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24화 (124/137)

〈 124화 〉 21.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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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붉은 달(2)

달이 진 밤의 앞길은 어둡기 그지없었으나, 눈앞에서 빛나는 한 쌍의 붉은빛은 마치 이정표처럼 운명을 끌어당기고 있다.

"지크프리트, 어째서 네놈은..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어째서...? 이렇게까지..?"

놈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것으로 끝.

이만큼이나 불합리한 힘의 차이에는 실소가 터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다행히 놈은 귀를 열고 대화에 응해주었다.

하지만 저것도 오래가지 못할 놈의 변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절망스러울 따름이다.

"이거 우습군, 확실히.. 저항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는 어린 약자들을 전력으로 짓밟는 건 투쟁보다는 학살에 가까운 것이겠지만... 크르르륵.."

놈은 유쾌한 듯 웃다가도 혈관이 불룩거릴 정도로 인상을 찌푸리고 응분 섞인 소리를 흘린다.

분명, 모종의 이유가 인륜을 저버린 이 대학살로그를이끌었을 것이다.

"이미 나는 아케라의 대지 위에서 인간이라는 족속을 지워내기로 했다."

"뭐..?"

놈은 양손을 들어 올려 마치 머리를 쓸어넘기듯 털이 머금은 핏물을 쥐어짜 털어내며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그들의 배반을 이해한다. 지금까지 흘려온 피가 너무나도 많았던 거겠지..."

뚝... 뚜둑....

"하지만 한쪽이 스스로 이빨을 뽑고 발톱을 부러뜨렸음에도 지긋지긋한 투쟁은 결코 끝나는 법이 없었다. 네놈들은 애초에 피를 흘리는 걸 멈출 생각이 없었던 거야... 그러니, 이 대지에 고요를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모조리 스러지는 길 이외에는 없다."

뚝....

"용사 일행을 죽인다는 건..."

투둑...

"이를 위한 기념비적인 역사의 초석이 되겠지."

"...?!"

놈은 자신의 손 위로 흥건히 적셔진 핏물을 게걸스럽게 혀로 핥아내며 히죽 웃는다.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비릿한 피맛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놈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자세를 낮춘다.

"그흐흐... 눈앞이 온통 핏빛이야, 마음에 들어! 조금만 방심했다간..! 그대로 피에 집어삼켜지겠어...!!"

".. 헛?!"

투기장에 일어난 광풍은 뺨과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피할 수 없다.

찰나의 순간,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을 붉은빛이 길게 늘어져 바로 코앞까지 이어져 있는 것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꽈앙!!!!

"아...?"

다시 한번 투기장이 무너져 내린다.

쿠구구구구구구.. 쿠궁!!!

후두둑.... 투두둑.....

"이거 제대로 한방 먹었습니다."

어깨의 살집이 터져나가 피가 철철 흐르는 채로 어느새 내 눈앞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용사는 진중한 표정으로 방금 막 무너져 내린 투기장의 외곽을 바라보고 있다.

... 그래, 아직 용사가 살아있는 한..

"노아, 지금 바로 치유를..!"

"네, 부탁드립니다. 분명 검으로 막았을 텐데도.. 힘을 못 이겨 휘어진 검날이 어깨를 두들겼습니다."

막아낸다고 했는데도 그 정도라니, 저 괴물의 신체능력은 대체 어떻게 되먹은 것인지..

스푸훅....!!!

그 순간, 무너져내리던 투기장의 잔해 주변으로 자욱하던 연기에서 그림자 하나가 솟아오른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하는 용사의 고개를 따라 마찬가지로 그것을 본 나는 노아의 어깨가 완전히 아무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등을 돌려 주저앉아 있는 소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투콰앙....!!!

귀가 아플 정도로 전신을 울리는 철성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쩍...! 쩌저억...!!

