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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27화 (127/137)

〈 127화 〉 21. 붉은 달

* * *

21.붉은 달(5)

부스스스슥...

후두둑..

투둑... 툭.

무너진 투기장의 외벽에서는 한동안 돌가루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멎지 않았다.

지크프리트의 일격에 단단한 돌벽을 몸으로 부수고 틀어박히고만 용사는 아무래도 뒤이어 무너져내린 거대한 잔해에 깔려버린 듯하다.

"... 아무리 반쪽짜리 용사라고는 하더라도.. 이걸로 죽지는 않았겠지."

그 주변으로 슬금슬금 모여든 그림자들은 다름 아닌 지크프리트의 동포들.

거하게 무너져내린 잔해들만 본다면 분명 온몸의 뼈가 주저앉아 그대로 죽어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이 자리의 모두는 이미 한 번 이 용사와 지크가 맞붙은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

피의 준비가 부족했다고는 하더라도 자신들을 한 번 패주 시킨 전적이 있는 상대다.

"우리가 찾아내서 마무리 짓는다. 지크 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저 멀리 투기장의 중심부에 피어오른 먼지 구름 사이로 적광과 은광이 서로 어지럽게 뒤섞인 채 터져 나오고 있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시야에서는 사제의 모습도 어느새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지금 지크는 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 뭘 하고 있는 거냐.. 지크."

구구구국..!

근심 어린 시선을 끝내 떼어놓은 발터가 눈앞에 깔린 커다란 잔해를 부수려 발을 들어올린 그 순간, 저절로 그 무거운 잔해가 들썩거리며 누군가 힘주어 밀어내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쓰러져 나간다.

쿠구웅...!

한층 더욱 자욱하게 퍼진 먼지 구름 너머로 흔들리는 그림자.

이를 본 모두는 발톱을 갈무리하고 공격할 준비를 했다.

"콜록...! 콜록..!"

당연하지만 먼지 속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온몸이 희누런 먼지로 뒤덮인 지저분한 꼴의 용사다.

그만한 공격을 받았음에도 연거푸 기침을 하며 태연하게 나타난 그의 모습은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 툭툭! 툭..!

그는 자신의 옷 위로 쌓인 먼지를 몇 차례 털어내다 역시 안되겠다 싶었던지 포기하고 검을 들어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

그가 양손이 아닌 한 손에만 검을 쥐었다는 사실이었다.

"부상인가...?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검을 놓쳐 잃어버린 것도 아니다.

나머지 한 자루의 검은 제대로 그의 등 뒤에 수납되어 있다.

발터의 예리한 눈썰미는 용사가 부상을 입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챘지만, 멀쩡한 나머지 한 손에구태여검을 들지 않는 의중까지는 파악해낼 수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눈짓으로 지시를 내려 동포들이 그를 둘러싸게 만들었다.

예상대로 순탄히 흘러가지만은 않는 이 상황에서는 자신이 동포들과 이 몸뚱이를 내던져서라도 그 빈틈을 메꾸어야만 했다.

"... 부끄럽게도 잠시 정신을 잃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사는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두어차례 손목을 움직여 몸을 풀고 있을 뿐이다.

"그대로 누워있는 편이 나았을 텐데 말이지. 너나, 우리에게나."

이미 용사에게 한 쪽 팔을 잃은 발터였지만 그 기세만큼은 여전히 다른 동포들을 뛰어넘고 있다.

하지만 그 위협에도 용사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을 뿐이다.

"아니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건 곤란합니다."

"해야 할 일이라는 건..?"

빈틈을 이끌어내기 위해 시작된 대화는 살얼음판 위를 걷듯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는, 발터 쪽에 한정된 이야기.

"저는 에단 씨의 앞에서 용사다운 모습을 보여야만 하니까요."

"그것 참 안됐군, 그 사제라면 이미 죽었다."

"...!"

지크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당장 용사에게도 보이고 있을 테지만,사제가 이미 당했다는 자신의 뻔한 거짓말에 대해 그는 반사적으로 반응하고 만다.

상대가 가장 부정하고 싶어할 거짓말을 내뱉어 놓으면, 상대는 어떻게 해서든 이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 위해 행동하는 법이다.

그리고 발터는 용사의 시선이 한 순간 자신의 어깨 너머로 향해온 것을 놓치지 않고 명령했다.

"지금..!!"

잔해에 몸을 숨기고 어느새 용사를 둘러싼 동포들은 단번에 뛰어들어 단 하나의 먹잇감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민다.

이미 너무 오랫동안 이 모습으로 있었으니 무리를 시켜버리는 명령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동포들은 발터의 지시에 충직하게 따라 제 몸을 내던진다.

이미 한 번 지크프리트에게 일격을 허용하고 속이 뒤집어져 있을 게 분명한 용사와,

서서히 찾아드는 허기를 애써 잊고 명령에 따르는 너덜너덜한 상태의 동포들.

하지만 발터는 확신했다.

용사는 어째서인지 당장 검을 한 자루밖에 쥐고 있지 않다.

물론 지금 용사에게 달려들고 있는 동포들의 대부분이 저 한 자루에 쓰러지고 말겠지만..

