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16. 분기점,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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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분기점, 선택(1)
태초에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첫 번째 대수는 일생의 종말과 일국의 멸망으로 토양에 축적된 지식을 얻었으니, 그녀의 지혜로운 조언은 가히 예언과도 같아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본디 아들 딸의 물음에 대답을 게을리한 적 없는 그녀였으나, 지식을 지식으로써 받아들이지 못한 어리석은 아이들의 비참한 말로를 지켜보는 것이 괴로워 자신의 입과 혀를 대신할 세 권의 책을 남기고,지혜의 눈을 하사한요정의 수장에게그 관리를 맡겨가벼이 진실에 닿지 못 하게 하였다.
과거, 한 명의 마법사가 과거의 서에서 세계의 이치를 깨달았고.
현재, 한 명의 요정이 현재의 서에서 지식을 훔치곤 어둠에 감추어진 진실을 밝혀내었다.
이제, 한 명의 사제는 미래의 서에서 앞으로 걸어갈 가시밭길을, 자신의 운명을 엿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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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작은 체구이지만 분명하게 단련된 고양이 수인의 매끈한 몸은 유연하게 굽이치며 눈으로 쫓기도 힘든 공격을 손쉽게 피해낸다.
하지만 언제 이런 수를 익혔는지, 거슬리는 기척에 그녀가 고개를 들자 날아들고 있는 세 자루의 단검이 그 날카로운 날끝을 번쩍이는 게 보인다.
여태까지 맨손으로도 여유롭게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챙! 채앵!
외팔 견갑에 감추어져 있던 단검이 스르륵 흘러내려 손아귀에 잡히자마자 양쪽 어깨를 향해 날아들고 있던 두 칼날을 힘껏 쳐냈지만 나머지 하나의 날끝이 벌써 코앞까지 다다라 있다.
"크앙!"
"...!!"
하지만 놀랍게도 그 찰나의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틀어 날아가는 단검의 검자루를 이빨로 깨물어 잡아채는 묘기로 승기를 잡았다고 기대한 소녀에게 짙은 패색을 선사해 준다.
"퉤."
챙그랑!
아무리 같은 수인이라 하더라도 흉내 내기 힘든 동체시력과 반응속도, 그리고 무엇보다 침착함이다.
강자의 여유라고도 할 수 있겠다.
"...졌어."
숨겨둔 비장의 수까지 그녀가 여유롭게 막아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힘없이 두 팔을 늘어뜨리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단검들을 바라보는 실비아에게 헹겔은 오히려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쳐준다.
엘프 경비 둘을 실비아가 혼자 쓰러뜨렸단 말을 듣고 놀랐었는데, 어느새 실력이 는 건지.. 아니면 망설임이 없어진 건지.
짝. 짝. 짝.
"투척에 재능이 보인다냐..으흠, 큼.근접 공격 이후에 바로 물러나면서 추적을 저지하기 위해 단검을 흩뿌리는 연계도 깔끔했고... 냥."
오랜만에 이렇게 몸을 움직여 주니 복잡했던 머릿속도 상쾌해지고 긴장도 풀려 마음에도 여유가 생겨난 모양인지 원래의 냥냥거리는 말투가 불쑥불쑥 튀어나왔기에 헹겔은 괜히 낯부끄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정작 실비아는 그녀의 말투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 하지만, 다 막혔는걸."
"아무래도 위력이 부족하다냥. 그래도 이렇게 견제용으로 시간을 한 번 버는 건 꽤 의미가 크다냐. 방금만 하더라도 네가 물러설 때 그대로 쫓아가 호흡을 뺐어온 다음 엉덩이를 걷어차 줄 생각이었으니까... 냐앙."
"..."
꼬리를 말고 두 손으로 소심하게 엉덩이를 가리는 실비아를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웃은 헹겔은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발로 튕겨 소녀에게 간단히 건네준다.
노력하는 자세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전투에 있어 아무래도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열에 한 가지 정도는 누구나 잘하는 게 있다는 말이 맞았다.
물론 하필이면 그게.. 아직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가르쳐 준 적 없는 투척이라는 데에는 다소 김이 새기는 하지만.. 머리도 좋고 요령도 좋은 편이니 가진 재능 위주로 실력을 키워나간다면 노력이 배신하는 일은 그래도 금방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로 작별이구냐아.."
움찔.
"..."
