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20. 투기장에 흐르는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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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투기장에 흐르는 피(5)
모르부스 서부지구에 위치한 투기장은 흔히들 서부 투기장이라 부르는 꽤나 잘 알려진 장소다.
흉악범의 처형이라든가, 영지 사이의 마찰을 빚게 된 귀족 사이에서의 대리결투라든가, 아니면 정말 단순히 돈벌이 목적으로 투기장 주변을 전전하는 검투사들의 싸움이 부유한 이들의 여흥을 위해 오락이라는 형태로 제공되는 이른바 욕망의 쓰레기통과 같은 곳이었다.
나라의 심장이기도 한 왕도에 이런 장소가 공공연히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야 귀족과 부호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딪히는 검과 방패의 철성, 달아오른 관중이 이끌어내는 분위기, 목숨을 두고 내기를 벌이는 데에서 오는 우월감 섞인 쾌락은 그들에게 끊을 수 없는 마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
"..."
그런 이곳에 더이상 관중들의 환호나 분노에 찬 고함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역사속에서흙바닥을 적셔온 피비린내만큼은 불쾌할 만큼이나 그대로였다.
"올 게 왔군."
투기장의 거대한 외벽 너머는 이미 쥐 죽은 듯 조용했기에 그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이 아래를 울렸다.
".. 이건, 제대로 찾아왔나 보네요."
용사의 말대로 이곳에 저들이 있다는 것은, 저 너머에 지크프리트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불안하기 짝이없던 그의 경고가 들어맞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미 한번 대삼림에서 마주친 적 있는 검붉은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의 그림자가 투기장의 벽 위로 솟아올라 이 아래의 발치까지 늘어진다.
서로를 동포라 부르는 저들의 수는 얼핏 보기에도 수십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서서 처음의 그 낮은 목소리를 나지막이 흘린 이는 곧바로 주변의 동포들에게 공격 지시를 내리기보다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후드 끝자락을 붙잡고는 나머지 할 말을 중얼거린다.
"어차피 이 종말의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라 한다면, 지금의 이 투쟁으로 얻게 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의 죽음뿐이겠지."
그 담담한 목소리는 이 마주침을 원치 않았음을 입에 담고 있었으나, 어둠 속에서도 안광을 발하고 있는 저 섬뜩한 눈동자는 투기와 적의를 조금도 감추려 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반응하듯 용사 역시도 근육이 알맞게 붙은 두 팔을 어깨너머로 뻗어 등에 교차로 매어진 두 자루 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는다.
"아무래도 저쪽 역시 저희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의 장갑 낀 두 손은 검을 쥐자 말의 고삐를 잡고 있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나의 역할이 사제로서 삶의 고통과 오염을 덜어내주는 것이라면, 그는 조금 더 직설적인 대화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만큼이나 해야 할 일은 알기 쉽게 눈앞에 대로처럼 늘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해야할 일에 달라질 것은 없겠지."
"... 에단 씨의 말대로네요."
스르르르릉...
날이 말끔하게 선 두 자루의 검의 외견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해 보였지만, 용사의 손에 들리게 된 이상 전에 없던 예기를 머금고 맑은 공명음을 내기 시작한다.
마치 처음부터 그래야 했다는 것처럼 잡혀가는 그의 자세는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견고하게 느껴진다.
용사는 검을 빼들었고, 벽 위에 늘어선 적들에게 경고한다.
"당신들로서는 저희를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벽 위의 그들은 조금도 기죽는 법 없이 중심의 남성과 마찬가지로 후드를 잡은 손을 그대로 뒤로 넘겨 자신들의 얼굴을 그림자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하나같이 뾰족한 늑대의 귀가 돋아나 있다.
암청색의 머리칼은 어렵지 않게 지크프리트를 연상시켰고, 그들이 어째서 서로를 다름아닌 동포라 부르는지 알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 그렇겠지. 하지만 이 싸움으로 얻게 되는 것이 설령 우리들의 죽음뿐이라 할지라도, 투쟁을 선택한 우리들에게 물러선다는 선택지는 없다."
"그건.. 안타깝군요."
용사의 반응은 동정어린 한마디였다.
그것이 이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밖에 없다는 데에서 생겨난 감정인지, 아니라면 저들이 피에 점철된 삶 속에서 지쳐 쓰러져 죽을 때까지 내달려야만 한다는 데에서 느낀 감상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는 저들에게 있어 삶의 근원을 부정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타까워...?"
처음으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무엇이 안타깝지?"
적의와는 또 다른 불쾌함이 짙게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는 용사에게 묻는다.
