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19화 (119/137)

〈 119화 〉 20. 투기장에 흐르는 피

* * *

20.투기장에 흐르는 피(3)

처음으로 눈을 떴던 방 안으로 다시 돌아와 벌써 그 위로 먼지가 내려앉은 관을 바라보았다.

지크프리트에 의해 생긴 깔끔한 단면으로 번뜩이는사슬들이 몇 눈에 걸렸지만, 집요하다 느껴질 만큼이나 사슬을 둘러놓았기 때문에 여전히 이 관이 열리기 위해서는 필시 더 많은 고난이 필요해 보인다.

철그럭.

관을 다시 들어올리기 위해 뻐근한 몸으로 허리를 숙여 차가운 바닥에 늘어져 있던 사슬을 하나 쥐었다.

"..."

평소보다 묵직하게 손바닥 위로 무게감을 실어오는 이것을 곧바로 들어 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 망설임 때문일 것이다.

.. 나는 무엇을 망설여 하는가.

신탁의 용사를 찾았고, 그는 나를 일행의 사제로 인정했으니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어야 하겠지만... 어째서 나는 망설여 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가 느끼는 나 자신의 이해못할 반응은 갑작스러운 두통을 이끌고 오기에 충분했다.

지끈,

익숙한 전조에 질끈 눈을 감았다 뜬 나였지만.. 그게 정신을 차리는 데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

사슬이,

"....... 아."

사슬이 휘감겨 온다.

손바닥 위를,

손등을,

손목을,

마치 뱀처럼 움직이는 이것이 내 팔꿈치 아래에 닿을 만큼이나 휘감아 올 때까지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슬은 이내 내 팔 위로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녹아든다.

피 한 방울 내지 않고 피부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쇳덩이의 비현실적인 감촉은 차갑고 불쾌하다.

이들은, 아니 이것은, 뼛속까지 붙잡아 호소하고 있다.

나에게,

자신을 놓지 말라고.

"에단?"

촤르르륵.. 철그럭!

"... 아."

뒤에서 들려온 작고 여린 목소리는 나를 이 짧은 비현실 속에서 끄집어 올린다.

힘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것이 실비아의 것이었기에 내 귀는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소녀의 눈동자를 보자 고요한 아래 들끓어 오르던 마음속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 기분이다.

"에단..?"

내 팔을 휘어감고 뿌리내리던 사슬 쪽으로 다시 시선을 옮겨 놓았을 때,

그때는 이미 내가 놓친 까닭에 돌바닥 위로 늘어져 있는 튼튼한 사슬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왜.. 또 갑자기 이렇게....

대체 무엇이 나를 뒤흔들어 온 것인지 짐작 가는 부분조차...

"..."

짐작 가는 것이 없다고는 차마 생각할 수 없었다.

내 시선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눈앞에 있을 관을 피하고 있다.

타인은 알 수 없겠지만, 본인이기에 노골적이라 느낄 수 있는 시선의 회피였다.

그렇기에 굳이 입밖으로 낼 이유도 없다.

"... 아무것도, 그것보다 정말 따라가려는 건가? 어째서인지 그도 허락했다고는 하지만.."

"응.."

"두려움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런 괴물을 상대로라면 당연한 일이지."

자신과 용사를 은연중에 비교하고 있는 이 어린 소녀에게 그 이상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이미 충분히 많은 도움이 되었고, 또한 계기가 되었다.

"오히려 두려움을 모르고 목숨을 의미없이 내버리는 이들이야말로.."

"..."

내 말을 듣고 있던 소녀의 눈빛에서 드러난 저것이 분함이라는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기에 나는 말을 줄였다.

확실히.. 용사가 나타났으니 더 이상 네 도움은 필요 없다는 말처럼 들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금방 말을 덧붙이려던 차에 소녀가 먼저 그 작은 입을 열었다.

"그때, 에단이 말했던 것처럼.."

"...?"

"후회만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 말은 내 비어있는 손 위로 여전히 남아있던 묵직한 사슬의 무게감을 깔끔하게 지워 없애는 것이었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는데... 그때, 더 제대로.. 난...!"

"..."

"... 에단에게.. 더 도움이 되고 싶어서...!"

겨우 몇 마디를 더듬거리며 내뱉는 것이었음에도 끝내 긴장한 호흡을 안쓰럽게 떨며 숨을 내뱉는다.

"하악.. 학..."

"..."

고작 이런 몇 마디조차 소녀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내서 하는 말인지를 덕분에 알 수 있었던 만큼 나는 순순히 내 실수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었지."

절망 앞에서 후회하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구할 수 있는 것까지도 잃어버리고 말 거라고 이야기했던 건 다름아닌 나였다.

그런데도 방금전의 나는 소녀에게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려 했었다.

남의 앞에서 직접 입에 담을 만큼이나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던 신념이, 용사라는 커다란 존재가 곁으로 다가왔다는 사실만으로 금방 이렇게 뒤집혀 버렸다는 게 우습다.

.. 그리고 조금은 무섭기까지 하다.

"실비아, 너는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그러기 위해 너를 데려온 거니까."

