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23. 피어오르는 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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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피어오르는 악의(1)
푸스스슥...
저주의 독기에 집어삼켜지고만 순혈자의 거구는 썩어문드러져 내리듯 빠르게 형체를 무너뜨리며 사라져가고 있다.
질긴 근육이든 단단한 뼈든 할 것 없이 모조리 검은 가루가 되어 흩어져가는 이 죽음은 불쾌할 만큼이나 고독하게 느껴진다.
"아.. 실비아."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울컥거리며 연신 검은 피를 쏟아내고 있는 실비아를 끌어당겨 내 품에 눕히고 은총을 있는 대로 때려 박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저주의 악취가 진해져 있었던 만큼 소녀의 몸이 얼마나 엉망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화아아악...
은총의 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히며, 쓸쓸한 검은 가루들을 어둠 속으로 밀어낸다.
치유를 위해 들어올려진 팔 한 짝이 보기 흉할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나와 소녀의 몸 상태는 비교할 만한 것이 되지 않았다.
몸 전체에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는 저주의 기운을 몰아내는 것과 동시에 독기에 잠식된 신체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분명 쉽지 않은 일인데다가.. 시간에 여유가 없는 이상 상냥한 방법을 고를 수도 없다.
"윽... 으윽.."
결국 정신을 잃은 채로도 소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롭게 신음하기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은총으로 저주를 단번에 불살라 없애고 그 여파로 피해를 입은 신체의 수복이야말로 지금 내가 저지르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당장은 머릿속의 모든 잡념을 밀어 넣어두기로 했다.
티끌만큼의 저주라도 남겨놓았다가는 숨 죽인 채 덩치를 키워 소녀를 좀먹으려 들 테니 지금 집중해야 한다.
"커윽..! 쿨럭..!"
울컥, 울컥..
주르르륵... 후두둑!
투둑..
끈적거릴 것만 같은 검은 피가 한 번 더 소녀의 입으로부터 쏟아져 내렸다.
이만한 피를 쏟아내고도 정말 괜찮은 걸까 싶을 만큼의 양이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치유를 멈춰야 할지에 대한 고뇌가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래서는 본말 전도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실비아."
"으... 으으.. 그윽.."
그 사투 끝에 이만한 적을 쓰러뜨리고... 말한 대로 나를 지켜냈다.
그러니 이대로 죽는 것만큼 허무한 것도 없다.
".. 시르."
어째서일까,이브가 생사로에 서있을 때조차도 자신의 애칭을 불러주기를 고집했던 것이 문득 떠오른 나는 소녀의 작은 손을 붙들고 기억 속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모친이 그녀를 부르던 그리운 애칭이었다.
물론 목소리에 반응한 소녀의 귀가 한차례 쫑긋거렸을 뿐, 정신을 잃은 채로 제대로 의미를 알아들을 수도 없을 테니 숨이 점점 옅어져 가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켁..! 우욱..!"
왈칵..! 후두두둑...!!
그렇게 또 한차례 소녀의 입에서 검은 피가 쏟아져 나오고 말았다.
"시르...!"
이 작은 몸에서 조금이라도 더 피가 빠져나갔다가는 버티지 못할 거다.
이전보다 훨씬 많이 쏟아져 나온 검은 피를 보며 나는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느낀다.
"케흑.. 콜록, 콜록..."
"아..?"
그러나 이내 나는 그렇게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방금 전 검은 피를 쏟아낸 것을 끝으로 그녀의 숨소리가 천천히 안정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하하..."
설마하니..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실비아는 저주와 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주가 이미 잔뜩 퍼져더 이상 정화될 수 없는피를 붙들지 않고 토해내는 것으로 한층 치유가 편해지도록 한 것이었다.
물론 이 이상으로 몸에서 피가 빠져나갔다가는 목숨이 위험해지는 도박 수에 가까운 선택이었지만...
이 소녀는 대체,
대단하다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
이번 일이 끝나면 잠깐이라도 좋으니 소녀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편이 좋겠다.
무언가 물어볼 게 있다기보다는 무엇이라도 좋으니 대화를 시작 해보자는 느낌이다.
본연의 모습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괴물을 상대로 자신또한 괴물이 되는 법 없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이 소녀가 보여주었다.
마지막 순간.. 소녀는 용의 저주도, 그 정체모를 힘에도 기대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고난을 극복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새액.. 색..."
전신을 불살라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지독한 치유가 끝날 때까지 소녀는 내 품에서 고통을 인내하며 끝까지 버텨냈다.
고른 숨소리, 그리고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저주의 기운에 안심하게 된다.
그래도 혹시 몰라 한 번 더 꼼꼼하게 해주와 정화를 행한 나는 소녀를 부들거리는 양 팔로 들어안았다.
"... 아."
그리고 이다음으로 용건이 있는 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쓰러져 있었을 금발머리의 용사가 어느새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있었다.
한없이 푸른 눈동자가 말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
아니, 그가 바라보고 있는 건 내게 안겨있는 실비아 인가?
".. 노아."
자칫 주저할 뻔했지만, 나는 제대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크프리트를 쓰러뜨리고 나서 용사인 그에게는 할 말이 있었다.
