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20화 (120/137)

〈 120화 〉 20. 투기장에 흐르는 피

* * *

20.투기장에 흐르는 피(4)

두꺼운 갑옷과 날 선 무기가 만들어내는 지저분한 철성을 등지고, 그림자 속에 숨어 이 소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로브인은 자신과 같은 동포 중 왜소한 체구의 이가 난간을 붙잡은 손을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말없이 다가섰다.

"..."

덜덜덜덜...

기척이 가까워졌음에도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음에 결국 그는 입을 열었다.

"도라."

덜덜덜.... 흠칫..!

".....!! ...!"

푸스슥..! 후두둑, 투둑.

비명만 지르지 않았다 뿐이지, 소스라치게 놀라 쥐고 있던 난간을 부스러뜨린 동포의 로브 아래로 드러난 얼굴의 낯빛은 하얗게 질려있다.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지?"

"... 이건..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히끅.."

악력만으로 돌로 된 난간을 부스러뜨린 그녀였지만, 이내 팔뿐이 아닌 몸 전체를 떨다 결국에는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는다.

"헥터를 떠올리고 있나?"

".....!!"

입을 벙긋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를 싸늘하게 노려보던 로브인은, 그 차가워 보이는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직접 한쪽 무릎을 바닥에 붙이고 자신의 눈높이를 낮추었다.

".. 대의와는 별개로 이번 일은 나 역시도 유감이다. 놈은 좋은 녀석이었지."

"..."

다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잊지 마라."

"히끅..!"

여성은 직접 자세까지 낮춰가며 자신과 시선을 맞춘 그의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러기 위해 굳이 한쪽 무릎까지 굽힌 것인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잊지 마라."

차가운 인상에 틀어박힌 두 눈동자는 로브 아래로 드리운 어둠 속에서 살벌하게 빛나며, 마치 불덩이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딸꾹질을 하는 것조차 잊게 만들 만큼이나 자신의 심장을 조여드는 그 강렬한 시선에 그의 무뚝뚝한 목소리는 뇌리에 새겨진다.

"설산의 비극을 기억해라. 투쟁을 포기하고 이빨 뽑힌 맹수의 최후를 기억해라."

".. 우리.. 는..."

암시처럼 머릿속을 맴돌며 울리는 그의 낮은 목소리는 한껏 분노를 머금고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조용히 들끓고 있다.

"분에 가득 찬 울부짖음을 기억해라. 동포들 모두가 심장을 맡긴 그날밤을 기억해라."

"우리는..."

그것은 마치..

"기억해라, 붉은 달 아래 죽어간 모든 동포들을."

"..."

"대답해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들을 기억하며 너는 무엇을 손에 넣었지?"

"우리는.. 싸워야 할 이유를..."

텁..!

단단한 그의 손이 왜소한 어깨를 움켜쥔다.

"...!!"

그 순간 반응하듯 몸이 크게 한 번 뛰어오른 이후로, 그녀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네 안에서 끓어오르는 그 감정을 외면하지 마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그리움도, 슬픔도, 두려움도 아닌... 우리들이 가슴깊이 품은 증오니까."

스으윽...

말을 마치고 일어선 로브인은 아무래도 이 넓은 투기장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로브인들을 이끄는, 아니.. 그 보좌로 보인다.

캉....!!! 까드드드득........!!

몸풀기도 끝난 모양인지 날카로운 무언가가 두꺼운 철판을 강제로 찢어발기는 소리를 들은 발터는 잠시 난간 너머로 그 싸늘한 시선을 넘겨 놓았다.

투기장의 중앙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서 흙바닥을 짓밟아 터뜨리며 연신 먼지 구름을 일으키고 있는 저 한 마리 맹수야말로 자신들의 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 검붉은 갑옷의 기사들이 예상보다 시간을 더 끌어주었다고는 하나, 결국에는 주변에 이미 몇이나 쓰러져 굴러다니는 잔해들과 같이 찢어발겨질 운명이다.

이곳 투기장에는 황제의 명령 아래, 북대륙에서는 본 적 없는 수의 먹잇감들이 한데 모여 도망치지 못하게 구속되어 수확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신을 믿는 것도, 그렇다고 용을 믿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것은 정말이지 저 거무칙칙한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이나 상황이 따라주었다.

다만.. 이것으로 여태껏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켜왔던 카마엘의 지령으로부터 변명할 여지 없이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결국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언젠가 해야 할 일.

놈들 역시 언제가는 목을 꺾어 부러뜨리고 넘어서야 할 관문이었다.

.. 그렇다면 신탁의 조건이 한없이 불완전한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때일 것이다.

사냥이었다면 어린 새끼를 놓아주는 법이나, 이것은 투쟁이었으니 그 누가 비겁하다 말할 수 있을까.