"반쪽짜리인 네놈으론 내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놈은 이전 재회했을 때처럼 하늘에서 떨어져내려 대지를 뒤엎으려 했던 모양이지만, 용사는 쌍수의 검을 교차하여 이를 막아내었다.

단단한 흙바닥에 발목까지 파묻혀 들어가 주변의 땅이 갈라질 정도로 묵직한 일격을 피하지 않고 막아낸 이유는, 물론 이곳에 있는 나와 실비아를 지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당장은 치유나 보조보다는 용사의 발목을 붙잡지 않도록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살아남은 놈의 동포들이 이곳 투기장에 숨어있다.

"지금의 나는, 완전한 용사를 데려온다 해도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순순히 내게 잡아먹혀라...!!!"

쾅!! 쾅!!!! 쾅!!

꽈앙!!!! 꽈광..!!!

"패배해라!!! 네놈이 정말 최강의 인간을 자처한다면..!!!! 내 힘 앞에 굴복해라!! 비참하게 찢어발겨져라!!!!"

고막을 때리는 고함과 함께, 용사의 검과 괴물의 발톱이 맞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마법 폭격의 현장에 있는 것만 같이 전신을 뒤흔들어 온다.

산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저 공격에 버티고 있는 용사의 힘이 대단하다 느껴질 정도다.

"윽...! 크으읏...!! 에단 씨..! 더 이상은....!!"

그러나 용사는 점점 밀려나고 있다.

발을 흙바닥 아래 파묻고 물러서지 않으려 애썼지만, 저 거대한 힘의 파도에 휩쓸리는 것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인지 쭉쭉 밀려나고 만다.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끄으으...!"

실비아의 허리를 한쪽 팔로 잡아들고 삐걱거리는 몸으로 나마 현장에서 멀어지기 위해 발을 잡아끌었다.

대침으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이 척수를 타고 올라와 문드러질듯 악문 이빨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오게 만들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만큼 한심한 행동은 없었다.

하지만,

"크하하하하!!! 이 압도적인 힘 앞에 운명의 무능함을 깨달아라!!"

"컥?!"

드드드드드득!!! 쿠궁­!

콰앙!!

참격을 버티지 못하고 붕 떠버린 용사의 두 팔 아래복부가드러난 것을 놓치지 않고 옆구리를 걷어찬 지크프리트는 흙바닥을 거칠게 긁어내며 날아가다 바닥에 한번 튕겨져 투기장의 벽면에 틀어박히는 용사를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며 징그럽게 웃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놈의 시선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내가 있는 곳이었다.

"자아, 에단.. 다시 한번 네놈의 신념을, 의지를...! 그리고 투지를 보여라!!"

"...!!"

"네놈이 죽으면 인류는 내게 대항할 마지막 수단을 잃는다. 뿔뿔이 흩어진 용사 일행으로는 신탁의 운명을 실현할 수 없으니, 기다리는 것은 종말뿐이겠지."

뜨겁게 끓는 피가 맥동하며 요동치는 소리가 들려올 만큼이나 놈은 가까이 다가와 내 어깨 위로 팔을 올려놓았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종의 마지막 투쟁을 내가 마음 깊이 기억할 수 있도록.. 끝까지 맞서 싸워라."

온통 붉게 물든 한 쌍의 눈은 집요할 정도로 갈구하고 있다.

투쟁을...

아니, 조금 다른가.

"지크프리트.. 네놈은..."

이것은 끝맺음이었다.

투쟁의 끝맺음.

지금도 내 어깨위로 올려진 손으로 내 무력한 몸뚱이를 당장이라도 찢어발기지 않는 것은...

끝없이 이어져온 투쟁을 최소한의 격에 맞게 끝맺고 싶기에 놈은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 네놈만이 내 싸움을 끝내줄 수 있는 눈빛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은 변하지 않는 놈의 승리와, 나의 패배를 이미 상정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덕분에 내가 아직도 숨을 내뱉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내 눈에는 보인다.

저만한 저주를 한 몸에 짊어지고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였다.

"..."

