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85화 (85/137)

〈 85화 〉 14. 내일을 약속하는 사제

* * *

14.내일을 약속하는 사제(3)

군중의 동요는 충분하다.

본능이 불러일으킨 두려움에 갈등하고 있는 이들 모두를 설득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고, 따라서 세레스티아는 지금의 이 틈을 파고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에서 낭비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

"어서.. 이브를 찾아야 해요. 이번 일을 꾸민 자를 지금 그녀가 홀로 상대하고 있을 거예요."

헹겔로부터 위쪽의 상황은 간략하게 전달받았다.

원로들.. 그리고 요람의 주민들.

이미 우리들은 유약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서로의 앞에서 드러내고야 말았으니 이전의 화목하고 평화로운 관계로 모두 잊고 돌아가는 건 힘들겠지만..

적어도, 이 이상으로 상황이 악화되는 것은 아직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는 아직 요람 어딘가에 있을 그 카마엘이라는 자를 어떻게든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 자는 푸르기스 원로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발견하더라도 절대 함부로 접근하지 말고 원로에게 위치를 알리고 지원을 기다리도록 하세요."

"..."

"어서요...!"

세레스티아의 호령에 결국 인파는 불안정하게 뒤흔들리더니 이내 엘프들을 우선하여 주변으로 흩어져나가기 시작한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엘프들을 보며, 수인들도 마지못해 결국은 움직인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든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분명 세레스티아의 말대로 요람 안에 발을 들인 위협적인 침입자를 처리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들이 흩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다 잠깐 헹겔에게로 시선을 돌린 세레스티아는, 그래도 라챤코의 처치 덕인지 그녀의 표정이 이전보다는 한결 나아져 있는 것을 보았다.

다만 이렇게나 심각한 화상이라면 어서 치유를 받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다시 소녀가 업어들고 있던 에단에게로 고개를 돌린 세레스티아는 어느새 흩어져 가는 인파 속으로 그들이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을 보았다.

"... 에단.."

지금 자신은 차마 그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헹겔이 감정적인 판단아래 그를 한 번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은 상황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갑작스레 나타난 적룡교의 대주교.

그리고 그와 함께 전이하여 사라져버렸다는 이비.

"이브... 괜찮은 거니.."

*

"... 헹겔에게.. 치유를 해주는 게.."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 은총을 아껴두지 않으면 분명 당신은 후회하게 될 거예요. 제 조언을 듣는 편이 좋아요."

"..."

조언..

말하는 방식이 세계수와 닮아있다고는 느끼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와는분명다르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정체를 묻는다고 해서 상대가 답해줄 것같지도 않았기에.. 자신은이대로업혀있을 수밖에 없다.

소녀는 계속해서 걸어나간다.

한 번은 요람의 주민들에게,그리고 방금은 자신에게..조언을 빙자한 경고를 한 것이 여태껏 그녀가 말한 전부였다.

그러니 이대로 도착할 때까지는 입을 열지 않겠구나 싶었지만, 의외로 그녀는 얼마 가지 않아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당신에게는 미안하네요."

"...?"

"당신이 고귀한 의지를 보여준 것에 대한 대가로, 저는 오히려 가혹한 운명의 구속을 건네주게 되었으니까요."

나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그녀는일방적으로 이어나갔다.

"하지만 약속할게요. 당신이 그 부끄러움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한 저는 당신을 돕겠어요."

"..."

그리고 그 말까지 마친 그녀는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그곳에 들려있는 건 날카롭게 날이 선 단검 한 자루다.

"...?"

휘익...!

쐐애애액...!!

푸욱­!

그리고 곧 크게 휘두른 팔에 의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그 단검이 어딘가 박혀들어가는 소리가 내게도 방금 막 들려오고,

나는 그제서야 소녀의 어깨너머로 저 멀리 피웅덩이에 끔찍한 모습으로 쓰러져있는 이비와, 원로복을 입은 하이엘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푸르기스 원로...

방금 막 그가 이비를 향해 하나 남은 팔을 내뻗으려던 것을, 실비아의 몸을 빌린 그녀가 능숙하게 단검을 집어던져 저지해낸 것이었다.

"아슬아슬했네요. 저쪽에서 먼저 권능을 통해 간섭해오려 했으니 저 역시도 이 정도는 괜찮겠죠."

그녀가 무언가 더 말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내용이 지금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비..."

나를 끌고 끝내 이비의 앞까지 데려다준 소녀는 드디어 나를 내려준다.

이비의 상태는 멀리에서 본 것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세 곳의신체 절단이이루어졌고, 다행히 잘려나간 신체 부위는 가까이에 원형을 유지한 채 떨어져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출혈이 심각했다.

은총을 아껴두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라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비...!"

눈에 힘이 풀려가는 이비를 깨우기 위해 나는 목소리를 쥐어짜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당장 내 상태보다도 훨씬 심각해 보였기 때문인지 나는 어디선가 힘이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게 용의 저주가 몸을 차근차근 수복해 나가면서 내가 느끼는 착각이라는 것은 알지만, 적어도 이젠 삐걱거리지는 않는 두 팔을 뻗어 고여있는 피웅덩이 위로 늘어진 이비의 두 팔과 다리를 잡아들었다.

잘려나간 신체 부위의 그 애매한 무게감은 속을 불쾌하게 만들어 온다.

"... 에단.. 지금 제가 헛것을 보는 건 아니죠..?"

"지금 빠르게 처치하면 금방 괜찮아질 테니까... 그렇게 당장 죽을 것처럼 말하지 마."

".. 그래도.. 당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짠 하고 나타난 걸요.."