"도망을 선택한 이는 죽을 때까지 도망칠 수밖에 없고. 맞서 싸우기를 선택한 이는 죽을 때까지 투쟁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분명한 의지도 없이 감히 세상의 구원을 자처하는 위선자인 네놈이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
"..."
"도망을 비겁하다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투쟁에는 분명한 의지가 담겨있는 법이다. 나의 의지대로 삶을 선택하고, 끝내 죽음까지도 선택하는 것에 안타깝다 여길 만한 부분이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지?"
용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가 시간을 끄는 것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의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역시 알 수 없었다.
"지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용사는 그저 벽 위의 베어넘겨야 하는 적들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짤막한 부탁을 남겼을 뿐이다.
그렇게 준비가 끝난 그 시점에, 저들 역시도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흉기만큼 무서운 것도 없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그 상대가 반쪽짜리 용사인 네놈이어서야 아무래도 아쉬움은 남는군."
의미가 불분명한 말을 작게 중얼거린 그는 자신의 의지로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우드드드득....!!!
뿌드드득...!!!! 우그극, 부드득, 빠득...!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늘어선 그림자들이 격렬히 뒤틀리며, 덩치를 불려나가기 시작한다.
찌지이익....! 찌이익...!
우드드득, 꾸드득...!!
그 덩치는 검붉은 로브를 찢어발기고, 진정한 자신들의 색이라 할 수 있는 암청색을 드디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설마, 저놈들 모두.."
뼈와 근육의 위치가 재정렬되어가는 이 기괴한 소음과 그에 걸맞은 광경은 낯설어야 맞겠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소녀를, 실비아를 한 번 죽음까지 잡아끌고 갔었던 그 반쪽짜리 순혈자가 이미 한 번 보여준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었으니까.
다만 광기 어린 허기로 이성을 잃고 있었던 그들과는 달리 저들은 모두 제정신을 유지한 채로 모습을 바꾸었다는 사소하지만 큰 차이만이 그곳에 있을 뿐이다.
동포라 불리우는 저 늑대 수인들 하나하나가 지크프리트에 미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위협적인 전력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이성을 잃은 그 반쪽짜리 괴물 하나에게도 나와 소녀가 그렇게까지 몰아붙여졌던 것을 떠올린다면 말이다.
".. 그르르르르르르..."
스르릉....!
스르르릉..!
순혈자의 형상을 한 수십의 괴인들이 하나같이 길게 뽑아낸 날카로운 손톱들은 흔들리는 희미한 빛에도 반짝거릴 만큼이나 예리함을 보이고 있다.
진정으로 상대해야 할 적인 지크프리트도 당장 이 자리에 보이지 않았지만.. 과연 내가 제대로 용사를 지원해낼 수 있을까, 용사 홀로 저들을 상대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속으로 들었을 만큼이나 위험한 상황이다.
"..."
그런 나를 안심시키듯, 상냥한 목소리는 들려왔으면 할 때에 들려왔다.
"에단 씨와 실비아는 제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반쪽짜리 용사라는 등, 위선자라는 등, 그의 의지를 흔드는 비아냥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장갑이 구겨져라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지켜 보이겠다는 것을 선언한다.
나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노아라는 그리운 이름의 용사를 여전히 깊게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일행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겉돌고만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느낌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아니 오랜만이라고 해야 할지, 이것이 정말 옳은 표현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긴장하여 꾹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저절로 풀리게 만드는 이 느낌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합을 맞춰보지도 못했는데 곧바로 이렇게 위험한 실전이라니, 신탁이 이끄는 운명이라는 것도 참 가혹하다고 해야 할지."
"하하.. 에단 씨의 말대로네요. 하지만 이런 걸로 불평해서야 이런 세상의 용사 같은 건 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카앙!!
손톱을 빼어든 것과 다르게, 어느새 날아들었는지 모를 암기를 어두운 시야 속에서도 요령 좋게 쳐낸 금발머리의 용사는 유쾌하게 내 불평을 받아친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였다.
"가라! 그리고 죽음으로 우리들의 삶을 증명하는 거다!!"
날렵하게 몸을 날려 투기장의 높은 외벽을 떨어지는 것보다도 빠르게 말 그대로 타고 내려오는 거구의 괴물들 수십을 앞두고도 이를 정면에서 앞둔 그의 뒷모습은...
"노아."
"에단 씨..?"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껄끄러움 없이 부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인사가 늦었지만.. 잘 부탁한다."
"...!"
그리고 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물론입니다! 에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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