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33화 (133/137)

〈 133화 〉 22. 짐승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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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짐승들의 왕(6)

언젠가 한번,

어머니께 아버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무척이나 강하고, 그리고 자상한 남자였다고 대답해 주셨지.

어째서 나는 태어난 이래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인지, 왜 우리들은 이 추운 설산에 숨어살고 있는 것인지.. 그 이상으로는 끝내 말해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아마 내 성인식이 끝난 그날 밤, 여전히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는 어머니께 나는 처음으로 반항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 동굴을 뛰쳐나온 나는 밤하늘 아래 외롭게 빛나는 설산에 이 몸을 맡겼다.

최근만 하더라도 식량이 떨어진 탓에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싸움이 날 뻔하지 않았던가.

어머니 다음으로는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세고 재빠른 내가 괴조를 한 마리건 두 마리건 잡아오겠다는 걸 어째서 계속 막는 건지 분이 차올랐다.

하지만 부글거리던 감정은 금세 가라앉았다. 처음으로 보게 된 달빛을 머금은 설산의 풍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하얀 눈 위로 달빛이 반사되어 주변을 밝히고, 마을 안에서는 맡아볼 수 없었던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며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그 이후로는 아마.. 정신없이 설산을 내달렸던 것 같다.

괴조라도 한두 마리 잡아 돌아간다면 어머니도 나를 인정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하얀 눈 위로 내 발자국을 남기며 돌아다녔을 즈음 나는 어느새 산의 중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때 들려온 비명소리를 나는 듣고도 무시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 그것은 괴조에게 습격당하고 있던 인간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있던 뾰족한 귀나 꼬리가 달려있지 않았고, 귀끝이 길쭉한 것도 아니었으니 확실했다.

등 뒤에는 나뭇짐을 지고, 손에 든 도끼 한 자루를 정신없이 휘둘러 대고 있던 그 인간은 이미 한 쪽 팔을 괴조에게 물려 다쳤는지 눈밭 위로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한동안거세게눈보라가 쳤으니 잠잠해진 오늘밤이라도 장작을 해가려다 운나쁘게 괴조와 마주친 모양이었다.

마침 괴조를 찾고 있기도 했던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 놈의 목을 붙잡아 비틀었고, 마을 사람들 이외에는 절대 내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했던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린 건 그 이후였다.

인간은 괴조의 목을 한 손으로 붙들고 선 나를 보곤 나뭇짐과 도끼마저 내팽개치고 괴성을 지르며 달아났다.

감사 인사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목숨을 구해준 상대를 마치 괴조보다도 더한 괴물취급 하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기는 했다.

그때 괴조와 함께 그 인간까지 죽이지 않은 것.

그게, 파멸로 내딛는 나의 첫걸음이었다.

꽈직..!

"그륵... 그으윽...."

심장에 틀어박힌 단검의 칼날이 제자리에서 반바퀴를 돌아, 더 이상 수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음을 선고하는 소리다.

거의 다 이어 붙어가던 상반신과 하반신이 바닥을 향해 힘없이 허물어져 내린다.

쿵... 하고, 이 머리를 울리는 소리는 분명 쓰러진 내 몸뚱이가 낸 소리일 것이다.

드디어, 드디어 나는..

... 이곳에서 쓰러지게 된다.

"... 어머니.."

어머니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일찍 모든 것을 말해주지 못 한 자신을 탓하였다.

인간들에게 있어 순혈자란 어떤 존재인지, 그들의 눈에 비칠 내 모습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곤 어머니는 당장 그류엘드 삼촌과 어른들 몇 명을 산 아래로 내려보냈다.

나는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다. 나를 본 그 인간을 죽여서라도 입막음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이다.

"으흐흐... 쿨럭.."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 했다.

한순간의 선의가 파멸의 씨앗이 될 줄 누군들 알았을까.

스윽..

"...?"

문득 한쪽 팔에서 느껴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그곳에는 내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얹어 놓은 한 명의 수인 소녀가 있었다.

.. 이건 뭘 위한 행동인 걸까.

"... 실비아.. 라고 했던가?"

".. 응."

커다란 손등 위에 놓인 소녀의 손은 너무나도 작다.

하지만... 너무나도 따뜻하다.

단순히 내 몸이 식어가고 있기 때문인 건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딘가 그리운 느낌마저 들어서...

"싸움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 그렇겠지. 아무래도."

나라고 해서 이런 결과를 바랐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결과가 되어버린 건.. 단순히 내 힘이 부족했던 걸까.

"더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너무 슬프니까."

"..."

"그러니까 도망치는 것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

저 말은, 분명 어디선가..

이건... 어머니의, 나의.. 어머니의...

... 떠올랐다.

복수의 길에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 여겨, 그들의 무덤 깊이 가죽 자루에 함께 담아 묻어버린 어머니의 수기.

나는 그날 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뱃속에 헬레나와 내가 생겨나자, 아버지는 신뢰하는 부관인 그류엘드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몇몇 전사들의 가족과 함께 전선으로부터 빼돌렸다.

