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30화 (130/137)

〈 130화 〉 22. 짐승들의 왕

* * *

22. 짐승들의 왕(3)

무겁다.

이 두 어깨에 짊어진 자책과 죄악감에 자칫 짓눌려버릴 것만 같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계속해서 연기해 나간다.

동포들이 내게 기대하는 짐승들의 왕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그러니.. 이전의 순박하고 정 많은 청년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갈 일은 없다.

"크르르르륵.. 크르르..."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은 잊지 못할 과거의 소리인지, 아니면 나의 탐욕스러운 뱃속에 갇힌 수많은 생명의 마지막 단말마인지는 모르겠다.

붉어진 시야 속으로 어지럽게 쏟아져 내리는 검격은 하나뿐이 아닌지 하나를 피하면 반드시 나머지 하나가 살점을 도려내고 있다.

그때마다 상처가 불타오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오는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악...!!!"

동포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절대적인 강자가 되어야 했다.

내 몸 안에 흐르는 이 피에 부끄럽지 않도록 책임과 의무를 떠맡아야 했다.

인간과 수인 사이에서 이어져온 기나긴 증오의 연쇄를 끊어 낼 수 있는 건 나뿐이었으니까.

마지막 순혈자인 나만이.. 내가...

해내야만 한다.

동포의 미래와 가족의 복수를 위해 나는용사 일행을 물어 죽인 희대의 광견이 되어야 했고,

무고한 이들을 노인과 아이, 여자 할 것 없이 모조리 물어뜯는 악마가 되어야 했다.

무겁다.

이 투쟁을 끝내야 한다는 처음의 굳은 의지는 점차...

이 투쟁을 끝내고 싶다는 바람으로 바뀌어,

나를 짓눌러 온다.

"날... 크르르륵..! 방해 하지 마라..!!!"

상대를 찢어발기기 위해 휘둘러진 나의 두 팔은 반드시 허공을 가르거나, 저 뜨거운 빛을 머금은 날붙이에 튕겨져나간다.

저 손목을 물어뜯기 위해 아가리를 길게 내뻗어도 역시 마찬가지로 금방 방해가 들어온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마음대로 되고 있는 거라곤 무엇 하나 없었지만..

나의 두 어깨가 어째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렇게나 가볍게 느껴지는 것일까.

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나는 지는 건가...?

내가... 질 수 있는 건가..?

'네놈은 동포들을 지키고 싶은 거냐, 아니면 그저 싸움을 그만두고 싶은 거냐.'

낮고 담담하게 울려 퍼지는 사제의 목소리가 몽롱한 정신 속에서 다시 한번 들려왔다.

분명 그의 이 말을 내심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거겠지.

나는... 정말 싸움을 그만두고 싶은 건가?

그만 지쳐버린 걸까.

'힘에 취해 목적을 잃어버리고 그저 빼앗기만 할 줄 아는 쓰레기들을, 나는 짐승이라고 부른다.'

아니다.

그게 아니다.

힘 따위에 취해 목적을 잊은 적은 단 한 시도 없다.

오히려 이 힘은 내게 원하지 않는 족쇄만을 강요할 뿐이다.

... 하지만 나는 그의 앞에서 이를 부정할 수 없었다.

목적을 위해 동족을 포식하고 사지로 내몰았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단 하나의 분기점에서라도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미래는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을까.

어머니... 헬레나.. 그류엘드 삼촌...

내 목소리가 그들 중 단 한 명에게라도 닿을 수 있다면, 부디 답을 듣고 싶다.

나는...

그저..

*

카강..!! 까드드드드드득...!

공격을 빗맞춘 붉은 눈의 짐승은 가속이 붙은 그 커다란 덩치를 네 발로바닥을찢어 뒤엎는 것으로 겨우 멈추고 숨돌릴 틈도 없이 재차 달려들 준비를 한다.

".. 크르르륵..! 방해 하지 마라..!!!"

서로의 빈틈을 메꾸는용사와 소녀의 협공은 더 이상 제 안위를 신경쓰지 않고 달려드는 저 흉포한 공격을 침착하게 몰아내고 있다.

처음 쥐어 볼 한손검을 용사에게 넘겨받은 후, 마치 평생을 수련해온 검사처럼 능숙하게 이를 휘두르는 소녀,

오로지 오른손만으로도 이전과 달라진 것 없는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용사의 모습은... 가히 둘이서 하나의 영웅을 그려내고 있는 것만 같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그어어어어어...."

은총을 머금은 여명의 빛이 지크프리트의 몸통을 갈라낼 때마다 터져 나오는 끈적한 피는 마치 살려달라고 몸짓하는 듯한 수 명의 아이들의 형상으로 꿈틀거리며 바람 빠지는 비명소리를 내다가 끝내 무너져 내린다.

용의 저주에 묶여있던 희생자들의 영혼이 은총에 닿아 해방되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마치 지옥도를 연상케 한다.

은총의 축복으로 연단된 검이 지크프리트의 재생능력을 현저히 낮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건, 끝이 보이질 않는다고 해야할지.

"... 미안하다."

속으로만 생각하려 했던 말이 끝내 입안에 남아 그대로 흘러나오게 된다.

저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있다고는 하나, 영혼이 불타오르는 듯한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안다.

그로 인한 비명소리이다.

저들이 저런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크르르르륵..."

내 목소리가 나지막이 내뱉어진 그 순간.

과연 정말로 그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흉포하게 날뛰던 지크프리트의 움직임이 돌연 멈추었다.

저 부자연스러운 행색은.. 지금까지 놈의 뱃속으로부터 해방시킨 무고한 이들의 수가 이젠 슬슬 세 자리에 가까워졌기 때문인 걸까.

".... 나아.. 는.."

킁킁...

