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20. 투기장에 흐르는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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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투기장에 흐르는 피(6)
북대륙의 최북단, 녹지 않는 얼음나무숲으로 유명한 설산의깊고 높은 얼음절벽이 끝없이 늘어선 빙하의 협곡에,
눈으로 뒤덮인 아름답지만 쓸쓸한 경치 속에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키루루루룩...!! 케룩, 키루루룩....!"
사냥꾼이 어깨 위로 짊어진 털빛이 흰 괴조는 아직 살아있는지 이따금씩 몸을 비틀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그럴수록 목을 조여드는 단단한 팔뚝에 점점 힘이 빠져간다.
눈밭 위로 남는 것은 사냥꾼들의 발자국과, 괴조가 흘린 붉은 핏자국 뿐.
그들은 깎아지른 얼음절벽의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고, 때마침 거세진 눈발은 그들의 발자국을 지워없애 주었지만 흐릿하게 남은 선혈의 잔향까지는 미처 다 지워내지 못한다.
물론 찾는 이 없는 이 오지에서 이런 작은 꼬리가 문제 될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류엘드 삼촌!"
비좁은 통로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다, 바닥이 드디어 얼음이 아닌 바위로 바뀌어 가는 경계에서 한 청년의 명랑한 목소리가 동굴을 울린다.
"오오, 지크."
우두둑!
자신에게 달려온 것은 인간도 수인도 아니었고 온몸이 푸른빛의 털로 뒤덮인 오히려 마수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괴조를 짊어지고 있던 가장 체격이 좋은 사냥꾼은 놀란기색없이 그저 괴조의 목을 꺾어 부러뜨려 마무리를 하고 그에게 오늘의 수확을 건네준다.
"헬레나에게 가져다 주면 된다."
군말 없이 커다란 괴조를 받아든 청년은 자신의 삼촌이자, 최고의 사냥꾼인 그류엘드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었다.
"알고 있어.. 그래서 삼촌, 나는 언제쯤 사냥에 데려가 줄 거야?"
"하하하... 네가 다 컸을 즈음이려나? 성년식도 아직이었지 아마?"
".. 하아, 이젠 마을에서 팔씨름하는 것도 지겹다고."
청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 사냥에는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왔지만, 그류엘드는 성년식을 핑계로 웃어넘기려 한다.
그걸 모를 만큼 청년은 바보가 아니었다.
"다 들었어, 발터랑 헥터는 벌써 사냥 연습을 시키고 있다면서?"
"그 녀석들은.. 쯧쯔, 하하. 확실히 그렇다만."
"역시... 내가 이런 모습이기 때문인 거야?"
청년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함과 서운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그 마음을 그류엘드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 마을은 그에게너무나도 좁았으니까.
"... 아니, 네 탓이 아니야. 그리고 너는 그 모습에 조금 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하지만.."
"걱정 말거라, 네가 성년식을 마치면 반드시 사냥에 데리고 나가 줄 테니."
"...!!"
청년은 마치 소년처럼 눈을 반짝이며 그 약속을 기뻐했지만 다음 이어진 말에는 윽, 하는 목소리를 짧게 내뱉으며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네 어머니에게 팔씨름을 이길 수 있게 된다면, 이라는 조건이 따라붙겠지만 말이다. 하하하..!"
얼음 동굴의 깊은 안쪽에는 놀랍게도 수인들의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치고, 눈빛은 조금도 어둠에 물들지 않았다.
천연의 빙하가 만들어낸 천혜의 천장이 저 너머 높이 떠오른 태양빛을 수천, 수만 번 얼음결정에 반사하여 이 깊은 동굴 안쪽으로도 빛과 따스함을 전하고 있는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 헬레나!"
"그류엘드 삼촌한테 받아왔나 보네, 설마 마을 밖으로 나갔던 건 아니지?"
마을의 중심, 가장 빛이 잘 드는 큰 천막 안으로 청년이 괴조를 짊어지고 들어가자 이미 거대한 솥에서 물을 끓이고 있는 누군가의 실루엣과 함께 여성의 뚱한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랑 약속했잖아, 허락 없이 바깥에는 안나간다니까?"
"그래그래, 이쪽으로 와서 손질이나 도와."
천막 아래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온 여성의 모습은, 청년과 마찬가지로 온몸이 짙은 푸른빛의 털로 뒤덮여 있다.
튀어나온 주둥이와, 날카로운 이빨, 커다란 손발.. 성별을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목소리와 청년과는 달리 다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체형, 그리고 걸치고 있는 옷의 차이 정도일 것이다.
"흣차...!"
무거운 괴조를 바닥에 내려놓고, 눈을 녹인 물로 간단히 몸부터 씻어낸 청년은 괴조의 깃털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일반 사람들이 함부로 만졌다가는 손이 베여나갈 만큼 날카로운 깃털이었지만, 청년의 두꺼운 손가죽은 조금도 그런 기색 없이 쑥쑥 깃털들을 뽑아낸다.
"그래서 누나, 목소리가 왜 그래?"
"내 목소리가 뭐 어쨌는데?"
"아, 아니.. 뭐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해서."
청년은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묻는 걸 보면 또 그렇게까지 섬세하지도 않은 듯 하고 말이다.
"... 아무것도 아냐, 그냥 발터 녀석이.. 아, 역시 아니야."
"발터가 왜? 누나랑도 사이좋지 않았어? 혹시 싸웠다던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이번에도 괴조는 한 마리뿐이야?"
말을 얼버무리고 화제를 돌린 티가 물씬 났지만, 청년은 순순히 이에 넘어가 준다.
"응, 아무래도 요새 잘 보이지 않나 봐."
