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14. 내일을 약속하는 사제
* * *
14.내일을 약속하는 사제(1)
"방금 그건..?"
옛 성소, 지금의 감옥을 지키고 있는 두 엘프 경비들은 정체 모를 오싹한 기운이 자신들을 끈적하게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지만 현재 자신들에게는 주어진 책무가 있었다.
"... 위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지만 자리를 비울 수는 없어. 론, 네가 올라가서 확인하고 와."
어차피 이 안의 죄인은 자력으로 탈출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도 일단은 한 명만 올려보내 상황을 알아보게 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곤 좁고 어두운 계단 통로로 향한 엘프는 얼마 가지 못해...
퍼억..!
"어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그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힘없이 바닥에 늘어졌다.
쿵...
"론..!"
불편한 고요 속, 동료가 바닥에 쓰러지며 낸 소리가 성소 앞의 공동을 낮게 울리며 창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게 한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어 보였지만 저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 조심스레 쓰러진 동료에게 다가가려던 나머지 한 명의 엘프 경비는... 보았다.
동료가 힘없이 늘어져 있는 그 저편,
계단으로 이어진 좁은 통로의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한 쌍의 안광을.
"누구냐...!!"
창을 든 손에 더욱 힘을 꽉 주고, 동시에 마나를 끌어모아 당장이라도 마법을 시전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동료가 눈앞에서 쓰러졌지만 그는 지혜의 줄기를 지키는 중요한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계약이나 급여 따위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닌, 어머니의 나무에 대한 사랑과 존경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었던 만큼 그는 투지를 불태웠다.
그는 이 간악한 침입자를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는 데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을 것이다.
쐐애액..!
"....!!"
위협적인 바람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날아든 단검 두 자루에 그는 엘프답게 민첩하게 반응하여 이를 가뿐히 피해냈지만, 그 사이 상대는 어둠 속을 빠져나와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펄럭!
벗겨진 후드 안쪽으로 휘날리는 잿빛 머리칼과 그 위로 솟은 한 쌍의 짐승 귀를 발견한 그는 당장 창을 휘둘러 눈앞의 상대를 물러나게 하려 했지만,
"웃...?!"
순식간에 바닥에 엎드리듯 몸을 낮춘 이 작은 체구의 수인은 창을 휘두르느라 그대로 비어버린 그의 복부를 향해 힘껏몸을날려왔다.
꾸웅..!
"컥...!"
몸의 무게를 싣고 뛰어오르듯 어깨로 받아내니,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있었던 그의 몸조차 한순간 떠올랐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 이 자식!"
그는 그만한 충격을 받은 와중에도 손에 마나를 잡아둔 것을 놓치지 않고, 곧장 상대가 있을 앞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치고 날카로운 바람 칼날을 날려보냈다.
하지만 그 칼날은 바닥에 선명한 상흔을 만들어내며 주변의 흙먼지를 날려보냈을 뿐이다.
"피했어...?!"
아무리 신체능력이 뛰어난 수인이라고 해도 이렇게 힘껏 몸을 맞부딪혀온 직후 이 회심의 일격을 피해낼 방법은 없을 것이다.
공중에서는 몸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커녕 제대로 중심을 잡는 것조차 힘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어야 할 침입자는 보이지 않는다.
꾸우욱..
"...?"
그는 문득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묘한 압박감에 따라 시선을 내렸고,
"...!!"
자신의 갑옷 허리 부분을 고정한 혁대를 꽉 움켜쥐고 있는 반창고 투성이의 작은 손 하나를볼 수 있었다.
"이런...!"
이 침입자는 자신에게 몸을 들이받은 동시에 혁대를 부여잡고, 팔힘만으로 공중에서 자신의 위치를 옮겨낸 것이었다.
그리고 옮겨낸 그 위치라 함은...
퍼억...!
윽, 하는 짧은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목뒤로 들이닥친 충격에 시야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바닥을 향해 무너져 내렸다.
눈을 부릅뜬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닌 이 정신이 멀어져 가는 느낌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눈꺼풀을 잡아 내린다.
털썩..
그렇게 성소 앞을 지키던 두 엘프 경비들은 모두 쓰러졌고,
이들을 한 번 뒤돌아본 이 잿빛 머리칼의 수인은..
