 계약 역시 사라지기 직전이었지만, 그의 이 조롱에는 이유가 있었다.
"거대한 악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서 이곳의 모든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건 아니니 말입니다."
"..."
이비는 이에 대해 반박할 수 없었다.
이미 그가 엘프과 수인들에게 내린 분란의 씨앗은 부정적인 감정을 양분삼아 자라나 그들을 혼돈으로 이끌어 자멸하게 만들 것이다.
그릇 하나를 잃었을 뿐... 어딘가에 있을 그는 건재했고 요람은 그의 처음의 의도대로 어떠한 방식으로든 땅속 깊이 묻히게 될 것이다.
슬펐다.
이렇게나 열심히.. 견뎌왔는데,
이렇게나 처절하게... 저항했는데,
결국은 이런 결말이라니.
여태까지의 자신의 삶이 전부 부정당하며, 무의미해지는 것 같은 이 허무한 느낌에... 그녀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흐윽..."
이비는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그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불길을 일으킬 수는 없었지만, 끝내 제 손으로 자신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여린 자신의 목을우악스럽게 쥐어단번에 부러뜨릴 것처럼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이 죽음의 그림자를 더 이상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푸르기스 원로에게 마나를 건네받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이젠 목에 줄 힘조차 없었던 이비가 끝내 고개를 떨구고, 다가오는 손과 그의 손등에 새겨진 불의 문양을 멀어져 가는 시야 속으로 담고 있던 때였다.
"... 뭣..?"
푸욱...!
갑작스러운 파육음과 함께, 마찬가지로 그의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
분명 눈앞까지 다가왔던 그의 손이 누군가에 의해 쳐내진 것처럼 어느새 멀어져 있고,
단검 한 자루가손등의문양을 관통하여 손바닥을 뚫고 나와 있는 것이 뒤늦게 보인다.
"..... 아..?"
그리고 곧, 불어닥치는 바람을 느끼는 것과 함께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바닥에 조심스레 눕혀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지러운 정신 속, 빙글빙글 돌며 주변으로 녹아내리고 있는 요람의 천장을 바라보던 이비는 그런 시야 속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민 것이 누구인지를 이제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제 덩치보다 두 배는 더 커다란 누군가를 간신히 업어든 수인 소녀 하나가.. 은은한 빛을 품은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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