또 이렇게 영문 모를 소리를..

그녀의 그 집착에 가까운 호감의 표현을 난 계속해서 거부하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해왔지만..이런 모습까지 보고서 차갑게 내치는 건 당연히 어렵다.

그녀가 이런 꼴이 된 건... 다름 아닌 나를 위해서였으니까.

"이비, 조금만 참아. 금방 치유해 줄 테니까.."

"... 이브라고 불러줘요."

"너.. 이런 상황에서도..."

잘려나간 상처 부위의 이물질들을 제거하기 위해 먼저 정화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괴할만큼이나 깨끗한 절단면이었기에 치유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다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게 겉으로도 티가난다.

안그래도 하얀 피부 탓에 피가 빠져 창백해진 얼굴로 이비는 내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래.. 이브. 어렵지 않아. 그러니까 더 듣고 싶으면 정신 차리려고 노력해."

"... 헤헤.."

사선으로 이루어진 탓에 가장 큰 절단면을 가진 다리 쪽을 먼저 뼈와 방향을 맞추고 신성한 기운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이제 막 차오르기 시작한 은총을 쥐어짜내는 것이었던 만큼 심장이 괴롭게 조여왔지만, 당장은 눈 한 번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치유가 끝날 때까지 그녀가 버텨줄 수 있을지는 솔직히 나도 자신이 없다.

하지만.. 해내야만 한다.

"윽...! 흐윽..."

빛이 충분히 상처 주변으로 감도는 것을 보고 잘려나간 다리를 힘주어 밀어붙이자 당연히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온다.

뼈와 살이 이어 붙고 끊어졌던 신경이 다시 이어지게 되면서 고통이 배로 몰려올 것이었다.

"이브...! 정신 차려..!"

".. 아흑... 윽...!"

고통에 시야가 핑그르르 돌아가고 있는 게 그녀의 표정에서부터 보인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당장 시간은 촉박했다.

그녀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발끝이 함께 움찔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곧장 나머지 두 팔을 해결하기 위해 치유를 강행했다.

"젠장.. 뭐라도 물릴 게...."

그녀가 고통에 신음을 참는 모습이 안타까웠기에 입에 뭐라도 물려줄 게 없는지를 찾았지만 마침 적당한 게 주변에 떨어져 있을 리는 없다.

지지지직...!

지직..!

그런 나를바로 옆에서지켜보더니 옷자락을 찢어내 두껍게 겹쳐 건네주는 소녀.

".. 고마워."

"..."

은은한 빛을 흩뿌리는 이멀뚱한 소녀의눈동자는 어서 내 책무를 다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팔 앞으로 내밀어. 한 번에 하는 게 너한테도 좋을거야."

"이브..."

"하아.. 그래, 이브. 이거 물고, 한 번만 참는 거야. 알겠어?"

끄덕끄덕.

입에 천을 물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비를 보며 나는 그녀가 내민 두 팔의 절단면에 방향을 맞추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 ...!!!"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았을 때의 반응이다.

차마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이내 입에서 힙겹게 두꺼운 천을 뱉어내고 쇳소리와 비슷한 비명을 삼키고 뱉어내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두 팔은 은총의 치유에 제자리를 찾아 단단하게 붙어있었고, 더 이상의 출혈은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이브.. 잘했어. 잘 버텼어..."

피와 살이 튀는 전장에서 살아온 게 아닌 이 엘프에게는 정말 크나큰 고난이었으리라.

정말 잘 버텨주었다.

너무 심한 고통으로 정신에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아 그대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육체의 고통에 그리 익숙하지도 않을 그녀가 여전히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붙어있는 자신의 팔을 보며 손가락을 까딱이며 움직여본 그녀는,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두 팔에 반응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번 물속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이마 위로는 잔머리 몇가닥이 들러붙어있고,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얼마나 그녀가 힘겨웠는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 늘어지게.. 한숨 자고 싶어요... 악몽 없이.."

"그래, 이젠 괜찮아."

"... 그러니까... 옆에.. 있어줄 수 있죠....?"

"..."

그 말까지를 내뱉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은 이비를 보며 나는 대답 대신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다출혈로 여전히 위험한 고비인 그녀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이대로 곁에 남아 치유를 계속해야만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나와 이비를 향하고 있는 이 불길한 시선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

"떠나기 전 이렇게 잠시 만나는군요. 에단."

"...?!"

한쪽 어깨와 하반신이 떨어져나가고 상반신의 절단면에서는 내장까지 징그럽게 흘러내려 있는 그였지만 아직도 끈질기게 그 목숨을 붙잡고 있었다.

다만 그의 검붉게 물든 두 눈동자와 이 불길한 분위기는.. 내가 기억하는 이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푸르기스 원로..? 아니... 너는 누구지?"

"... 그럼 다시 찾아올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발버둥쳐 보시길..."

툭...

자신의 할 말만 마치고 징그러운 웃는낯으로 고개를 떨군 푸르기스 원로는 더는 그 입밖으로 숨을 내뱉지 않는다.

그의 입안에 고여있던 핏물이 입가를 흘러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냈을 뿐이다.

털썩..!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소녀의 눈동자에 서려있던 은은한 빛 역시 사라지며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런 소녀의 몸을 가까스로 붙잡아 바닥에 눕혀준 나는 그녀가 단순히 잠에 들었을 뿐이라는 사실에 재차 안도하며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장 내 곁으로쓰러진 이들이 셋.

"..."

저 멀리 뒤늦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들의 기척을 느끼며, 이 상황에 대해 내가과연잘 설명해 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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