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21.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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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붉은 달(1)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핏빛으로 물든 달.
그것은 모르부스의 어두운 하늘에 떠올라 불길한 빛을 투기장에 흩뿌리고 있었다.
"... 투기장으로 돌아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크에게 다가서지 마!"
차갑게 식어 나뒹구는 동포들의 시신들을 흙 위에 스러진 채 내버려 두고, 그림자들은 투기장의 벽을 타고 저 너머의 붉은 대지로 민첩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들을 시선으로 좇다 다시 한번 투기장의 하늘에 걸린 붉은 달을 바라보게 된다.
거대한 붉은 구체.
다른 이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도 저것을 본 순간 붉은 달이 떠오른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그것도 만월이 말이다.
하지만 저 너머 거무칙칙한 색감의 하늘에는 여전히 재를 머금은 흑연이 아직 걷히지 않았으니...
저것은 달이 아니었다.
"에단 씨... 저건.. 설마..."
검날의 핏물을 털어낸 용사 역시도 처음 보는 광경에 말문이 막히는지 목소리에서 주저가 묻어나고 있다.
그는 나에게 저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으나,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눈으로 보고 얻을 수 있는 단편적인 정보뿐이다.
".. 피.. 로군, 그것도 용의 저주를 아주 짙게 머금은 피."
용사의 보조에 집중하느라 곧바로 눈치채지 못했으나, 손가락 끝이 저릿거릴만큼이나 이미 자욱하게 퍼진 이 익숙한 저주의 기운이야말로 저 기이한 현상을 유일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쿠루루루룩....
구루루루루루루룩...
구체의 주변으로 가늘게 이어진 수많은 핏줄기들은 마치 흡수당하듯 저 구체를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다.
거대한 피의 구체는 고요하게 꿈틀거리며 아직도 그 크기를 키우고 있는 중이었다.
... 어떻게 저 많은 피가 모일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내놓아진다.
".. 이미 늦은 건가."
나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용사는 이를 부정하고 싶은지 이젠 막아서는 이 없는 투기장의 입구로 서둘러 달려나간다.
"따라가자, 실비아."
"... 응."
실비아의 부축을 받아 드디어 투기장의 안쪽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되었을 때,
앞서 달려나갔을 용사는 멀지 않은 곳에서 밭 밑에 뿌리가 내린 듯 멈춰서 있었다.
"..."
멈춰선 용사의 곁에 다가서자 바깥에서 맡았던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짙은 혈향이 코를 찔러들어왔고, 실비아는 그 비릿한 냄새에 두통이 이는지 코를 부여잡고 인상을 가득 찌푸리다 끝내 용사가 바라보고 있던 붉은 대지의 모습을 마찬가지로 눈에 담고는 주저앉아 빈속을 게워내고 말았다.
".. 웩... 웨액..!"
과연, 예상대로 이곳은 내세의 무저갱이 참혹하리만치 재현되어 있다.
멀쩡한 사지를 찾아보기 힘든 불완전한 시체의 무더기는 산을 이루었고,
그들의 입과 코, 찢어진 신체로부터 내장과 함께 흘러내린 핏물은 강을 이루었다.
이곳의 이들은 더이상 숨을 내뱉지 않는다.
".. 끔찍하군."
하나같이날카로운 이빨과 무자비한 폭력에 잡아뜯겨 나간 흔적을 지니고 있다.
마치 굶주린 짐승의 습격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콜록콜록..! 웩..! 케헥.. 켁..!"
역병의 희생자들이 한데 쌓아올려져 불태워지던 광경을 보고도 이정도의 반응을 보여주진 않았던 소녀가 지금 이렇게 힘겨워하는 이유는분명, 이곳에서 끔찍한 결말을 맞이한 이들이 하나같이 자신과 비슷하게 앳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형체가 제대로 남은 시체를 찾아보긴 힘들었지만 바닥에 고인 피웅덩이 위로 심심치 않게 굴러다니고 있는 짤막한 팔들은 분명 부모의 손을 맞잡기를 바랐을 여린 손가락들을 달고 있었다.
유독 몸통에서 떨어져나간 팔들이 많이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저 힘없는 손으로 폭력에 저항한 대가였겠지.
.. 머릿속이 멍하다.
한번에 받아들이기 버거운 충격에 오히려 감정은 차갑게 가라앉고, 주변은 느릿하게 비추어지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 겁니까."
처음으로 노아가 입을 열었다.
슬픔을 참는지, 혹은 분노를 참는지 덜덜 떨리는 그 목소리는 답을 갈구하고 있다.
"..."
