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29화 (129/137)

〈 129화 〉 22. 짐승들의 왕

* * *

22. 짐승들의 왕(2)

케흐르르륵... 크르르륵..

몸이 뜨거워졌다가,

크르르르... 크르륵....

차가워지기를 반복한다.

이상한 느낌이다.

나는 지금.. 싸우고 있는 걸까.

그르르르르...

새빨갛게 물든 시야 속의 풍경이 쉴 새 없이 뒤바뀌며 귓가에 들이치는 것은 거친 쇳소리.

끔찍한 파육음.

투기장의 단단한 흙바닥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괴롭게 터져나가는 굉음에 이어...

바람 소리.

휘오오오오오오...

그것은 좀처럼 끊어지지 않고 귓가를 시리게 파고들어온다.

온통 뜨거웠던 몸이 차갑게 식어간다.

열기를 식히고 있다..?

아니, 조금 다르다.

내 심장이 품은 열기는 조금도 식거나 하지 않았다.

여전히 피는 끓고 있는 것처럼 뜨겁다.

그러니 이건...

"아..."

새하얀 시야 속.

나는 내가 내뱉은 입김이 허공에서 흩어져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뜨거운 숨이 설산의 혹한을 이기지 못하고 사그라드는 그 모습은 나 자신의 무력감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것이기도 했다.

"지크...! 지크! 뒤를 봐...!"

모호하고 몽롱하게 뒤섞인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어느때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몸으로 순순히 뒤를 돌아보았다.

설산의 협곡을 가로지르는 칼바람보다도 가볍게, 그리고 빠르게.

"으아아아...!! 죽어라! 이 괴물자식!!"

나를 향해 긴 창을 들고 달려오고 있던 인간 병사 하나를 보게 되자, 가슴 속의 불덩이가 더욱 덩치를 키우는 느낌이다.

이를 참지 않고 두 팔을 휘두르자 그는 아주 손쉽게 튕겨나간다.

튕겨나가...?

그대로 찢어발기지 못했다.

저건 에단의 신성보호문인가...?

조금 다른데.

"히이이익..?!"

하지만 한 번 두들겨 깨지지 않는 것이라면 다시 한 번을, 두 번을, 일백 번을, 일천 번을 더 두드려서라도 깨부수면 되는 일이다.

눈앞의 병사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어 보이자 어째서일까...

조금이나마 이 고통스러운 열기에 위안이 되는 것 같다.

새하얀 눈이 쌓인 포근한 대지 위로 뜨거운 피가 흩뿌려진다.

내장과 살점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점차 식어가는 비루한 몸뚱이들이 하나 둘 쓰러져 나간다.

그렇게 나는 당장 눈앞의 열기를 차근차근 식혀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지크..!"

그렇게 아마도, 병사들에게 보호 마법 따위를 걸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마법사의 복부에 아가리를 파묻고 여린 살점을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을 때 즈음 다시 한번 익숙한 목소리가 멍한 정신을 일깨워 왔다.

털썩!

투둑...

"... 발터."

점차 식어가고 있는 몸뚱이를 이빨 사이에서 놓아주고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발터.

그런데.. 정말 발터인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어려 보이는데.

"헬렌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해, 아직 놈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고.."

헬렌,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헬레나를 그렇게 불렀지.

그녀라면 분명 어머니와 함께 마을의 여자들을 데리고 동굴의 샛길로 빠져나갔을 텐데.

하지만... 그곳은 안전하지 않잖아.

"어째서 가게 둔 거지?"

"지크..?"

... 모두 죽게 될 거다.

나는 어째서 보지 않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어울리지 않게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의 발터를 밀치고, 당장 기억 속의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크..! 놈들이 이곳에만 있는 게 아니었어...! 당장.. 헉...?"

그리고 마침 헥터가 내가 달려가려던 방향으로부터 다급히 뛰쳐나오며 모두에게 말을 전한다.

헥터.. 헥터...

그러고 보니 이 둘은 그류엘드 삼촌의 아들이었다.

형제...

발터 쪽이 형이었던가.

그런데도 발터는... 헥터를.. 어째서.

뭐, 이젠 아무래도 좋다.

더 움직이기 쉬운 네발로 비좁고 길이 복잡한 동굴의 샛길을 마치 휘파람 소리를 내는 바람처럼 가로질렀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비릿한 피 냄새가 금방 다시 코를 찔러들어온다.

.. 이곳에도 동포들의 피 냄새가 잔뜩 뒤섞여 있다.

"... 지.. 크..?"

"헬레나."

참상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피와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피를 함께 잔뜩 뒤집어쓰고 다 끊어져 가는 숨소리를 내고 있는 나의 혈육을 바라보았다.

부러진 손톱과, 칼자국이 깊게 생겨난 왼쪽 눈, 그리고 몸 여기저기에 박혀있는 화살과 검푸른 털가죽을 벌리고 남아있는 심각한 상처들.

