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84화 (84/137)

〈 84화 〉 14. 내일을 약속하는 사제

* * *

14.내일을 약속하는 사제(2)

"..."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 소녀는...

눈 주변이 눈물자국으로 지저분했음에도 어울리지 않게 담담한 눈빛을 하고 있다.

"... 넌..?"

내 앞에 있는 것이 방금 전까지 내게 안겨있던 그 소녀가 아니라는 확신에, 나는 이 은은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정체를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해 줄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젓는다.

"윽..?"

철그렁...

그리곤 이내 나를 들쳐매고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발걸음을 서두른다.

비록 속박에서 벗어나 세계수로부터 은총을 더 빼앗기지는 않게 되었지만, 몇 번째일지 모르는 죽음에서 방금 막 돌아온 내 피폐해진 몸 상태로는 그대로 소녀에게 업혀있는 것 이외에 달리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

계단을 오르는 소녀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질수록 저 위쪽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목소리들도 점점 선명해져 간다.

그리고 드디어 지혜의 줄기를 빠져나오게 되었을 때, 나는 눈앞에 펼쳐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눈동자가 초조하게 주변을 향해 굴러가는 것을 느꼈다.

세계수의 그늘 아래, 그곳에는 엘프와 수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요람에 어울리지 않는 불길한 탄내와 성난 고함들은 내 짐작과는 다르게 엘프와 수인의 대립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끼리 언성을 높이고 있다.

엘프와 엘프들이.

수인과 수인들이.

서로 갈라져 당장이라도 불씨가 옮겨붙을 것만 같은 이 혼란 속에서, 소녀는 묵묵히 나를 잡아끌었다.

다만 워낙 큰 차이가 나는 키 때문에 내 두 다리가 바닥에 끌리며 그녀의 속도를 늘어뜨리고 있었고, 결국에는 하나둘씩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야 말았다.

"....!"

"... 저자는.."

"...!!"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를 바쁘게 살피고 있다.

그 불쾌하고도 묘한 분위기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군중을 잠식해 나갔고,

끝내는... 그들 모두를 침묵 시킨다.

"...?"

이들의 고의적인 침묵에 소란은 잠시 가라앉았고,

저들의 눈동자가 틀림없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 하나 직접 입을 여는 이들은 없다.

마치,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낚싯바늘 끝의 미끼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

이 기묘한 진풍경 속, 여전히 말없이 나를 끌고 어디론가 향하던 소녀가 어느 순간 멈춰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리고 그건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군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의 벽이 되어 소녀가 향하려는 앞길을 몸으로 막아세우고 있었다.

생기 없는 눈알들이 도르륵 도르륵 굴러간다.

지극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부릅뜬 저들의 눈동자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비슷하다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절박함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죄인인 나를 붙잡은 것도 아니다.

나를 도운 소녀를 붙잡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앞길을 막았을 뿐이다.

저들의 이 어딘가 어색한 행동들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에단..?!"

그렇게 소녀의 발걸음이 멈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자, 옷감이 하늘거리는 하얀 원로복을 입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아름다운 하이엘프가 보인다.

옅은 색의 수려한 금발과 지금의 이 혼란스러움을 잠깐이나마 잊게 해주는 상냥한 연녹빛 눈동자.

물론... 세레스티아다.

세레스티아의 품에는 이미 정신을 잃은 것 같아 보이는 헹겔이 안긴 채 힘없이 늘어져 있다.

그녀의 눈동자 역시 주변의 이들과 비슷하게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들과 같은 혼란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

처음으로 소녀의 입이 열렸다.

"지혜로운 선택을 하길 바랄게요. 다만 조언하건대 이대로 망설이고만 있다면 분명 후회하게 될 거예요."

어눌하지 않은 그 목소리는 똑똑히 울려 퍼지며 앞길을 막아선 군중을 주춤거리게 한다.

나는 이 어색하고도 신비로운 광경을 보며 문득 소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목소리...

목소리가 그녀를 도와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대체 누구의..?

모르겠지만... 알 수 있을 리 없지만.. 어째서일까.

이... 그리운 느낌은....

"여러분, 진정하고 물러나세요. 지금 저희들끼리 얼굴을 붉히며 싸워야 할 이유도, 심지어는 이렇게 동족 간에 갈라져 싸워야 할 이유도 없어요."

세레스티아는 길을 막아선 엘프와 수인들에게 길을 비켜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걸 이제는 아시잖아요."

하지만 끝내 덧붙인 말에 군중은 하나라도 된 것처럼 입을 모아 그녀를 몰아세운다.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압니까?"

"원로님! 저자를 이대로 보내주면 어머니의 나무는...!"