비명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던 것을 떠올려 보면 사실 이곳에 도착한 시점에서 이미 늦었던 것이겠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그에게 말해주기에는 분명 나와 실비아의 동행으로 그의 행동이 제한되었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나는 최선의 답을 위해 벙긋거리던 입을 그대로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가슴께가 욱신거린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몸뚱이에 고통을 불러온 것인지, 혹은 이 현실감 없는 참상에 대해 거미줄 같은 자책감을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광경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너무나도 고요하다.
아직 눈이 다 감기지도 않은 수많은 앳된 생명들이,
구린내 나는 욕망의 역사를 뒤집어쓴 투기장에서 길을 잃고 스러지고 말았다.
"... 그르르륵...."
그렇게,
이곳에서 아직 흔치않게도 살아있는 이들은 그 모두가 작게 끓는 소리에 이끌려 한 곳으로 시선을 가져다 놓게 되었다.
저 붉은 대지의 가운데.
붉은 달의 그림자 아래 그 불길한 빛을 내리받으며 고개를 늘어뜨린 단 하나의 존재가 보인다.
".. 지크프리트."
놈은 자신의 것이 아닌 피를 한가득 뒤집어 쓰고 그 검푸른 털빛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지난 싸움에서 간신히 앗아갔다 생각했던 왼팔은 건재했으며, 이는 놈과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을 앞두고 한 차례 더 절망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아직 내가 도망치지 않은 이유는 분명.. 이젠 용사의 옆보다 안전한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우.."
상대해야 할 적이 눈앞에 있었건만 곧바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어째서 인가.
장내에 들어찬 짙은 혈향보다도 더욱 농밀하게 공기를 메운 놈의 존재감 때문인가.
아니라면 지킬 이가 사라진 작금의 허무함에 무기를 들어 올릴 힘을 잃은 것인가.
스스스스스....
발아래 찰박거릴 만큼이나 흐르던 핏물은 어느새 말라 검붉게 번진 흙바닥을 밖으로 내밀었다.
.. 아니, 마른 게 아니라 모두 저 붉은 구체로 빨려 들어간 건가.
구체에 이어져 있던 핏줄기가 하나 둘 끊어지고 더 이상 저것이 크기를 키우지 않게 되었을 즈음에야, 가득찬 붉은 달빛 아래의 순혈자는 줄곧 내리 떨구고 있던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렸다.
놈은 핏물로 지저분해진 날카로운 이빨들을 다 드러내 보이며, 쩌억 아가리를 벌려 하늘로 향한다.
"노아..!"
달을 집어삼킬 듯 찢어지게 벌어진 그 징그러운 입 속을 보고 막아야 한다고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다.
쐐애애애애액...!
내가 노아의 이름을 다 외치는 것보다도 빠르게 이미 미끄러지듯 잔상을 남기며 두 자루 검의 섬광을 만들어낸 용사의 모습은, 한 순간 저것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허나,
투쾅!!
이미 내 인지를 벗어난 시점에서 지크프리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던 노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저 멀리의 투기장 벽면이 포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허물어지는 모습만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꽈광...!!
후두두두둑.... 투둑...!
지크프리트가 어느새 한쪽 팔을 들어 올린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용사가 홀로 튕겨나간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
구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룩....
유일한 기회는 너무나도 쉽게 흘러내려버렸다.
피의 구체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지크프리트의 벌어진 입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가능할리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거대한놈의 몸집의 수백 배는 되어 보이던 핏물이 그의 목구멍 속으로 모조리 모습을 감추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
"..."
이를 지켜보며, 나와 소녀는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이는 분명.. 스스로의 의지를 벗어난 반응이었다.
"그후우우우우....."
그렇게 투기장을 비추던 붉은빛이 사라지고, 다시 익숙한 검은 어둠이 찾아들었을 때.
속을 가라앉히는 긴 한숨을 끝으로 줄곧 감겨있던 지크프리트의 두 눈이 떠졌다.
"....!"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게끔 안구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그 모습은, 더 이상 나와 같은 생명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검게 가라앉은 어둠 아래, 저 불길한 안광만이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다.
"... 배고프지.. 않아."
"..?!"
놈은 중얼거리듯 홀로 목소리를 내뱉는다.
"이것이.. 배가 부르다는 느낌인가."
포효와는 동떨어진, 그저 작게 들려온 혼잣말에 불과했지만...
어째서인지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강하다, 따위의 말로는 설명하기 부족했다.
야생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지니는 것은 단순히 강함과 약함의 차이가 아니다.
잡아먹는 이와, 잡아먹히는 이 사이의 입장 차이인 것이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부터 이미 결과는 정해졌고, 남은 것은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의 발악뿐이라는 것처럼..저 태고의 짐승이 풍기는 위압감은 생명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군, 분명 배가 부른데도..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아."
도망쳐도 소용없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폭력의 유린 앞에 철저히 저항해라.
그리하면 적어도, 몇 차례의 숨을 더 내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폭식이란 그런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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