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16. 분기점,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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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분기점, 선택(2)
"자, 받아요."
이비가 내게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작은 가죽 주머니다.
이미 단단히 묶인 매듭을 당기는 것으로 손쉽게 열고 닫을 수 있는 편리한 주머니이다.
"... 이건?"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주머니라는 건 보고 있기에 알고 있었지만, 비어있는 주머니였기에 번거롭게 물은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엉거주춤 손을 들어 올리다 만 내게 일단은 그 주머니를 쥐여주며 대답한다.
"이전의 그 족쇄처럼 안쪽으로 마나나 은총이 닿지 못하게 마법처리를 해둔 독주머니에요. 가까운 품 속에 지니고 다니더라도 금방 검은 피를 만들어 낼 수 있겠죠."
확실히, 은총의 영향으로 피가 독기에 잠식되는 것이 억제되고 있었으니 맹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굳이 내가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이걸로조금은수고가 줄었다.
이제 만들어낸 검은 피를 무기의 날끝에 조금만 바르는 것만으로도 성가신 상대에게 대처할 수 있겠지.
"그래.. 잘 쓸 수 있겠어."
"고맙다는 인사는요?"
"..."
이쪽으로 귀를 들이밀어 오는 이비를 짧은 고민 끝에 밀어내지 못하고, 결국에는 작은 목소리로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 고맙다."
"에헤헤.."
하룻밤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다시 그 특이한 하얀 가운을 걸치고 평소의 귀여운 구석 없는 성가신 엘프로 돌아온 이비는..
딴에는 부끄러운 기억을 전부 말끔히 잊어버린 듯이 연기하고는 있었지만 은발 사이로 튀어나온 뾰족한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 건 숨기지 못하고 있다.
"이 보석은.. 마나 수정인가?"
주머니를 살피던 내가 매듭의 끈에 장식처럼 달려있는 감람 빛의 수정을 가리키자, 이비는 필요 이상으로 움찔하고는 다소 변명 같은 대답을 늘어놓는다.
"아, 아아. 그건 주머니의 마법 처리를 반영구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거예요. 그러니까 함부로 떼어버린다거나 하면 안 되니까요..!"
"...?"
이비의 태도에서 어색함을 느낀 내가 조금 더 캐묻고자 했지만, 그녀는 간신히 화제를 돌리는 데에 성공한다.
"아무튼, 당장은 쉬면서 몸을 회복할 생각이에요. 누구누구 씨가 밤새도록 잔뜩 무리를 시킨 바람에요."
"..."
저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연한 홍조를 띠는 두 뺨을 숨기지는 못한다.
노력을 봐서라도 넘어가 주도록 할까.
"으흠, 흠.. 농담이에요. 헹겔 님과 셀렌 님에게 해야할 말도 남았으니 에단을 찾아가는 건 그 이후가 되겠네요."
"일단은 바실리카로 돌아가 기다리겠지만.. 어떻게 찾아오려고?"
"우후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에단이 어디에 있든 반드시 찾아내 보일 테니까요."
이상한 데에서 열의를 불태워도 곤란한데 말이지.
"아.. 잊을 뻔했네요. 셀렌 님이 에단을 찾았어요."
"세레스티아가?"
"네, 묘목의 건도 있고.. 에단에게 따로 전할 말도 있나 봐요. 그러니 느긋하게 다녀오세요. 저는 마을 입구에서 실비아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야, 세계수의 씨앗에서 싹을 틔우는 방법을 나는 모르는 만큼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려는 걸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날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과거 이곳에 처음 방문했을 때, 레베카가 미스틸테인을 얻어내며 함께 허락받았던 금서고의 출입이었다.
"..."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금서고에서 당신은, 그 너머의 여정에 있어 바라지 않지만 그럼에도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것이.. 제 마지막 조언이에요.'
처음 세계수와 만난 그때에, 그녀가 내게 해준 세 가지 조언 중 아직 알 수 없었던 마지막의 것이었다.