"... 미안해."
이미 기절한 그들은 들을 수 없을 사과 한 마디를 남기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눈앞의 문을 바라보았다.
이 너머에 그가 있다고, 자신의 후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
아...
묘한 감각이다.
깊고 어두운 계곡의 밑바닥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몸 옆으로, 누군가 피워올린 모닥불처럼.
이 조그마한 따뜻함은 어둠 속에서 금방이라도 먹혀버릴 것 같으면서도 끈질기게 몸 주변으로따스함을퍼뜨리고 있다.
"..."
눈을 뜨기 위해 힘을 주자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간신히 올라간다.
시야는 초점 없이 흐릿하여 앞을 제대로 분간하기조차 힘들었지만, 한 가지 만큼은 볼 수 있었다.
빛이다.
그리 밝은 빛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 어두운 곳에서는 시야의 대부분을 색감으로 채워줄 수 있을 만큼이나 환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다.
"... 하아.."
입에서는 드디어 첫 숨이 힘겹게 빠져나왔다.
폐 속에 길게 머물러있던 죽은 숨이 드디어 물러나고, 새로운 숨이 채워져 오는 느낌에 나는 한차례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정도란 정말로 미미한 것이었지만, 적어도 눈을 몇 번 더 깜빡여 시야 속 초점을 제대로 잡아낼 정도는 되었다.
"... 에단.."
이제서야 내 바로 앞에 있던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내 가슴팍에 따스한 고동을 퍼뜨리고 있었던 그 누군가는..
"... 실.. 비아...?"
짙은 회색의 머리칼과, 그 머리 위로 축 늘어져 있는 뾰족한 두 귀.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린 소녀의 얼굴이 보이고... 그녀의물기 젖은 눈동자는 나를 처연하게 올려다보고 있다.
꾸욱...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일까. 나는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아마도 소녀의 두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과 같은 무력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양팔과 다리가 저릿거리고는 있었지만 체중에 당겨져 쇳덩이에 살이 짓눌리는 고통도 없다.
무엇보다도.. 매달려있었을 내 무릎이 지금은 바닥에 닿고 있었다.
철그르르륵...
시험 삼아 팔을 들어보니 가볍게 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구속구가 별다른 저항감 없이 끌려온다.
나를 껴안고 있는 소녀의 등 뒤로 내 손을 들어올려 보고 나서야 구속구의 사슬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끊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에단.. 미안해.."
소녀는 내게 안겨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이 아이는.. 대체 무엇이 미안한 걸까.
이 아이가 내게 미안하다고 해야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을까.
아직 침침한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려 했지만... 답은 금방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인 걸까.
이비...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나가는 이비의 뒷모습이 마지막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다음 나는.. 나는...
다시 허무 속으로 떨어져서..
"에단... 에단.."
"... 네가.. 어떻게.."
미안하다는 말 만큼이나 내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고 있는 이 소녀는...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걸까.
구속으로부터 나를 풀어준 건.. 이 소녀인 걸까.
".. 목소리가... 흑.. 도와줬어.."
"목소리..?"
"으흑... 흑.. 미안해..."
네가... 미안해할 이유는 없을 텐데..
... 이렇게 나를 구하러 올 이유도 이 소녀에게는 없었을 텐데.
대체 어째서..
"에단은.. 그럴사람.. 아니라는거... 사람들한테.. 말했어야.. 했어..."
"... 너.."
"그런데.. 그런데, 나... 무서워서.. 정말 에단이 그런거면 어떡하지 하고.. 무서워서..."
"..."
아마.. 두 번째로 보는 것 같다.
"... 훌쩍. 흐윽.. 흑... 으하앙..."
이 소녀가 이렇게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 말이다.
아이처럼, 아이답게 이렇게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수척해진 내 꼴을 보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아니라면.. 자신을 짓눌러오는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서 인지도 모른다.
나를 한순간이라도 의심하고 말았다는 것에 이 소녀는 이리도 미안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저 문 너머 쓰러져 있는 엘프 경비들...
게다가 이비가 아닌 이 소녀가 나를 먼저 찾아왔다는 건 아직 모든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조차도 확신이 없는데, 이 소녀는 대체 무슨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나 내게 미안해하고 있는 걸까.