"...! 응!"

이제서야 눈빛에 남은 분을 지우고 똑바로 대답하는 소녀를 보니 그나마 머리가 정리된 느낌이다.

용사를 만나고부터 느끼던 이유 모를 불안감은 이것 때문이었을까?

"...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이 방에는 왜 따라 들어온 건지 물으려 했지만, 이미 소녀는 배낭의 옆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들고 있던 참이다.

저건 분명..

".. 라챤코가 준 선물."

내 눈빛에서 의구심을 읽은 것인지, 소녀는 묻지 않았음에도 대답해 왔다.

라챤코,

라챤코라면 요람에서 만난 사슴 수인.. 헹겔과 긴밀한 사이로 보이던 그 약사의 이름이었을 거다.

부스럭... 스륵..

소녀가 주머니를 열자그곳에는예상대로갖가지 의료품들이 주머니 안에 잘 정돈된 채로 사이가 촘촘하게 들어차 있다.

사제인 나와 함께 있었으니만큼 여태 저 주머니를 열게 될 일은 없었겠지만.. 이제와서 저걸 꺼내든 이유는 분명,

"받은 선물인데, 그렇게 줘버려도 괜찮겠어?"

"... 라챤코한테는 미안해."

역시 이곳의 환자들에게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보급품도 부족한 데다가 사제라고는 한 명뿐인 상황. 엘프들의 땅에서 직접 길러진 약초로 만들어진 저 약품들은 겉모습은 투박할지라도 이곳에서는 부르는 게 값일 만큼 상등품에 속한다.

그 가치까지는 잘 모를 테지만 선물 받은 것을 타인에게 넘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인지 내 눈치를 피해 고개를 떨군다.

"하지만.. 내 상처는... 에단이 치유해 줄 테니까."

"..."

그렇다고 마음 놓고 다치려 들지는 않았으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의지해 주는 듯한 대답에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라챤코도 아마 선물이 이렇게 쓰이는 걸 더 바라겠지."

"... 정말로..?"

금세 바뀌어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이번에는 내 쪽에서 시선을 피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저 무구한 눈동자가 조금 부담스러웠을 뿐이다.

흑과 백 어느 쪽도 아닌 잿빛의 눈동자에 저렇게나 다양한 색감이 드러나는 것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는 감상이다.

..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가능한 걸까?

철그럭...!

감상을 마음속으로만 품으며,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관의 사슬을 잡고 들어 올렸다.

여전히 뻐근한 어깨 위로 주어지는 자비 없는 무게감은 분명 고통과 비슷했지만 그뿐이었다.

멋대로 나를 따라온 것은 실비아였지만, 이제 와서 느끼기에 내 쪽이 더 소녀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념은, 물론 시끄러운 사슬 소리에 조용히 묻었고 말이다.

철그럭, 철걱.

제대로 등 뒤에 고정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어깨를 두어 번 가볍게 털고 먼저 방을 나서자, 아무래도 어수선한 분위기와 함께 지하실에 서성이고 있던 이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소란에 잠시 깬 듯한 호세르에게 소녀가 주머니를 들고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어느새 장비를 챙기고 위 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서있던 잔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로의 시선은 금방 마주쳤고 덕분에 거리낌 없이 다가가 말을 걸 수 있었다.

"너희도 따라가는 건가?"

지크프리트가 정말 투기장으로 향한 거라면 이들이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이번에는 별 말없이 삼키고 묻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용사님과 함께 투기장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수용된 주민들의 탈출을 도울 동료들을 함께 보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들을 한시라도 빨리 구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도 이번만큼은 따라오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 하시더군요."

잔느의 표정은 그녀의 마음을 숨김없이 대변하고 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음에도 부정하고 싶어하는 이성과 감정 사이의 갈등에 빠져있는듯 하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용사가 투기장으로 향해 준다면 그것만으로 수감된 주민들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겠지만, 용사는 그 기회를 잠자코 떠나보내야 할 만큼이나 큰 위험을 경고한 것이다.

".. 그래서?"

이들이 지크프리트와 그 동포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결국 그 충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위층에서 느껴지는 이 바쁜 기척들이 단순히 용사의 마중을 위해서는 아니겠지.

"용사 님께서도 생각하시는 바가 있겠죠. 그러니 따르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습니다."

"...?"

"용사 님의 우려대로 투기장에서 소란이 일어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황제의 시선도 분산될 테니 저희들은 이전에 말씀드린 황성의 지하로 향할 예정입니다."

투기장에서 선별된 이들이 최종적으로 끌려가게 되는 곳이라고 들었다.

".. 그렇군."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을 내버린 것도 아니다.

이를 투지로 바꾸어 망설임 없이 다음 행동을 지시한 저 강인한 정신에는 말없이 감탄하게 된다.

"그럼 저희들은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용사 님께서는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할 말을 마치고 곧장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하는 잔느를 담담히 바라보다.. 슬쩍 뒤로 시선을 옮기니 자신보다 어린 소녀에게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고 있는 젊은 사제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양 손에는 의약품이 들어있는 주머니가 조심스럽게 들려있었다.

"..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인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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