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20. 투기장에 흐르는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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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투기장에 흐르는 피(2)
물자가 터무니 없이 부족한 저항군의 몇 없는 침상이지만 이것들은 모두 병세가 심각한 이들을 위해 지하실의 한구석 천막 너머에 마련되어 있었다.
"쿨럭.. 콜록, 컥! 쿨럭..!"
이들 중 대부분은 은밀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저항군의 눈과 발이 되어주기 위해 오염지역을 가리지 않고 지나다니다 역병에 걸린 이들이었고, 그렇기에 몇 없는 침상이라도 양보한 것은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일 것이다.
물론 이들 모두는 자신들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은 것은역병이 심각한 곳일수록 제국 병사들의 감시가 허술했기 때문이겠지.
"콜록.. 거흑, 커흑, 그르륵..."
피와 가래가 목 아래 뒤섞여 끓는 소리를 내어가면서도 삶의 끈을 붙잡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이미 역병에 집어삼켜져 추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들이 잘못되었다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조금만 참으세요. 상태는 분명 호전되어가고 있습니다."
"으그그그륵... 사제.. 님, 콜록.."
막 발작을 일으킨 환자의 어깨를 침착하게 붙들고 그대로 치유를 행하는 사제의 뒷모습이 상당히 낯이 익다.
얼굴을 본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그를 낯익다 여기는 이유는 아마 그의 왜소한 체구로 인해 조금 커 보이는 저 사제복 때문일 것이다.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던 그 젊은 사제,
그 이름은 분명..
"저분은 호세르 사제님이십니다. 어찌 보면 저희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신 거지만.. 그날 이후로 이렇게 쉬지도 않고 저희 저항군의 부상자나 역병 환자들을 치유해 주고 계십니다."
"잔느 님, 오셨군요! 이곳에는 어쩐 일로... 그것도용사 님과 함께..아?"
그래, 호세르.
그런 이름이었다.
환자를 진정시키고 나서야 뒤를 돌아보았다가나를 발견하고 놀라 치켜떠지는 순박한 눈매를 보니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사제는 이 자 하나뿐인 걸까?
"이렇게 다시 보는군. 이곳의 사제는 너 하나뿐인가."
".. 아, 그렇습니다..! 설마하니 에단 님께서 와주셨을 줄은..."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왜 거짓말을 하고 있었지?"
그는 서론 없이 이어진 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린다.
"그건.. 어떤 말씀이신지.."
당연히 당황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는 그였지만, 내 질문에 답하는 것이 그리 어려울리도 없을 터였다.
숨은 뜻이 있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의 질문이었으니까.
"내가 보기에 이들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너는 이들에게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고 말하며 의미 없는 치유를 계속하고 있었잖아. 내 말이 틀린가?"
"..."
호세르는 방금까지 자신이 치유하고 있던 환자들의 모습을 천천히 살핀다.
"쿨럭! 으그.. 그르... 커흑, 콜록..!"
이젠 제대로된 색을 띄는 살갗이 남아있는 곳을 찾는 것이 더 힘들 정도로 피부의 변색이 진행되었고, 아예 검게 썩어문드러진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진물과 악취는 가까이 가지 않아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천막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일개 사제인 그가 한 명당 다섯은 달라붙어도 상태의 호전을 장담할 수 없을 테지만 그는 혼자서 이들 모두를 맡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명운에 죽음이 짙게 드리운 이들에게 희망을 계속해서 붙들게 하는 것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기에 그는 다가올 결말을 알고도 포기하지 않은 것인지, 그에 대한 의문이었다.
".. 아무 의미 없는 치유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의미지?"
어두운 표정으로 환자들을 살피던 그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향해온다.
"에단 님께서 이곳에 와주셨으니까요."
"..."
예상 외의 대답이었다.
끝끝내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 이들의 앞에는 그의 말대로 내가 서있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결국에는 그가 포기하지 않았기에 모두를 살리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 것이라고도 지금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올 거라는 걸 그가 미리 알고 있었을 리도 없으니 어디까지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말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뿐인 이야기지만,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 이야기가 그렇게 될 수도 있나... 뭐, 우선 쉬고 있도록 해. 얼굴에피로가다 드러나 보이고 있으니까."
푸석푸석해진 피부, 눈 밑으로 내려앉은 그늘과 갈라진 입술.
사제로서라도 지적해야할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사제는 본인의 건강 역시도 신경쓰지 않아서는 안된다.
자신이 살아야 환자도 살릴 수 있는 것이니까.
물론, 눈 앞의 이들을 살리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이 젊은 사제에게 그럴만한 여유는 없었던 모양이지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긴장이 풀리고 여태껏 무시해온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일까. 그 자리에서 쓰러질 듯 비틀거리다 벽면에 기대어 스르륵 주저앉은 호세르는 내가 그들을 치유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 보지도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역병환자들 사이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린 그의 모습이 꼭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마음 한구석이 괜히 불편한 기분이다.
