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15. 수면에 비친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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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수면에 비친 달처럼(9)
어느 순간 잠에 들었던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떠진 눈앞으로는 곤히 잠들어 있는 엘프의 얼굴이 가까이에 놓여있다.
"..."
그 고운 얼굴은 내 욕구에 잔뜩 시달린 피로로 다소 지저분해져 있었지만 이마저도 예쁘다고 느껴지는 이기적인 미모가 아닐 수 없다.
혹시나 그녀를 깨울까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 뒤늦게 내가 누워있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으며 작게 앓는 소리를 낸다.
"으응..."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뻗어진 손이 그녀의 은발을 쓰다듬자, 다시 풀어진 표정으로 편안히 잠에 든다.
은은한 빛 아래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나신 위로 불긋하게 새겨진 내 흔적들과, 그녀의 몸 위로 사정한 그 모습 그대로 말라붙어있는 허연 정액줄기들은 괜히 내 하반신을 움찔거리게 만들었지만..
아무래도 많이 하긴 한 모양인지 금방 또 곤란하게 서버리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그녀가 아픈 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러모로 무리를 시켜버린 모양이라, 이대로 일어날 때까지는 방해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비에게이불을 덮어주고, 벗어두었던 사제복을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비교적 상쾌한 호수의 공기가 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가며 시원한 느낌을 준다.
"하아.."
얼마나 행위에 빠져있었던지, 서로의 땀과 체액이 뒤섞인 진한 향으로 집안을 가득 채워버린 모양이다.
"..."
주머니를 뒤적여 보았지만 비어있는지 가벼운 감촉의 연초갑만이 손끝에 걸린다.
그래도 혹시 몰라 꺼내보자 다행히도 조금 구겨진 채 구석에 기대어있는 마지막 연초 한 대가 그 귀한 모습을 드러낸다.
방안의 환기를 위해 문틈을 조금 열어두고 마당에 늘어진 수많은 화분들과 돌담을 지나온 나는 호수가 잘 보이는 위치의 돌담에 슬쩍 기대어 연초를 입에 물었다.
"후우..."
연초의 연기가 뿜어져 올라가는 걸 흩어져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의미 없이 좇았다.
그렇게 한 동안을 머릿속으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며, 이 조금은 몽롱한, 평화로운 여운을 즐길 수 있었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하게 저질러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 곧장 그 앞으로 놓여있었던 만큼, 나는 입술 가까이 타들어간 연초를 미련 없이 뱉어내고는 불씨를 짓밟아 꺼뜨렸다.
이비와 이런 관계가 되리라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억지 아닌 억지에 응해 분위기를 타버리고야 말았다.
이젠 그녀가 따라오는 걸 막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정말이지.. 끝까지 나를 곤란하게 하는 성가신 엘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입안으로 중얼거리는 그 불평과는 다르게 내 입가에는 작게 웃음기가 머물러 있다.
늘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듯 하던 그녀가 침대 위에서는 그야말로 숙맥이 되어 처녀 다운 모습을 보여준 게 여전히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행위로 즐거움만이 남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나에 대한 그녀의 진심 어린 신뢰를 느낄 수 있었던 건 분명하다.
첫 사정 이후로도 내 남성을 꼭 물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그녀의 집착 어린 속살 탓에 몇 번을 더 안에 사정해버려 그때마다 성가신 뒤처리를 해야했지만.. 슬슬 그녀의 체력이 다 떨어졌을 즈음에는 그래도 제때 빼내어 그 새하얀 살결 위로 성욕의 덩어리들을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었다.
"이런.."
지난밤을 떠올리니 괜히 낯이 후끈거리는 게, 나도 어지간히 분위기에 이끌려 그녀를 마음가는대로 범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내 요구를 거절한 번 하지 않으며 순순히 따라주는 이비의 모습은 기특하기도, 또 평소와는 색다른 느낌도 들어.. 꽤나 만족스러운 하룻밤이었다.
"..."