소녀의 얼굴에는 딱히 티가 나지 않았지만, 한차례 움찔거리고는 추욱 늘어지는 두 귀와 꼬리는 숨길 수 없는 법이다.
그 깜찍한 모습에 헹겔의 입가에는 잔뜩 미소가 걸린다.
"너무 성급해도 안된다냥. 누구든 하루아침에 강해지는 사람은 없으니까냐. 알려준 대로 꾸준히 몸을 단련하고, 빨리 크려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 응."
사실, 실비아까지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지만.. 요람의 바깥은 어리다고 해서 상황을 봐줄 만큼 상냥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무리를 해서라도 따라가고 싶지만, 지금 자신은 요람의 수인들을 돌보아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 멀리 나가지는 않겠다냥. 이건, 자. 선물이다냐."
헹겔은 들고 있던 단검을 실비아에게 건네준다.
검자루와 칼날까지 어두운 밤하늘을 머금은 것처럼 새까만 단검이다.
그녀의 집에 있는 수많은 무기들이 하나같이 먼지가 쌓여 날이 무뎌진 것에 반해, 당장 어제라도 날을 간 것처럼 말끔하게 관리가 되어있다.
검은색의 칼날을 빼면 크게 유별나지 않은 투박한 형상의 단검이었지만, 헹겔에게는 집에서조차 벗지 않는 외팔 견갑과 마찬가지로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평화에 찌든 이곳, 요람에서는 하루하루 먼지가 쌓이는 것 이외의 쓸모가 없으니.. 소녀의 손에서 제 쓸모를 다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잃어버렸다고 했다간 크게 화를 낼 거니까냥."
헹겔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었던 만큼, 정말 받아도 되는지 망설이던 소녀는, 그녀의 검고 하얀 신비한 두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향하는 것을 잠시 마주 보고 서있다가 끝내 두 손을 내밀었다.
"... 응, 선물.. 고마워."
조심히 그 단검을 받아들고 두어 번 검자루를 쥐어본 실비아는 자신의 작은 손에도 잘 들어맞자반짝이는 눈빛으로 날끝을 세우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분명 헹겔이 방금 자신이 던진 단검을 이걸로 튕겨내는 걸 봤지만, 조그마한 흠집하나 생기지 않은 게 얼마나 단단한지 알 것 같다.
그런데도 쥐는 감에 거슬리는 게 없을 정도로 가볍기까지.
투둑, 툭.
실비아가 선물받은 단검을 구경하는 동안 헹겔은 견갑 아래 손목 부근에 둘러 고정해두었던 가죽 칼집까지 빼내, 언제라도위험할 때 꺼내들기 쉽도록소녀의 가느다란 허벅지 부근에손수 달아주곤 여러 감정이 섞인 눈빛을 숨기고 이 기특한 소녀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설마하니 이 단검을 선물할 마음까지 들게 될 줄이야..
처음 자신에게 싸움을 가르쳐 달라던 당돌한 소녀의 모습이 떠올라 비식 웃음이 나왔다.
어린 나이에도 실비아가 품은 올곧고 상냥한 마음씨를 자신은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이번 일에 깊게 휘말려 크게 흔들릴 법도 했지만 오히려 자신보다도 어른스럽게 상대를 용서하고, 또 위로하는 모습에서는 오랜 시간 메말라 있던 자신의 마음속에 동경이라는 감정이 조그맣게 피어날 정도였다.
그러니... 이 소녀의 앞길에, 부디 넘을 수 있는 역경만이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럼 그 높은 고개를 넘을 때마다, 강해져있는 자신이 있을 테니까.
"..."
별다른 말은 더 없었지만, 실비아는 이곳에 있는 동안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챙겨준 헹겔의 상냥한 마음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더 많은 걸 가르쳐주지 못해 미안한 모양이지만, 이 귀한 선물 외에도 이미 자신은 그녀에게 정말 많은 걸 받았다.
다른 평범한 수인들과는 분명히 다른 비범한 무언가가 느껴질 만큼이나 그녀의 강함은 대단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신체능력의 우월함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한 발자국 앞에 서서 자신을 성실하게 가르쳐 주었다.
분명.. 그녀에게도 마찬가지로 정말 좋은 스승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 덕분에 자신은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을 더욱 확실히 하고 그곳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아직 그녀가 허락한 것은 아니었어도 이렇게 부르고 싶었다.
"다녀올게.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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