우토의 아래에 있으면서도 저렇게나 닮지 않은 모습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잔느, 저 사제를 밖으로 옮겨줬으면 하는데."
"제가 하겠습니다."
그녀의 곁을 늘 지키고 서있던 덩치큰 사내가 묵직한 목소리로 내게 대답을 대신하고는 성큼성큼 다가가 호세르를 한 팔로 가뿐히 들어올린다.
물론 그들이 천막밖으로 나가기 전 정화의 기운으로 역병을 지워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이제 이들의 차례로군."
호세르가 환자들에게 한 거짓말을 끝내 희망이 되게 한 건 결국 나였지만, 내 차례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의 의지 덕분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행동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치기 어린 마음이 드는 것에는 비식 한숨이 새어 나오고 말았지만..
문득, 이 절망스러운 현실 속에서 거짓말이라는 건 그에 비하면 오히려 상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도 곧 나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의미 없는 상념이겠구나 싶었기에 이만 이 가엾은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 당신의 자애로운 빛으로, 길 잃은 이들에게 나아갈 앞길을 밝혀주기를.."
당장 신성문을 읊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 것조차 주변 근육이 아려올 만큼 몸을 움직이는 것은여전히 힘겨웠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기운넘치는 것이 있다면 이 은총일 것이다.
과연 용사일행의 사제답다는 감상이 뒤에서 수군거리며 들려왔을 만큼이나 밝은 빛이 천막을 새어나가 지하실을 가득 메우며 환자들의 몸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정화는 그들의 몸에 쌓인 독기를 걷어내고, 치유는 섞은 살덩이를 밀어내고 그 아래로 건강한 새 살이 돋아나게끔 한다.
"허어어어..."
"으허어.."
치유가 가져다주는 재생의 고통과, 정화가 가져다주는 전에 못느껴본 개운함에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는 이들은 그리던 희망을 맞이하여 환희로 몸을 들썩이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미 뼛속 깊숙이까지 괴사가 심각하게 진행된 곳까지는 아무래도 재생시키는 것은 힘들다.
한 명의 젊은 사제가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붙잡고 있었던 덕분에 중요한 장기의 손상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게.. 용사일행의 사제가 받은 축복이군요."
"..."
축복, 분명 귀에 거슬리는 말이었다.
또한 그의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노아의 목소리는 내 반발심을 잠재우고, 오히려 못 들은 척 이미 진작에 끝난 치유를 이어나가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에단 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후우.."
아무래도 은총을 이용하여 치유따위를 행하는 데에도 지장은 없어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부탁해 온 것이었기에 마음에도 없는 한숨을 작게 내쉰 나는 진작에 쓰임을 다한 치유의 기운을 가볍게 흩어내고 그를 바라보았다.
"에단 씨가 일전의 싸움으로 당장 거동이 불편하신 건 알고 있지만.. 부디 따라와 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비장한 표정으로 서있는 용사가 있었고, 내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외의 대답이 있을까 싶기는 했지만 일단은 묻기로 했다.
"네 말대로 당장 이런 몸으로는 그다지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사안이겠지?"
"사실, 도망친 그 자가 어디로 향했을지 짐작가는 장소가 있습니다."
"... 지크프리트가?"
노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한곳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흔들리는푸른 눈동자는 그의 초조함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가 저렇게 느끼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게분명하다.
"이미 아시겠지만 순혈자인 그의 힘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합니다. 하지만 붉은 용의 권능은 그가 생명체로서 지닐 수 있는 힘을 아득히 뛰어넘을 수 있게끔 만들어 주었죠."
"..."
놈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내 심장을 손에 쥔 채로 이렇게 말했었다.
자신의 권능으로 나를 집어삼켜 주겠노라고.
"그는 이미 동부지구로 향했을 겁니다. 그곳에는 그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요."
"동부지구에 뭐가 있지?"
놈이 원하는 것.
앞서 말한 놈의 권능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더 많은 피.."
그리고 이어진 노아의 중얼거림은 내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피?"
"잔느 님이 알아낸 정보대로라면 동부지구의 투기장에는 끌려간 수많은 주민들이 수용되어 있다고 합니다."
"... 놈이 그곳에서 힘을 회복할 거라고..?"
힘을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더 물을 필요도 없다.
그는 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다만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을 뿐이다.
"그래서는 저항군이 황제에게 맞설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 겁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이들의 가족이기도, 연인이기도, 친우이기도 한 이들이 있고 이들 중 태반은 끌려간 그들을 구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으니까요."
"가둔 건 황제이니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겠지만.. 놈을 상대로는 병사가 몇이 있건 큰 의미는 없겠지."
불합리한 폭력 그 자체인 놈을 막을 수 있는 이를 당장 떠올려 봐도 고작해야 내 눈앞에 서있는 노아와, 높은 탑에 스스로 유폐된 마법사. 이렇게 둘 뿐이다.
만약 놈을 지금 막지 못한다면 저항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게 되는 것은 물론 놈이 이전보다 더 강해진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게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에단 씨,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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