호수면 위로 달 대신 비추어진 수정의 빛무리들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수면 위에서 말끔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저 아름다운 빛의 형상은 분명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큰 파문을 일으켜 일렁거리며 흩어져 버리고 말겠지만,
끝내 저들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포르투나의 강줄기는.. 결국 하나로 돌아온다."
속담과도 같은 그 말을 중얼거린 나는 호수면에서 시선을 떼고, 지하의 천정에 별처럼 박혀있는 수정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맺어진 불의 계약과, 바실리카에서의 내 실책.
분명하게 나를 노려오고 있는 적룡교와 스스로를 대주교라 칭하는 규격 외의 괴물들.
내가 이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있는 와중에도 위험에 처했을지 어떨지 모르는 바실리카의 주민들, 딜런... 그리고 다나.
그 외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들은 내 머릿속의 한자리씩을 차지하고는, 이 여유로운 시간을 사치라 치부하며 밀어내고 있다.
"실비아는.. 잘 하고 있으려나."
헹겔에게 맡겨보낸 그 아이가 어떤 결과를 얻어, 그리고 어떤 표정으로 내게 돌아올지 또다른 근심이 어린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분명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괜찮지 않더라도 그때 실비아와 함께하며 그 몸을 빌려 나와 이비를 구해내는 차선의 결과를 이끌어낸 그 의문의 여성이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하는 다소 무책임한 생각도 있었기에, 나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이비의 작은 나무집으로 돌아왔다.
호수 옆의 낮은 돌담과 이 작은 나무집은 이제 와서 보니 꽤 운치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끼이익..
"... 돌아왔어요?"
".. 아, 이브. 내가 깨운 건가?"
"말도 없이 떠나버린 줄 알았잖아요.."
침대 위에서 처량하게 주저앉아있던 그녀의 모습에 조금은 긴장한 채로 문을 닫고 가까이 다가가니 시무룩하게 늘어진 두 귀가 보인다.
방심했다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집안 공기가 조금 답답해서."
"... 아, 그.. 그렇죠?"
그럴싸한 변명이 생각나지 않았기에 그냥 던진 말이었지만 그녀는 내 말에 코를 킁킁거리더니 집안에 여전히 빠지지 않고 질척거리고 있는 음란한 냄새에 홍조를 띄워올리곤 이불을 꼭 끌어안는다.
어째 관계를 맺기 전보다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에 흥분해버릴 뻔했다.
"아, 아무튼... 일단 돌아와요."
"돌아왔다만..?"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스으윽..
몸을 가리기 위해 끌어안고 있던 이불자락을 슬쩍 들어 보이며, 자신의 좁은 침대 위를 가리킨 이비는..
"여기에.."
"..."
내게 자신의 옆으로 어서 돌아오라는 귀여운 부탁을 해 온다.
인형이 없으면 잠들지 못 하는 어린 아이도 아니고...
"어째 응석이 는 것 같은데."
"...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제 몸으로 그렇게나 잔뜩 즐겨놓고는.."
".. 꼭 나만 즐긴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네가 얼마나 울부짖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나봐?"
"우으으.."
스윽... 스으윽..
서로의 대화 이외에는 조용하기만 한 방 안에서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기꺼이 요구대로 침대 위로 올라와 그녀의 옆에 가까이 몸을 누였다.
"에헤헤.."
이제서야 만족했다는 것처럼 내게 가까이 들러붙어온 그녀는.. 주인과 오랜만에 만난 소동물의 그것과 비슷한 반가운 표정으로 가슴께에 머리를 잔뜩 문질러 오고 있다.
고운 은발이 살랑거리며 간질이는 거야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아직 이 이불 아래 그대로 헐벗은 몸이었던 만큼, 어중간하게 이어졌던 자극이 여기에 와서 끝내 크게 불어나고 만다.
"으응, 에단.."
"왜 그러지?"
"그... 닿고 있어요.."
"..."
아무래도 예정된 출발시간이 조금 늦어질 것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