나조차도 잠시 잊고 있었고그녀도 그 가능성을 희박하다 여겼던 모양이지만, 어떻게든 도달하게 된 모양이다.
직접 나서는 일은 없었다지만 벌여놓은 짓이 있던 만큼, 엘프 원로회는 세레스티아의 결정에 대해 크게 반대할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라.. 본디 신탁의 마법사들에게만 허락되던 금서고의 출입이 내게도 떨어지게 되었다.
이걸 보상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에단,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금서고 안에서는 세 가지 중 단 하나의 대답만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이렇게 절 위해 원로회 수장이라는 자리를 마음대로 이용해도 괜찮은 겁니까?"
"괜찮..은 건 아니지만, 어머니께서는 제게 그 권한을 맡기셨으니까요. 제 마음이 그리 하기를 바라고 있는걸요."
"..."
자신의 풍요로운 가슴께에 슬며시 손을 얹고는 상냥한 눈빛을 반짝거려 오는 그녀가 부담스러워 괜히 시선을 돌렸다.
"... 하나의 대답이라.."
그녀의 설명대로라면 들어가서 바로 보이는 왼쪽으로부터 각각 과거, 현재, 미래의 이름이 붙여진 책 세 권이 놓여있다고 한다.
과거의 서는 세계수가 현재까지 축적한 아케라의 모든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소테르가 태양을 가지고 내려온 그때부터의 역사가 말이다.
현재의 서는 유일하게 세 번의 정형화된 질문을 통해 각각 지식의 형태로 그 답을 전해들을 수 있으며,이비는 이를 통해 내게 불의 계약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서는 책을 펼친 자의 미래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세 가지 사건들을 알려준다고 한다.
하지만 한번 알게 된 미래는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니, 함부로 펼칠만한 것은 아니었다.
레베카는 그때 금서고에 들어가 어떤 질문을 하고, 또 어떤 대답을 들었을까.
금서고에 다녀온 그녀는 그 안쪽에서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으니 지금에 와서는 한 번 정도 물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에단...?"
"아.."
어느새 세레스티아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연한 금빛의 머리칼에서 향긋한 꽃내음을 흘리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 만큼 생각에 빠져있었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기회였기에 세 권의 책 중 무엇을 고를지에 대한 것은커녕 아직 질문조차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도착했답니다."
지혜의 줄기를 따라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왔지만, 그렇다고 해봐야 거대한 세계수의 허리에나 겨우 도착했을 정도다.
내려다보이는 요람의 풍경은 곳곳이 수정들로 밝혀져 있었음에도 그리 아름답지 않다.
수인들의 난동으로 몇몇 부서지고 타버린 집터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칙칙한 지하의 어둠은 미약한 수정 빛으로는 다 밝혀낼 수 없었으니 말이다.
".. 쓸쓸한 풍경이죠?"
"..."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넌지시 건네진 그 말에 나는 금방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곧 괜찮다는 듯 한 번 웃어 보이곤 내 옆에 서서 함께 그 풍경을 내려다본다.
".. 아무래도 지하의 요람이니까요."
바깥이라고 다르지는 않겠지만..이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기로 했다.
"언젠가는, 어머니도.. 저희도 따스한 태양 아래에서 안심하고 낮잠에 빠져들 수 있는 날이 오겠죠?"
"... 엘프는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종족이니까요."
굳이 몇 발 물러선 내 대답에도 그녀는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슬슬 준비되셨나요?"
세계수의 안쪽으로 향하는 금서고의 입구는 누군가에 의해 뚫린 커다란 구멍과 함께 탄 자국이 주변으로 즐비해 있다.
사람 하나 둘은 손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었던 만큼 그 앞을 지키고 서있던 엘프들은 세레스티아를 보자 마치 한 몸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들고 있던 장병기의 날을 아래로 비스듬히 내린다.
"저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요."
끄덕.
한차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그대로 망설임 없이 금서고의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선택의 때가 왔다.
"부디, 지혜로운 선택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