"모두가.. 에단을. 믿지않는다고.. 해도.. 흐윽.. 나는... 믿었어야 했어..."
내 허리를 꼭 붙들고 있던 소녀의 팔에 서서히 힘이 빠진다.
그리고 이내, 내 어깨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 소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되어있다.
여전히 눈물이 샘솟듯 흘러내리고 있는 소녀의 물기 젖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엄마.. 쓰러지고.. 모두 나를.. 외면했어... 그런데, 에단만은 아니었어. 내가... 아프게 했는데도... 흐윽.. 도와주고... 구해주고.. 따라와도된다고. 그렇게.. 말해줬어."
"..."
"그런데.. 훌쩍... 그런데 난.. 나는... 미안해... 흐아아앙.."
와락..!
다시 한번 내게 깊이 안겨든 소녀 탓에 나는 힘없이 한 번 휘청였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지 않으려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야 말았다.
결국에는 나도 그녀를 마주 안아준 형상이 되고야 말았다.
어쩌다 이루어진 행동이었지만, 훨신 가까워지게 된 소녀의 체온이 이젠 더욱 확실하게 전해져 온다.
그녀의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리고 나에 대한 믿음이... 전부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다.
"..."
내 생각이... 틀렸구나.
나는.. 만족스럽게 만들어진 죽음을 반기며 주변의 것들을 똑바로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서럽게 엉엉 울며 내게 아이답게 매달리고 있는 이 소녀를 보며, 나는 유일하게 변덕이 아니었던 내 선택을 떠올렸다.
그것은 일종의 약속이었다.
이 세상의 불합리함을 부정하기 위해,
이 소녀만큼은 반드시 살려내리라.
이 소녀가 품은 이 따스함 만큼은 반드시 내일로 전하리라.
그리했던 스스로의 다짐마저 어느새 잊어버린 채, 오히려 소녀의 가슴에 평생을 남을 뻔한 죄책감을 안겨놓고 나 홀로 편해지려고 했다.
세계수의 말대로.. 나는 언제든지 기회가 생기면 당장이라도 돌변하여 이기적인 결말을 찾아 몸을 묻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의지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비겁하게도 어둠 속에 한 발을 걸치고 괴롭고 슬픈 것을 피해 어둠속으로 숨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럽다.
그리고.. 지금내가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
아직 움직이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이나 뻑뻑한 팔이었지만, 나는 가까스로 소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 작고 여린 두 어깨는 소녀가 훌쩍거릴 때마다 불안하게 겉도는 호흡과 함께 애처롭게 들썩거리고 있다.
나는 이를 진정시켜주기 위해 아프지 않게 그녀의 어깨를 보듬어 내 쪽으로 당겨주었다.
"흐윽...?"
내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고개를 틀어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을 나는 분명 느끼고는 있지만...
부끄러운 마음에 차마 그 눈동자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이 소녀는.. 정말이지.
내게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주는 구나.
"나야말로.."
"..."
"... 미안하다."
정말 힘든 한마디였다.
이 짧은 한마디를 나는 지난 백 년 동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나를 위해주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보게 된 것일까.
정말 오랜 일이지만, 내가 처음으로 사제복을 받았던 그 날이 떠오른 것같다.
내가 아직 사제라면...
아니, 내가 여전히 사제이고 싶다면.
한 번 구하겠다고 마음먹은 생명에 있어서는 끝까지 나의 책임과 도리를 다해야만 했다.
"... 으흑.. 흐윽."
내 사과에 진정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소녀는 오히려 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리고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 이유는 모른다.
다만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이번처럼 그녀를 두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일은 더는 없을 거라고.
"앞으로는... 너를 절대 혼자 두지 않을 거야."
그러자, 내 어깨쪽에서는 다소 뭉그러진 발음으로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 약속..?"
".. 그래, 약속."
그렇게 내가 스스로의 다짐을 입 밖으로 다시 한번 내며 되새긴 순간이었다.
"..."
방금 전까지도 격하게 떨리며 울음을 멈추지 못하던 소녀의 몸을 덜그럭 하고 멈춘다.
지쳐 잠에든 것과는 분명 다른 그 부자연스러운 몸짓에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은은한 빛을 품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몹시 담담한.. 하지만 어딘가 기뻐 보이는 은빛 눈동자를 찾을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