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22. 짐승들의 왕
* * *
22. 짐승들의 왕(1)
우리가 기억하는 고향에서의 마지막 밤은... 사랑하는 가족을, 친구를, 연인을 차가운 흙바닥 아래에 묻어야만 했던 비극이었다.
딱딱하게 언 바닥을 맨손으로 파내느라 벌겋게 부르튼 손가락과 남아나지 않은 손톱을 보았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차갑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이 차가울 뿐이다.
반대로... 이마가 찢어져 얼굴을 타고 흐르는 나의 피는 이렇게나 뜨거웠구나 하고 생각했다.
흘러내린 피를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밤하늘 위 무심하게도 밝게떠오른달을 올려다보았다.
핏물이 눈앞을 가리고, 서서히 달빛이 붉게 물들어 간다.
빼앗긴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이 부족하고 소소한 행복이나마 언제까지고 계속될 거라는 희망은 착각일 뿐이었다.
싸워 쟁취하지 않고서 그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여태껏 나보다 약한 것들을 사냥하며 식량을 구해왔음에도 이 당연한 사실을 왜 이제서야 깨닫게 된 것일까.
힘에 겨워 툭 떨어진 고개는 다시 한번 눈앞의 초라한 무덤으로 향한다.
동포들에게는 언젠가 용서를 구해야겠지.
나의 심장은.. 이미 그녀와 함께 묻었다.
이 가슴 속에 남은 것은 오직 복수에 대한 집착 뿐.
우리는 일어섰다.
피를 나눈 동포들과 함께.
심장을 바친 전우들과 함께.
짐승들의 왕, 그의 깊이 한 어린 울음소리를 들으며.
*
"노아!"
용사의 검이 마지막 남은 두 동포를 베어내고 그들의 운명을 이곳에서 멈추게 하려던 그 순간, 에단의 목소리가 그의 검을 멈추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것으로 보이는 사제는 당장 두 팔을 뻗어 그에게 치유를 내린다.
"에단 씨..! 역시 살아계셨군요."
따뜻한 은총의 기운에 욱신거리던 몸 안쪽에서부터 고통이 눈 녹듯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며, 용사는 눈앞의 적을 베어내는 것보다도 그를 지키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어쩌면 이미 저들이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는 실비아가.. 지금 놈을 상대하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용사는 짐짓 놀란 표정으로 먼지구름이 높이 치솟으며 요란한 굉음이 연신 들려오고 있는 투기장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에단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꾸구구구구구궁....!
방금 막, 아마도 지크프리트의 짓으로 보이는 흉포하기 그지없는 참격이 바닥을 뒤엎고 투기장의 또 다른 한 편을 무너뜨려 놓는다.
그 괴물의 발을 대체 어떻게 붙잡아 놓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에단 씨와 함께 있던.. 그 수인 소녀가..."
"그래, 우선은 네 검을 이리로."
에단은 다른 것보다도 먼저 그의 검을 건네받기를 요구한다.
용사에게 있어 이 두 자루의 검은 통상적인 무기의 개념을 넘어, 이 운명의 여정을 함께하는 동반자라 칭해도 될 정도겠지만 그는 흔쾌히 자신의 검을 건넨다.
"거룩한 빛이여... 사악한 어둠을 몰아낼 힘과 의지를 주소서."
사제는 검을 쥐고, 한 손으로는 긴 검신을 어루만지며 능숙하게 축복문을 읊어나가기 시작한다.
".. 인도자의 빛은 이치를 어지럽히는 악을 멸하고, 어두운 새벽 한줄기 여명으로 길을 밝힌다."
"... 이건.."
용사는 그의 몸속으로부터 꿈틀거리는 웅혼한 은총의 기운이 그대로 자신의 검에 담겨나가는 것을 가까이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 윽."
"에단 씨..!"
검의 칼날이 여명의 빛을완연히띠게 될 때까지 은총에 의한 축복을 부여한 에단은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했지만, 노아가 늦지 않게 그의 몸을 받아낸다.
"후우... 난 괜찮아. 나머지 한 자루도 이리로.. 놈은 어떤 상처라도 재생해 내고 있어. 그리고 그 힘의 근원은 분명 나와 마찬가지로 사악한 용의 저주겠지."
당장 싸우고 있는 소녀의 무기에 축복을 걸어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에단은 그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벗어나 용사를 찾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그저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놈을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지금 지크프리트와 싸우고 있는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방법이 과연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의지할 수 있는 게 너밖에 없다. 노아."
본디 무기에 신성한 은총의 힘을 입히는 것은 마물들에게나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저것은 이미 평범한 수인 혹은 순혈자라 부르기도 어려운 것이다.
자신의 몸을 재생시키는 이 저주는 분명 은총에 반하는 것이었으니 마찬가지로 지크프리트의 재생도 저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 맡겨주시길."