자식이 생기자 늘 싸움과 피로 가득 차 있던 둘의 마음속에도 부성애와, 모성애라는 것이 함께 생겨나버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미안하다는 말을 나와 헬레나에게 전해달라 했다 한다.

너희를 위해 모든 것을 내버릴 수는 없는 못난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하지만 그 행동조차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나는 아버지의 사과를 어머니에게 전해 듣지 못 한 거겠지.

아버지는 결국 전쟁에서 수많은 인간들을 쓸어버리고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히고 나서야 그 목숨을 잃으셨다고 한다.

물론 전력의 절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순혈자 둘을 잃은 수인들도 더는 싸울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아버지의 희생 덕분에 설산으로 도망친 배신자인 우리들이 수인 전사들의 추격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어머니의 수기에 그리 적혀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선택은 동포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평화롭게 살면서.. 그 작은 평화에 끝내 만족하지 못하고 불길에 스스로 뛰어든 어리석은 짐승이고 말이다.

"그런가.. 그런 거겠지."

비록 그것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평화라고 할지라도... 나는 어머니와 헬레나가 목숨 걸고 지켜낸 나머지 동포들을 데리고 다른 안전한 곳을 찾아 그들을 이끌었어야 했다.

끝내 모두를 겪을 필요 없는 고통 속에서 복수를 앓다 죽게 만든 것보다는..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이미 늦은 지금에서야 나는 후회한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모두는..

... 아니.

"아니.. 역시 인정할 수는 없겠군."

"...?"

가슴속에 품은 이 증오와 절망을 해소하기 위한 복수를 대신 이뤄줄 이 없다면, 적어도 나는 평화 속에서 썩어갔을 거다.

다만.. 그렇다.

"투쟁은..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내가 틀린 게 한 가지 있다고 한다면... 사악한 용의 속삭임에 혹해버리고 만 것이겠지."

"... 사악한.. 용."

"그래, 쿨럭.. 쿨럭쿨럭..!"

"지크?"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지금 이 녀석이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싶었으니 말이다.

"... 악을 물리치기 위해.. 나까지 악이 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

뻑뻑한 눈동자를 굴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수인 소녀를 바라보았다.

분명 소녀의 손에 들려있는 저 새까만 단검에 나의 죄악으로 가득 찬 심장이 꿰뚫렸다.

그흐흐...

어째서 신이라는 작자는 최후의 최후에,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다음에서야 미래를 이어갈 또다른 희망을 보여준 것일까.

지금까지 빼앗아온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에게 사죄할 기회라도 준 것일까?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어찌 되었든 이 마지막 선택만큼은 부디 틀리지 않았기를 바란다.

"실비아...!"

... 아, 이건 그 성가신 사제 놈의 목소리다.

슬슬 정신이 멀어져 가는 게, 내게도 지옥불에 떨어지기 전 잠깐의 안식이 찾아오려는 모양이다.

그러니 확실히.. 말은 남겨놓고 가야겠지.

".. 에단, 거기 있나?"

"..."

대답하지 않는 꼴을 보아하니 곁에 있는 모양이다.

눈꺼풀이 무겁다. 원래도 무거운 몸이었지만, 안식의 무게에는 견줄 수 없다.

"반쪽짜리 용사 놈... 쿨럭.. 극흐흐.. 그놈은.. 양날의 검이다... 그리고 그 검자루는.. 네놈이 들고 있지도 않아..."

".. 노아를 말하는 건가?"

역시나 옆에 있었다. 악당이 죽기 전에 지껄이는 말에 혹하기나 하긴.

이런 녀석에게 정말로 미래를 맡길 수 있는 걸까?

뭐.. 나름 제대로 되먹은 전사라는 건 알겠지만 말이다.

"... 어디 한 번 잘 해봐라. 네 옆의 꼬맹이.... 아니지, 그 작은 전사와 함께.."

그리고, 붉게만 물들어 있던 시야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독기를 억누르던 순혈자의 피가 사멸해가자 용의 저주가 날뛰기 시작한다.

하지만 고통은 잠깐이었다.

쌓아온 죄업에 비해 안식은 조금 일찍 나를 삶에서 건져내 주었다.

마음이 무겁지 않은 이유는 나의 숙명과도 같았던 미래를.. 그 둘에게 떠넘기듯 쥐여주고 왔기 때문일까.

정말이지.. 끝까지 부끄러운 삶이었다.

배신으로 쌓아올린 평화 속에 살다가, 선의를 배신당해 파멸을 맛보고, 끝끝내 모든 동포의 믿음과 기대마저 배신한 끝에, 날 쓰러뜨린 어린 소녀에게 위로받고, 꾸중이나 들었다.

피의 저주인지. 혹은 용의 저주인지.

어쩌면 광대의 최후인지.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아도, 이곳에서 나는 멈춘다.

난 그저..

모두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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