마을 최고의 사냥꾼의 실력이 녹슨 것은 아닐 테니 단순히 괴조의 개체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두 마리는 있어야 마을 사람들 모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하아.. 그래, 아직 식량이 부족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어머니께는 한 번 말씀드려봐야겠네."
"걱정 마! 내 성년식만 마치면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질 테니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특별해 보이지만 평범한 두 남매는 앞날의 닥쳐올 냉혹한 파란을 예상하지 못했다.
*
"쿨럭...!!"
후두두두둑...!
투두둑...
거칠게 차오른 숨을 내뱉기 위해 벌린 입에서는 끈적한 피가 한가득 쏟아져 흐른다.
"과연, 용사의 힘이라는 건... 직접 상대해 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불합리한 법이군."
스물 남짓의 동포들 중에서 아직 두 발로 서 있는 것이 일곱,
상처로부터 흘러내리려는 내장을 쓸어 담아 팔로 감싼 채 마지막 저항을 준비하는 이들이 둘,
그리고 이미 상처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려 더는 설 수 없게 된 이들이 나머지였다.
"추하게 발버둥 친다 해서 그 누가 비난할 수 있으리..."
자신의 꼴 역시 말이 아니다.
발터는 잘려나간 자신의 왼팔의 상처에서 피가 더 흐르지 않도록 움켜쥔 채로 금빛의 오오라를 몸 주변에 두른 반쪽짜리 용사를 노려 보았다.
"발터 씨..."
팔을 잃은 것은 그리 아깝지 않다.
도라의 목이 용사의 검에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었으니까.
"도라, 너는 이제 뒤로 물러나라."
"하지만..! 그럴 수는...!"
이곳의 모든 동포들이 죽게 되더라도, 지크의 피를 이을 한 명은 살아남아야 했다.
"물러나!"
"...!!"
"그리고 잊지마라, 우리들의 삶이 가장 밝게 빛나는 순간을 기억해 줄 동포가.. 한 명쯤은 필요하니까."
끈의 끝에 달려 있던 암기를 떼어내고, 그 끈으로 잘려나간 팔에 대강 조치를 취한 발터는 나머지 손으로 도라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거칠게 밀어낸다.
"... 발터.."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적어도 저 빌어먹을 위선자의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거두어 가, 지크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과연 검을 무기로 쓰고 있는 게 맞는지부터가 의심이 드는 저 위력에는 고작 버티고 버티는 것이 한계다.
사제의 지원 역시 거슬리기 그지없다.
견고한 신성 보호문은 깨뜨리지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로 인한 잠깐의 머뭇거림은 용사에게 있어 반격의 기회였다.
저번 싸움의 여파로 거동이 불편한 듯 싶었기에 먼저 노리고 싶었지만, 애초에 용사의 검이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을뿐더러 정말 위험한 순간에는 저 소녀가 사제의 허리를 붙들고 공격 범위에서부터 성실하게 벗어나고 있다.
".. 죽음은 두렵지 않다, 이미 내 심장은 설산에 묻어두고 왔으니..."
카앙...!
캉!!
팔을 잘린 발터를 대신해 아직 사지가 멀쩡한 동포들이 다시 용사에게로 달려들었지만, 휘둘러지는 금빛 검기는 어둠 속을 수놓고,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동포들의 날카로운 손톱을 손쉽게 튕겨낸다.
"크르르르륵...!!! 크아아아!!"
"카알! 정신 차려!!"
"배... 배.. 고.. 파...!! 아아아악!!!
그렇게 끝이 다가오고 있다.
순혈자의 피를 받아 감히 그 모습을 흉내내고 있다고는 하나 몸에 맞지 않는 힘을 사용한 대가는 크다.
길게 이어진 싸움 끝에 피의 본능에 잡아먹히고 만 동포들은 흉포한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눈동자의 총기를 잃어버렸다.
허기.
생명이라는 축복과 함께 얻은 이 지긋지긋한 저주는 동포들의 투지를 좀먹고 이성을 잃게 만든다.
결국 본능에 따라 일직선으로 달려들 뿐인 덩치는 손쉽게 베어낼 수 있는 바위 덩어리에 불과했다.
서걱!
푸화악...!!
그렇게 또 한 명의 동포가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제길..."
그러나 이제 와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 한 번에 달려든다. 더 이상의 소모전은 의미가 없어."
이대로 허기에 집어삼켜져 죽든,
천천히 피 흘려 죽든,
검에 목이 잘려 죽든,
그리고.. 지크에게 포식당해 죽든,
모두 같은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두렵지 않다.
그렇다면 가장 의미 있는 죽음의 방식을 찾을 뿐이다.
"하나의 상처라도 만들어 내라. 우리의 투쟁은 지크가 반드시 이어받는다."
그런 생각을 강요하며 여태까지 동포들을 죽음으로 등 떠밀어온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쌓여가는 그들의 시체를 밟고 올라선 이곳에서조차 세상의 변화를 직접 볼 수 없었다는 사실 만이 아쉬울 뿐이다.
그렇게,
마지막 돌격을 위해 하나 남은 팔로 수신호를 내리려던 발터를..
멈춰 세운 목소리가 있었다.
"아아.."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뒤로 밀쳐냈던 도라의 목소리.
무시하려 했지만 그에 맞춰 저쪽의 움직임 또한 멎었다.
용사는 양손의 검을 바닥을 향해 늘어뜨리고, 시선을 위로 향한다.
도라 역시도 고개를 들어 투기장 외벽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목숨과 원하는 미래를 건 투쟁의 장에서 이런 한눈팔기가 용납될 리 없었고, 발터 역시도 지금이야말로 용사를 공격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지만...
끝내 그 역시도 그것을 두 눈에 담게 되었을 때, 공격 명령을 내리는 것 대신 떨리는 입술로 작게 중얼거리게 되었다.
"붉은 달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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