"이젠 당신들 말은 믿을 수 없어. 이 간악한 엘프들."

"..."

드디어 그들의 무거운 입이 열린 것에 반해 어느 누구 하나 직접 에단을 붙잡기 위해 나서는 이들은 없었지만.

저들 모두가 결코 앞길을 비켜주지는 않을 거라는 의지를 강고히 보이고 있다.

"쿨럭... 이.. 멍청이들이...."

그리고 그런 사이, 잠깐 정신을 차린 것인지 세레스티아의 품에 안겨있던 헹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올라간다.

"헹겔 님..! 지금은 말하지 마세요. 상처가 벌어질 거예요."

정신을 잃은 것인 줄로만 알았던 헹겔이 세레스티아의 품에서 빠져나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들을 나무랐지만, 단순히 그 이상으로는 힘들었는지 헉헉거리며 입에 머금고 있던 핏물을 바닥에 뱉어 낸다.

"퉤.. 이비가 놈을... 어서... 찾아내야...."

헹겔의 기세에 주춤한 군중들이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휘청..

"윽... 그윽.."

헹겔의 입에서 끈적하게 늘어지는 핏물을 보고 세레스티아는 옷소매가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입가를 닦아내 준다.

그러고는 바닥에 헹겔을 조심스럽게 눕히고 마법으로나마 그녀의 상처가 악화되는 것을 막는다.

"..."

이비와 원흉이 함께 사라져 버렸다고 피를 흘리며 이곳까지 내려온 헹겔이 자신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발목이 잡혀있을 시간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을 이대로 둘 수만도 없었다.

"새액.. 색.."

다시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감고 얕은 숨을 내뱉는 헹겔을 우려의 눈빛으로 한 번 바라본 세레스티아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께에 한쪽 손을 올려놓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그 사죄의 표현은 다름 아닌 엘프들과, 수인들을 향하는 것이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고귀한 하이엘프이자 원로회 수장의 그 정중한 부탁에 그들은 더더욱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한다.

분위기는 점점 더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세레스티아는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며 정중하면서도 꿋꿋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우리는 불을 피해 이곳으로 내려왔어요. 그리고 그건 살아남기 위해서였죠."

"..."

"하지만 그건 결코 홀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우리들이..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친절한 이웃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그곳이야말로 우리들의 집이었으니까요. 그렇기에 흔쾌히 원래의 터전을 버리고 이 깊은 땅속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거잖아요."

단순히 불에 붙어 기둥이 쓰러지고 지붕이 내려앉는 것으로 집이라는 것이 영영 무너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함께할 이와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이 그들의 집이 되고 터전이 될 것이다.

"저 역시도 그래요. 존경하는 어머니..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과 함께할 수 있는 집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제 모든 것을 망설임 없이 포기할 수도 있어요."

탄내 섞인 갑갑한 공기에 세레스티아는 자신의 목이 잠겨가는 것을 느꼈지만,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지금 이건.. 여러분의 가족과 이 마을을 지키는 행동이 아니에요... 지금 이대로 무책임하게 눈을 감아버리면... 우리들은 두 번 다시 그 옛날의 평화로운 요람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

그녀의 진정성 있는 호소 덕분일까?

군중이 다시금 주춤거리기 시작한 것을 보며 세레스티아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눈에 핏발이 선 수인 여성 하나가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와 그대로 그녀를 어깨를 밀쳤기 때문이었다.

"꺄앗...?"

"무슨 짓이냐..!!"

휘청이다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만 세레스티아의 뒤쪽으로 지키듯 서있던 몇몇의 엘프들이 자신들의 원로를 공격해온 수인 여성을 붙잡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잠깐, 잠깐만요...! 저는 괜찮아요. 그것보다 당신은.. 그렇군요..."

그들을 멈춰 세운 세레스티아는 먼지도 털어내지 않고 일어나 조심스럽게 그녀에게로 다가가려 한다.

핏발 선 저 눈은...

언뜻 명확한 분노를 담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실상은 갈 곳 잃은 분노의 감정에 잡아먹힐까 두려워 다가오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 수인 아이의.. 어머니군요."

원로재판이 시작되기 전, 죽은 수인 아이들을 찾아갔을 때 그녀를 본 기억이 있다.

".. 피피는... 이제 돌아올 수 없어. 나는.. 우리들은 이미... 평화로운 옛날로는 돌아갈 수 없게 돼버렸다고."

"... 미안해요."

이어진 세레스티아의 섣부른 사과는 당장이라도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수인 여성을 오히려 자극하는 꼴이었다.

"함부로 사과하지 마...!! 그래서 뭐? 죽은 내 아이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누가 아이들의 죽음을 책임지지? 누가!! 너희 엘프들? 수인들? 저 사제?!"