그렇게 두 자루 여명의 빛을 양 손에 쥐게 된 용사는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동시에,
상처 입은 맹수의 분에 가득 찬 울음소리가 투기장 전체를 쩌렁쩌렁 울려온다.
머리털을 곤두서게 만들고, 입안이 바짝마르게 만드는 짐승의 포효.
"또 내게서..!! 빼앗아갈 셈이냐....!!!"
단순히 목청을 높인 것만으로 주변의 먼지구름을 단번에 걷어내고 소녀의 작은 몸을 멀리 날려보낸다.
그렇게 드디어.. 이 자리의 모두가 투기장 중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저건, 대체..."
그리고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에단의 말대로 상처를 재생해 내고 있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을.
두 다리를 잃고 그 거대한 몸뚱이를 넘어뜨렸지만, 끈적거릴 것만 같은 핏덩이들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지크프리트의 몸 조각을 이어붙이고 있다.
그것은 재생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도 징그러운 형태다.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살덩이들을 끌어당긴다.
피의 결속, 아니 저주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 그.. 흐흐.."
문득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웃음소리에 시선을 잠시 끌어다 놓자, 그곳에는 용사가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지크프리트의 동포가 어느새 이 자리에서 물러나 하나 남은 팔로 피투성이의 여인을 들고 서있었다.
그의 이름은 발터,그는 이렇게 묻는다.
"너희들은... 궁지에 몰린 괴조를 사냥해 본 적이 있나..?"
궁지에 몰린 짐승을 사냥해 본 적이 있냐고.
"더이상 잃을 것이라고는 자신의 비루한 목숨 하나뿐임을 깨닫게 된 그것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고 있느냔 말이다."
자신의 왕을 바라보며 그 어떠한 격정적인 감정을 눈동자에 담는다.
저것은 환희일까. 혹은 두려움일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에게서온갖 열기가 뒤섞인 시선을 느끼며, 노아와 에단의 눈동자 또한 그 강렬한 시선을 따라 지크프리트에게로 향한다.
"... 설마.."
북대륙의 작은 항구마을에서 이미 한번 지크프리트와 싸워본 적이 있는 용사는 그 말의 의미를 대강 짐작해낸 듯하다.
시간벌이를 마쳤음에도 발터가 동포들을 지크프리트에게 곧바로 합류시키지 않은 이유.
일전의 용사와의 싸움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그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 헥터와 도라가 중상을 입어야만 했던 이유.
설산의 비극 속에서도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래... 원초 회귀다."
"크르르르르르륵....! 큭..!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불길한 피 냄새가 한층 더 짙어진다.
아니 어쩌면,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기에 그리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더. 이상... 내. 내게서어.."
지크프리트는 재생되어가는 자신의 몸을 바닥에 낮게 웅크리듯 가져다 놓는다.
지금껏 두 발로는 땅을 딛고 두 팔을 휘둘러 투기장의 검투사처럼 싸웠던 것과는 다르게,네 발로 바닥을 짚고 목을 앞으로 길게 빼내어 놓는다.
"그. 그 무엇도.... 빼앗아.. 가. 갈 수는.... 크헤르르륵... 크르륵..."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넘쳐흐른 핏물 섞인 끈적한 침이 흙바닥 아래 뚝 뚝 떨어져 내리고,
이제서야 그는 완전히 붉게 물들어버린 자신의 눈동자에 걸맞은 모습이 되어있었다.
설산의 비극은 원래대로라면 아케라에 전해지지 않았어야 했다.
눈발에 파묻혀 역사 속에서 잊혀졌어야 했다.
이미 오래전 스스로 발톱을 부러뜨리고 이빨을 뽑아내 투쟁으로부터 도망친 짐승들에게.. 악의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 하지만 이들은 동포들과 함께 이때까지도 이 대지 위에서 의지를 함께했다.
자신과 동포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다름아닌 지크프리트.
발터는 붉은 달이 떠오른 설산에서의 유일무이한 포식자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며전율했다.
"보아라. 저것이 바로.. 순혈자. 누구보다도 선조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선택받은 아이."
"...."
"우리들의.. 아니..! 짐승들의 왕이 가진 진정한 모습이다!!"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다고.
투쟁에 집착하던 이성.
운명과 승패에 묶인 이 싸움의 의미에서까지 벗어나,
이제 저 고독한 순혈자는 본능에 모든 것을 맡기고 오로지 빼앗기지 않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다.
이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남에게서 빼앗게 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목숨이든, 돈이든, 지위든, 명예든..
중요한 것은 빼앗기기 전에 빼앗는 것.
더 이상 잃지 않겠다는 선포와도 같은 포효.
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늑대의 울음소리가 투기장을 넘어서, 모르부스의 모든 이들이 듣고 두려움에 떨 수 있을 만큼이나 울려 퍼져 외벽아래와 골목 사이로 메아리칠 때까지..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