그저 싸움에 미친 짐승이라고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비록 투박하지만 확실한 신념을 놈조차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잔인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내 몸은 아직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내부의 상태를 놈이라면 분명 모를 리 없겠지만.. 그럼에도 투쟁을 강요하는 이유는..아직 내가 숨을 내뱉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후우우.."

"크흐흐흐흐흐... 크하하하!! 그래, 그거야...! 그 눈빛이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한, 싸울 수 있다는 것이 놈의 지론.

분명 한 번의 가벼운 휘두름 만으로도 나는 주인 잃은 살점과 내장 쪼가리가 되어 흙바닥 위로 흩뿌려지겠지만, 이를 알고도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꾸드득... 구드드득..

상처를 치유하고 더러운 것을 정화해야 할 은총은 재생을 위해 저주가 만발한 팔다리에 파고들어 괴이한 소리를 내며 비틀려간다.

.. 고통스럽다.

그런 말로는 간단히 설명하기 힘든 저주와 은총의 대립은 세포 하나하나를 불태우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을 거다."

그것참 우스운 이야기다.

이미 놈의 앞에 대등히 서는 것만으로 이리도 고통을 느끼고 있는데 말이다.

"... 생각해 보면 네놈과 난 별나지만 닮은 구석이 있어."

".. 그르륵?"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사악한 용의 저주라 할지라도 말이지."

무슨 소리를 하려 했나 싶었다는 표정으로 비식 마른 웃음을 흘린 놈은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한다.

"쓸 수 있는 힘은 쓰는 것이 당연하지. 후회는 잃어버린 것을 되돌려 주지 않으니까."

"동감이다. 하지만, 네놈과 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

놈에게 있어 은총이나 다름없을 용의 저주는 놈을 폭식으로 이끌었으며, 그에 상응하는 힘을 주었다.

충분한 피를 삼킨 놈은 이전에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이나 그 격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저만한 힘을 가지고도,

어째서...

"네놈은 동포들을 지키고 싶은 거냐, 아니라면 그저 싸움을 그만두고 싶은 거냐."

"...!!"

잘못되었다고,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놈의 힘에는 목적이 너무나도 희미하게 이어져 있다. 결여되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누구보다 투쟁으로부터 동포들을 지키기 싶어하는 주제에 저 힘을 얻기 위해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투쟁의 장으로 밀어 넣게 죽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네놈의 동포들을 바로 이 앞에서 몇 명이고 쓰러뜨렸는데, 내게 먼저 화를 내기는커녕 어서 자신과 싸워달라는 꼴이라니."

"감히..! 동포들을 욕보일 셈이냐..!!"

피부를 찔러드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지만, 그게 내가 입을 다물 이유는 되지 않았다.

"힘에 취해 목적을 잃어버리고 그저 빼앗는 것만 할 줄 아는 쓰레기들을, 나는 짐승이라고 부른다."

"...!!!"

어지간한 방패보다도 커다랗게 보이는 놈의 손바닥이 우악스러운 기세로 떨어져 내린다.

결국, 부정하지는 않는건가.

"남길 말은 그걸로 끝이겠지!!!"

이렇게 어깨를 붙잡힌 채로는 피하는 것도 무리다.

은총을 어중간하게 두른 내 두 팔은 부러지고 으스러지고 떨어져 나가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게 될 테지만, 나는 놈의 공격을 막아섰다.

용사가 날아가 틀어박힌 투기장의 벽면에서는 아직 움직임이 없다.

소녀 역시, 순혈자의 앞에서 심장을 쥐어짜이는 고통에 저항하는 것이 고작인 모양이다.

부디 내가 시간을 잘 벌어준 것이라면 좋을 텐데.

홀로 맞선다는 것은 이렇게나 외롭고, 대단한 것이었구나 하고 새삼 느끼며..

투기장에 스러진 어린 영혼들의 명복을 미처 빌어주지 못한 것을 마지막으로 후회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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