가슴이 뜨겁다.

너무나도 뜨겁다.

"어머니는.."

헬레나의 힘겨운 시선이 아래를 향한다.

이를 따라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아..."

둘이 얼마나 분투해 주었는지는.. 내가 상대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병사와 마법사들의 시체가 지천에 널려있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나조차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그 어머니의 등 뒤에는 검푸른 털을 검게 물들인 핏자국들이 만연해 있다.

헬레나와 마찬가지로 창에 찔린 상처다.

어머니의 등 뒤를 한낱 왕국의 병사 따위가 잡아낼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그럼.. 이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서였을까?

차가운 바닥에 미동도 없이 몸을 누이고 있는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피투성이로 신음하고 있는 한 여자아이다.

그게 누군지는 금방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아이는.. 도라?"

힘없는 마을의 여성들을 지키가면서 병사와 마법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틀림없이 큰 고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순수하고 강인한 전사는 이렇게 말해온다.

"다.. 구해낼 수 없었어..."

"..."

"내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조금 더... 지크 너처럼.. 강했다면..."

어릴 때부터 헬레나는 잘 싸우지 못했다.

몸이 약한 건 아니었지만괴조 손질도 처음에는 몇 날 며칠을 악몽을 꾸며 앓아누웠을 만큼 비위도 약하고, 겁도 많다.

그런 주제에.. 늘 이렇게 누나 행세를 하려고 한다.

"... 누나 탓이 아니잖아."

그녀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하다.

몸에 무리가 가니 더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내가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미안해."

이렇게 사과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과 절망이 감정을 좀먹는다.

"지크..?"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나는... 이번에도 약속을.."

"...."

심장이 너무나도 뜨겁다.

아프다.

가슴께가 아려와서..

녹지 않는 얼음조각이 몸속에 찔러들어온 것처럼 욱신거려서...

.. 이게 내 탓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일까?

내가 허락도 없이 멋대로 바깥에 나가버린 탓에 이런 일이 되어버린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지금만큼은 어머니와 헬레나의 분투에 감사하고, 또 슬퍼하고 싶은데..

".. 괜찮아."

"...!"

"네 탓이 아니니까..."

".. 누나..."

붉게 물들어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점차 그 색을 잃어간다.

"넌...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그랬던 것뿐이니까.."

숨소리가 작아지고,

"지크 너는... 마음씨가.. 너무 착해서..."

기척이 옅어져 간다.

".. 늘... 걱정이야..."

입김이 사그라드는 것처럼,

어떻게 손써볼 새도 없이 손안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사라져간다.

"...."

"..."

소중한 혈육 둘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슬픔은, 마치 가슴께의 심장을 누군가 살점채 도려내 버린 것처럼 그곳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다.

"지크...! 지크프리트!! 헬렌은...! 헬렌은 무사한 거야?!"

"..."

뒤늦게 도착한 발터와 다른 마을 사람들이 이 참상을 발견하고 얼빠진 목소리로 신음하며 흐느끼기 시작했을 즈음,

나는 끈적한 피웅덩이 위에 무릎 꿇은 채 몸을 잃어버린 한 병사의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늘 이렇게 빼앗아 가기만 한다.

우리는 빼앗지 않기 위해 삶의 풍족함을 포기하고 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조용히 살아왔건만.

기어이 찾아내어 증오의 씨앗을 흩뿌리는구나.

서로 뺏고 빼앗기는 잘못된 역사 속 증오의 연쇄를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희생을 감수했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 추운 설산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투쟁의 적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을 가장 약해져 있을 때 영원히 빼앗을 기회 말이다.

비열한 인간들은 우리의 희생에도 언젠가 다시 순혈자가 나타나 다시 수인들을 하나로 결집시켜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할까 두려워했고, 우리가 죽은듯이 살아온 지 수십 년이 지날 때까지도 여전히 순혈자에 대한 수색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그들은 성공했다.

근친혼을 통해서라도 순혈자의 피를 계승해야 했지만 어머니도, 헬레나도 이렇게 죽고 말았으니 아무리 피가 짙은 상대와 아이를 만들더라도 앞으로 이 피는 대를 넘어갈수록 옅어질 것이다.

우리도 그걸 알기에 이들을 싸움으로부터 먼저 도망치게 한 거고,

그걸 놈들도 알기에 이곳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던 거겠지.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내 대에서.. 이 싸움을 끝내면 돼."

유일하게 살아남은 순혈자인 나의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버린다면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니까.

"지크..?"

"이 겁쟁이들은.. 우리에게 조그마한 평화도 허락할 생각이 없어."

"..."

"그러니, 이들을 모두 갈가리 찢어발겨 아케라의 대지를 놈들의 피로 물들이고.. 우리의 동포가 살아갈 땅의 거름이 되게 하겠다."

나의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스스로의 과오를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선으로 행하는 정의나 희생 따위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이제는 깨달았다면...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이 투쟁을 끝내리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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