"네, 에단 씨."
"...."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은데 말이죠."
분명 할 말이 있었지만,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이 어느새 노아는 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음.. 사악한 용의 축복을 받은 대주교 중 한 명을 이 소녀가 쓰러뜨린 거군요."
"... 너는.."
"용사로서 조금 더 분발하지 못 한 저 자신을 책망하게 되네요."
저 그립게 느껴지는 얼굴, 순수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분해하는 저 모습은.. 틀림없이 그가 내가 알고있어야할 노아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 그러나 결코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너는.. 내가 만들어낸 환영인가?"
눈을 조급하게 찡긋거리며 어색하게 웃은 그는 엄지를 아랫입술에 가져다 대며 내 시선을 피한다.
또 다시, 눈에 익은 저 버릇.
".. 아니라면 과거의 망령이냐."
"아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노아가 없었다면 분명 이 싸움에서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혼신의 일격은 지크프리트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마지막 일격을 가해, 죄악으로 점철된 생을 안식에 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실비아.
이는 신탁이 제멋대로 짜놓은 운명의 판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다.
"네 손을... 보고 싶은데."
나는 결국 마지막 확인을 위해 끝내 담아두고만 있던 이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꼭 보셔야 하나요?"
".. 그래."
지금껏 느끼고 있었던 위화감의 정체,
그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그러나 숨겨두고 외면해온 한 가지 진실과 계속해서 맞물리고 마는 눈앞의 이 용사 때문이었다.
".. 물론 안될 것 없죠."
웃으며 흔쾌히 양손을 내민 용사였지만, 나는 분명 그 속에서 잠깐의 주저를 읽을 수 있었다.
스윽.
먼저 그의 오른손의 장갑을 벗겨내자 온통 굳은살과 살집이 찢어지고 아문 흉터가 지저분하게 남은 틀림없는 용사의 손이 보인다.
하지만...
스륵..
"...."
나머지 왼손의 장갑을 벗겨내고 나서 나는 그에게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노아..?"
그의 왼손은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질 만큼이나 깨끗했다.
단련된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남지 않은 왜소한 손이 그곳에 있었다.
검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휘둘러 본 적이 있는지 의심이 될 만큼이나 깨끗한 손.
"... 우선 나가도록 할까요? 조금만 더 지체했다가는 무너질 것 같으니까요."
"노아..!"
나는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아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그가 왼팔로 나와 소녀를 붙잡는 것이 먼저였다.
"...!!"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검을 뽑은 그는 천장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나와 소녀를 데리고 높이 뛰어올랐다.
쿠구구궁....!!
그의 말대로 지상과 지하에서 지크프리트와의 연이은 싸움으로 충격이 누적된 투기장의 지반은 노아의 검격에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바위가 서로 부딪혀 깨져나가는 굉음이 귓전을 때리며 속을 울린다.
구르르르르릉....
꾸구궁...
거대한흙먼지가 구름처럼 치솟았다가 그것도 결국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쯤, 내 시야에는 다 무너져 평지만 남은정도가 되어버린 투기장의 모습이 들어와 있었다.
일평생을 맡겨진 복수로 투쟁해온 지크프리트에게는 어울리는 무덤이 아닌가 싶을만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안정된 지반 위에 내려서고 나서야 노아는 나와 소녀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주었다.
"... 노아, 너는 대체.."
"정말 죄송하지만 에단 씨, 지금은 말해드릴 수 없어요."
"나는.. 너를 믿어도 되는 건가?"
노아는 내 물음에 역시 시선을 피하며 한 발자국을 뒤로 물러선다.
"저는..."
그 모습에서 이유 모를 안타까움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그쪽으로한 발자국 다가서려 했으나,
아직 붕괴의 요란한 소음이 가라앉지 않은 이곳에 불쑥 끼어들어온 낯선 목소리가 이를 막아서고야 말았다.
"아아, 자네들인가."
"...!!"
"나의 충성스러운 기사와 소중한 제국민들을 해친 사나운 짐승을 쓰러뜨려준 것은."
특별히 마법의 기척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딘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남성의 목소리.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바늘에 찔린 것처럼 퍼뜩 고개를 돌리자, 무너지다만 투기장의 외벽 잔해물 위로 부자연스럽게 솟아오른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은 한 개가 아니었다.
"...!"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제외하고도 마치 이쪽을 포위하듯 간격을 맞춰 원으로 늘어선 그림자들을 자세히 살피던 나는 직접 목소리를 낸 이를 제외하고는 그들이 하나같이 갑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피가 말라붙은 것 같은 칙칙한 검붉은 색감의 갑옷을 입은 이들.
그러자 머릿속에 당장 떠오른 것이 있었다.
'황제의 칼날.'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하지."
까드드득,
까득.
낮게 울리는 목소리 사이로 작게 들려오는 정체모를 거친 마찰음은 그의 꺼림칙한 분위기에 불안감을 더한다.
그리고 그 정점을 찍은 것은 멀리에서조차 위험해 보이기만 하는 저 어둠 속의 희번득거리는 눈빛이다.
까득...!
"그러니.. 그래, 한 가지 구미가 당길만한 거래를 제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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