"지크의 소화가 끝날 때까지 이를 방해하려는 놈들이 있다면.. 그것이 누구라 할지라도, 어떤 대가를 넘겨주게 된다 할지라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의 승리는 더욱 확고해지겠지."

큰 마을 하나에서도 그 머릿 수가 백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의 이들은 수 백은 커녕 수 천,

이만한 양의 피를 포식한 후라면.. 설령 그 상대가 용사라고 할지라도 결코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래, 용사라 할지라도.."

*

히히히히히힝...!!

말의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관리가 잘 되어있는 것으로는 흠잡을 곳 없는 모르부스의 대로를 가로지르는 마차 한 대가 있다.

오래된 탓에 휘어져 빠져나온 나사가썩은 판자와 함께드러난 낡고 허름한 마차였지만 지나는 길이 거친 산길이 아니었기에 잔느가 말 두마리와 함께 흔쾌히 내어준 이것은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드드드드드드드드...

능숙하게 고삐를 붙잡고 있는 금발머리의 용사는 앞을 똑바로 주시한 채로 잔느가 알려준 길을 따라 투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 광장에서 좌측 대로로, 이후로는 쭉 나아가면 투기장이 보이기 시작할 거다."

이미 지금껏 지나쳐온 광장들에서 여러 번을 선회하여 멀리 돌아가는 셈이었지만, 그것도 이번을 마지막으로 나도 쥐고 있던 지도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병사들의 순찰 경로와 시간이 치밀하게 기록되어 있는 이 지도 사본은 물론 마찬가지로 잔느에게 넘겨받은 것이다.

"잔느 씨의 말대로 제국군과 마주치지 않았군요. 조금 돌아오기는 했지만 덕분에 시간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 괜히 내가 시간을 뺏은 것 같다만."

사실 용사의 신체 능력 정도라면 마차를 타는 것보다는 건물의 지붕을 밟고 뛰어넘으며 일직선으로 투기장으로 향하는 편이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리하지 않는 이유는.. 물론 제대로 거동하는 것이 힘든 나를 곁에서 지켜주기 위함이겠지.

"그럴 리가요. 저희는 이제 동료인걸요."

"..."

분명 익숙할 테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그의 상냥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가 보지 못하게 작게 고개를 젓고는 지도를 말아 소녀에게 넘겨주었다.

지도 위로 빽빽하게 표시된 순찰 경로와 시간들은 얼핏 보기에 빈틈없어 보이지만, 구획 정리가 잘 되어있는 모르부스이니만큼 관측과 기록이 틀리지 않았고 또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이처럼 안전한 길을 찾아 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방법이 실제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의혹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항군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의 수는 몹시 제한적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지도 위에 모든 순찰 경로와 시간을 관찰 끝에 표기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경로나 인선 등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황제가 터무니없이 멍청하거나 과도하게 여유를 즐기는 인물이 아니라면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는 저항군의 존재를 알고 있을 현시점에서 보일만한 행동은 아니다.

잔느도 한 차례 이야기한 부분이었지만 실제로 확인하게 되니 의구심은 더더욱 커져간다.

.. 게다가 군을 동원해 갓난아이, 심지어는 임산부까지.

미성년의 주민이라면 예외 없이 끌고 간다고 했었지.

"에단..?"

그래서 노인이 그런 말을 했었나 싶어 슬쩍 내 옆에 앉아 있는 실비아를 쳐다보았다가, 시선을 느낀 소녀가 이쪽으로 무구한 눈동자를 향해왔기에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신경 쓸 건 이쪽이 아니었다.

부상을 입고 물러선 지크프리트가 용사의 우려대로 더 강해지기 전에 이번에는 이쪽에서 먼저 찾아가는 것이었다.

나와 소녀의 경우에는 겨우 살아남아 목숨을 부지했다 말할 수 있는 지금, 이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상대에게 다시 제발로 찾아가 목을 들이미는 것과 같은 기행이다.

그리고 이런 기행을 벌이게 된 중심에는 용사라는 또 다른 규격 외의 존재가 있다.

"..."

그렇기에 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용사라고 해서 그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던가, 결코 죽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이 아님을..

그 역시도 아케라의 대지에서 태어난 한 명의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에단 씨,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 저곳이..."

잔느가 이야기했던 대로 거대한 원통형의 석조건축물이 대로의 건물들 너머로 그 어두컴컴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야 보면 곧바로 알게 될 거라고 말할 법 한 광경이다.

저곳이 투기장...

어두컴컴한 모르부스의 하늘과, 대로의 밝혀진 등불이 만들어내는 빛의 번짐 사이로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저 건축물을 보자 벌써부터 코로 피 냄새가 짙게 스미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이것을 불안이라고 하기에는.. 손끝이 저릿거리는 이 불쾌한 느낌은...

.. 틀림없이 불길함에 가까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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