"..."

"아니야... 아니야.. 그 누구도 내 아이의 죽음을 책임질 수는 없어. 그렇게 되어버렸어. 그러면... 그러면 이 미칠 것처럼 끓어오르는 감정을 토해낼 상대라도 있어야 하는 거잖아...!"

수인 여성의 눈동자에는 일생에서 처음으로 품어본 어설픈 살의가 일렁이고 있다.

그 모습은 두렵다기보다는 안타까웠다.

"그런데 너희들은... 한심하게 서로 갈라져서 싸우기나 하고, 양심과 목숨...? 이미 사랑하는 한 사람을 두 손 놓고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이 손으로 한 사람을 죽일지 모두를 죽일지를 선택하라고..?"

군중을 둘러보며, 처음 함께 경계를 넘을 때와는 달리 그불길한 목소리의몇 마디 선동에 하나같이 혼란과 이기심에 집어삼켜진 이들을 보게 된 수인 여성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털썩..

"으흑... 흑.. 피피..."

그런 그녀에게 세레스티아는 두 발자국 떨어진 앞에서 차마 더 다가갈 수 없어 그 고운 주먹을 말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저 여성에게만큼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수가 불타 쓰러지든, 너희들이 죄 없는 사제를 땅속에 묻든... 나는 조금도 상관없어..."

"..."

"죽여 마땅한 자식이제 발로 걸어 나와있는데.. 대체 우리는왜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거냔 말이야..."

이에 대한 대답은 모두에게 분명해 보였지만, 그 누구도 차마 그녀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범인이 어떻게 손쓰기 어려울 만큼이나 강하다는 걸 이미 본능적으로 느낀 직후, 생존을 위해 차선책으로 계속해서 시선을 돌리려고 한 결과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그리고 비겁한 회피이다.

생명을 가진 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비겁함이지만,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만큼은 조금도 공감되지 않는 사소한 문제일 것이다.

"실비아..?? 헹겔 님...!"

답을 알고 있음에도 끝내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인파가 주춤거리기 시작한 것을 겨우 헤치고 뒤늦게 세계수의 아래에 도착한 라챤코는, 드디어 수인 소녀를 찾았다는 것에 기뻐하기도 전에 옆구리에 심한 화상을 입고 바닥에 몸을 누이고 있는 헹겔을 발견하고는 비명을 삼켰다.

그녀는 수인 소녀를 앞두고 굳건히 선 인파를 세게 밀쳐내고 당장 헹겔에게 달려가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약병들을 모조리 꺼내 상처에 들이부었다.

"왜.. 어째서 다들..."

그녀는 존경하는 자신들의 대표가 이런 모습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마찬가지로 이를 보고도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인 이들이 없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것이 같은 수인들이었기에 더더욱.

"..."

자신도 분명 카마엘의 그 목소리를 들었다.

뼛속까지 울리는 불길함으로 숨통을 죄여오던 그 속삭임을 말이다.

분명 마을의 모두와 한 사람의 생명을 저울질한다면... 그야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그 다수에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목숨이 포함되어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 선택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에게는 모두.. 마음속으로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이 마을에 있겠죠. 그러니까 다들 이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자신 역시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장난스러우면서도 늘 의지가되던 헹겔,

입에 쓴 약을 먹고 울상을 짓던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리고 이 지루한 땅속에서도 하루하루를 행복하다 여길 수 있도록 해준 친절한 이웃들이 그러했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지금 이렇게 모두의 손으로 한 사람을 죽이게 되면, 우리들은 분명 둔감해지고 말 거예요."

"...!"

당장은 안전해졌다는 이유에 안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만큼이나 둔감해지고 말 것이다.

자신 혼자만의 손이 아닌 여럿의 손이기에 더더욱 마음속 죄책감은 충분히 덜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생명을 두고 저울질한 끝에 있는 것은, 끝나지 않는 가치의 저울질과 늘어나는 이기심 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만약 이후로도 마을에 위협이 닥치면.. 우리는 또다시 하나둘씩 희생양을 만들어가며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려 들겠죠."

이미 정신을 잃은 헹겔의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지며, 지금 만약 그녀였다면 무슨 말을 했을지를 떠올리곤 라챤코는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한 명의 이방인이었을 뿐이었지만. 이후로는 우리들의 아이들일 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어머니일 수도 있어요. 끝내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불신하고, 외면하면서.. 살아남으려고 하겠죠."

자신은..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문제가 생겼을 때, 모두가 힘을 모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어느 누구 하나를 책임을 지워 묻어버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게 정말.. 살아가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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