반드시 누군가 한 명의 이빨이 그의 목덜미에 닿을 것이고, 그대로 물어뜯을 것이다.

그러나,

"... 그러니, 어서 에단 씨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발터의 기대와는 달리 동포들 중 그 누구도 용사의 몸에 닿는 일 없이 모조리 빛에 묻혀 사라져 버린다.

발터는 뒤늦게 귓가를 스쳐지나가는 광풍을 느끼며 한순간 자신의 눈앞이 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먼 과거, 괴조의 둥지를 찾기 위해 설산의 꼭대기에 올라 보았던 태양의 빛을 떠올리게 하는 찬연한 금빛이다.

"발터...!"

그리고,

동포들을 집어삼키고 뒤이어는 자신마저 물들이려 하는 섬뜩한 빛무리를 가로막고 나선 하나의 그림자가 있었다.

퍼걱...!!

푸슈슉...!

푸슛!

털썩!

후두두둑! 투둑!

"크흐윽?"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불쾌한 파육음을 들으며 등 뒤의 충격에 한 차례 신음한 발터는 지금 일어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 제대로 반응해 보기도 전에 거대한 빛의 파도에 쓸려나간 것까지만 기억난다.

"뭐가.. 어떻게 된...?"

이미 자신의 몸은 바닥에 몸을 누이고 있다.

그러나 이렇다 할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고작해야 부서진 돌무더기 위로 떨어져 내린 등 뒤의 충격뿐이다.

"쿨럭..! 쿨럭..."

그 이유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발터는 빛에 집어삼켜지기 직전 자신의 앞으로 뛰어들었던 하나의 그림자를 기억해 냈다.

"... 도라..?"

"발터... 무사..했구나... 쿨럭, 쿨럭.."

함께 날아왔는지 자신의 몸 위로 힘없이 쓰러져 있던 도라가 기침과 함께 입에서 피를 한가득 토해내는 것을 본 발터는 서둘러 그녀의 몸 상태를 살폈다.

"...!!"

그녀의 복부에 길게 자상이 남아있는 것을,그리고 두 팔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게 된 발터는 자칫 이성을 놓아버릴 뻔했다.

이성을 잃는다는 것은 곧 허기에 먹힌 괴물이 되는 것.

"크흐으윽...!"

밀려오는 분노에도 녹록치 않은 발터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붙들었지만, 그의 눈 앞에 들이밀어진 현실은 무엇하나 변하지 않는다.

"다른.. 녀석들은..."

용사에게 달려들었던 동포들은 하나같이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잔해들 사이로 흩어져 핏물을 스며들게 하고 있다.

다르다.

전혀 다르다.

투기장의 앞에서 그를 막아섰을 때와는 전혀 다른 위력, 비교할 수도 없는 속도다.

명령을 내린 자신은 적어도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몸을 내던져 갑옷 하나 걸치지 않은 양팔로 용사의 일격을 받아낸 도라는 두 팔이 그대로 잘려나간 것도 모자라 그 검격이 복부에까지 깊이 파고들어가 있다.

분명 내 뒤에 있으라고 했을 텐데도...

"도라..어째서..."

"... 쿨럭.. 콜록 콜록.. 그때... 약속했잖아."

"약속..?"

도라가 내뱉은 약속이라는 낯선 단어는,

발터의 머릿속에새하얀 설산의 쓸쓸한 전경을잠시 드리우고 사라진다.

".. 너는 늘.. 헬레나 씨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난, 나는..."

"도라...? 도라!!"

"...."

그녀는 끝내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고, 생명을 잃어가는 육신에서 순혈자의 피는 빠른 속도로 사멸해 간다.

우드드득...

뚜두둑..! 뚝!

꾸드드득...!

뿌득!

몸을 뒤덮고 있던 암청색의 털들이 우수수 흩어져내리며그녀의 새하얀 살갗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강제로 크기를 키웠던 골격이 원래대로 짜 맞추어지며 덩치를 줄여나간다.

.. 이건 위험하다.

때마침 정신을 잃어 허기에 집어삼켜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신체의 개변은 상당한 고통과 피로를 수반한다.

그것도 이렇게 큰 부상을 입을 상태에서...

"발터 씨..! 도라를 데리고 물러나세요! 이 자식...! 힘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의 그 일격에서... 아직까지 살아남은 동포들의 수는 이제 고작해야 여섯,

"크아아악...!!"

아니 다섯.

"젠장... 젠장..!"

힘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다.

첫 일격에 쓰러지지 않았던 나머지 동포들 역시 먼지구름을 다시 한 번 가르는 금빛에 힘없이 쓸려나가고 만다.

자신에게 도라를 데리고 도망치라며 용사의 앞을 막아서던 그들이 모두 잔해 속의 다른 이들과 같은 꼴이 되어 흙바닥에 나뒹굴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용사는 여전히 한 손에만 검을 쥔 상태다.

"... 그렇군, 그랬나.."

발터는 하나 남은 팔로 정신을 잃은 도라를 안아든 채, 천천히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용사를 노려보았다.

.. 숨길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그 사제의 앞에서.

"... 이리하여 반쪽짜리 용사인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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