놈의 코가 냄새를 찾듯 허공을 향해 치들고 몇 번을 들썩 거린다.

"동포의... 피, 피 냄새.. 내.. 내가... 지켜... 야....."

쿵. 쿵.. 쿵.. 쿵..

그리고 다음 이어진 광경에 나는 물론, 지크프리트를 상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맞서 싸우던 실비아와 노아마저도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 도망치고 있다.

잃어버린 이성이 되돌아온 것일까 생각했더니... 저건 대체..

"저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됩니다..! 쫓겠습니다!"

얼빠져 있던 나를 일깨운 것은 노아의 외침이었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금방 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지크프리트의 행동은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나도.. 윽, 케헥..!"

"실비아!"

용사가 먼저 발걸음을 떼었고, 실비아도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그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이내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피를 토해내고 만다.

소녀의 입가에서 쏟아져내린 피는 꺼림칙하게 느껴질 만큼이나 새까만 색을 띠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잠시 싸움이 멈추었다고는 하지만 저주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무리를 하고 있다.

스스로를 상처 입혀가며 상대와 싸우는 것은 정신적인 피로를 배로 느낄 수밖에 없는 처절한 싸움 방식이다.

그러니...

더 무리해서는 안되건만..

"분명 지금 멈췄다가는... 금방 다시 일어나지 못해.."

하지만 소녀는 입가에 묻은 피를 옷소매로 거칠게 문질러 닦아내고, 노아에게 건네받은 검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바로 세운다.

이 눈동자... 분명 어디선가..

".. 후회하고 싶지 않아."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순간에 불쑥 고개를 들이민 과거의 기억으로 보이는 작은 파편 하나가 소녀를 붙잡으려던 내 손을 막아선다.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저 사람은.. 분명..."

"...?"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주저하는 사이 소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민첩한 몸놀림으로 용사의 뒤를 쫓는다.

물론 나 역시 그 뒤를 쫓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다..

철그렁...

문득, 귓가로 들려온 쇠사슬 소리에 몸을 굳히게 되었다.

지금 관은 내 등 뒤에 있지 않다.

투기장 한편에 세워둔 마차에 두꺼운 천으로 가려 숨겨두고 왔으니 이 익숙한 철성이 들려올 일은 없어야 했다.

"설마... 왜 하필.. 지금... 이런 때에.."

철그렁...

이를 악물고 벗어나려 했지만 나는 정신이 수렁 밑바닥으로 끌려들어 가는 듯한 불쾌한 느낌을 받으며 귓속을 울려오는 사슬 소리에 그대로 무거운 몸을 주저앉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이대로 쓰러지는 것을 간신히 버티는 것뿐이다.

지크프리트가 흩뿌린 피에 다시금 붉게 물든 땅 위로 짚어놓은 손이 마치 녹아내린 것처럼 바닥과 하나가 되어 아무리 힘을 줘도 떨어지지 않는다.

소녀가 한계를 맞이했을 때, 내가 반드시 그 곁에 있어야 했다.

아니.. 이미 한계일 거다.

지금은 그저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 내가.. 이를 바로잡아줘야... 하는데...

대체 무엇이 내 발목을 잡아끈 것일까.

이렇게 중요한 순간, 중요한 때에...

위화감..?

나는 이 싸움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만 건가.

여명의 빛을 닮은 영웅의 찬란한 싸움을 보고 대체 무엇으로부터, 어떤 이유로?

어느새 주변은 고요를 가장한 침묵으로 잦아들었다.

그저 바닥에 맞닿은 내 무릎과 손바닥을 녹여내며 뱀처럼 꾸물거리는 기이한 형상의 사슬을 내 몸 위로 감아드는 아주 조용한 위협만이 있을 뿐이다.

이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생각한 그 순간, 어째서인지 가슴이 뜨거워져 온다.

맥동한다.

두근.

소녀의 목소리를 빌려 '그녀'가 내게 해준 말이 나를 일깨운다.

'이 소녀 역시도 에단.. 당신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런 나를 지켜주려 스스로 목숨을 걸고, 분명 고통스러울 길을 선택한 한 소녀가 있다.

내가 불안정한 정신을 제대로 붙들지도 못하고 한심하게 주저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위해 아픔을 참고 있을 소녀가 있다.

뚝... 뚜두둑..!

이번에는 내 어깨를 붙들고 깨워줄 상냥한 이는 없다.

"... 이유라면.. 이미... 알고 있잖아..!"

까득..!

이를 악물고, 바닥으로부터 손바닥을 떼어낸다.

녹아내려 바닥과 하나가 되어버린 손바닥을 억지로 떼어내려 하자 생살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정작 두 손이 아프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은 이 정체 모를 열기가 계속에서 가슴 안쪽을 찔러대는 고통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일까.

"끄으으으윽...!"

뚜두둑...! 뚝! 뚜둑!

덩굴처럼 감겨있던 사슬들이 투박한 소리와 함께 뜯어져나간다.

용사와 소녀의 뒤를 쫓기를 주저했기에 나는 이러한 환각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 내가 어떠한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일 거다.

아니, 사실 위화감이라면 계속해서 받아오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허억.. 헉."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다.

언제까지고 기다려주지도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덜덜덜 떨리는 두 손을 앞으로 들어 보이자, 뜯어져 나갔을 손바닥의 살점이 제대로 붙어있는 것이 보인다.

피가 묻어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내 피가 아니다.

바닥에 고여있던 수많은 이들 중 누군가의 피일뿐이다.

나는 마찬가지로 떨리는 다리에 다시금 힘을 주어 힘겹게 일어섰다.

의지를 흔들리고 만 그 여파라기보다는 애초에 내 몸 상태는 스스로 걷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가야 한다..

엇갈린 그 둘의 곁으로.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