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35화 (135/137)

〈 135화 〉 23. 피어오르는 악의

* * *

23. 피어오르는 악의(2)

모르부스의 중앙 고지에 위치한 황성의 지하는 각 4개 구역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존재한다.

지하수를 정화하는 성물의 존재와 민생의 밀접한 관계가 그 첫 번째 이유로, 두 번째는 물론 지도자의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위해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르부스가 폐쇄적인 국정을 계속해 나가면서도 자급자족의 겉모양새라도 났던 이유는 깨끗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따라서, 지하 수도는 물론 침입에 따른 성물의 도난 혹은 파괴 등을 저지하기 위해 경비가 필수적인 공간이지만 동부지구에서부터 역병이 시작되었을 즈음부터는 지하수의 정화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내부의 자세한 상황을 알지는 못하지만 더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성물을 지키기 위해 인력을 쓰는 것도 낭비.

실제로 저항군의 눈과 발이 알아봐온 정보도 일반 병사 정도나 지하 수로의 각 입구를 지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째서.. 황제의 칼날이 이곳에."

황제의 직속 부대인 저자가 아니라 말이다.

"잔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당장 모두 함께 맞서 싸워도 저 하나의 칼날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에서 무리한 돌파는 하고 싶지 않네요. 하지만, 저 앞에 있을 우리의 가족들을 내버려 두고 이대로 도망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녀의 의중을 읽은 덩치의 사내, 다르크는 허리춤의 둔기를 집어 들었다.

"황제의 칼날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건 예상하지 못 한 상황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두 조로 나뉘어 하나는 유인을, 나머지 하나는 침투하여 일전에 계획해둔 경로를 따라 신속히 구출작전을 감행합니다."

"... 저 괴물을.. 유인입니까."

"물론 내부에 황제의 칼날이 더 있을 경우 즉시 모든 작전을 포기하고 도주해야 합니다. 의미없이 내버리는 죽음만큼은 막고 싶으니까요."

반란군의 이들이 어떤 각오나 희망 따위를 가지고 이곳에 왔는지는 저마다 다르지만 진심이 아닌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인다.

그 이유라면 물론 저 칙칙한 붉은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 단 한 명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유인이라고는 해도 제대로 도망칠 수나 있을까 싶은 괴물 같은 상대다.

흔쾌히 미끼 역을 자처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유인 조에는 다르크가 함께할 겁니다. 이길 수는 없더라도 그라면 충분히 버텨내며 시간을 끌어줄 수 있을 겁니다."

"오오.. 다르크가.."

"그 이외에는.. 흣?"

쩌억...!

잔느는 설명을 이어나가려다 자신의 얼굴에 갑작스럽게 튀어오른 뜨겁고 끈적거리는 액체에 잠깐 굳어지고야 말았다.

"이건...?"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검붉은 팔 한쪽이 그 앞에 서 있던 저항군 하나를 마지막 단말마를 내뱉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격에 토막 내어 버린 것이었다.

적의 접근을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 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죽음에 모두가 굳어져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때,

"...!!"

과앙...!!

유일하게 가장 먼저 자신의 손에 들린 둔기를 어둠 속으로 휘두른 사내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똑똑히 보았다.

자신이 휘두르는 둔기를 검으로 막아서려던 상대가, 문득 생각을 바꾸어 검을 치우고 자신의 갑옷을 들이미는 것을 말이다.

방금 전의 그 울리는 듯한 굉음은 다름 아닌 자신의 둔기가 상대의 몸통을 정통으로 후려갈기며 난 소리였다.

그러나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그가 곧바로 검을 다시 휘두르면 자신 역시 방금 죽고만 이와 같이 손쉽게 토막 나버릴 거라고 확신했으나, 상대는 그다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음에도 더는 검을 휘두르지 않는다.

"... 검붉은.. 갑옷?"

그렇다.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난 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황제의 칼날.

마치 저항군이 이곳에 올 거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지하수로를 지키는 이외에도, 또 한 명의 황제의 칼날이 어둠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두두둑... 털썩..!

이 소란이 벌어지고 자신의 죽음을 뒤늦게서야 알아챈 것처럼 토막 난 시체가 반박자 늦게 바닥으로 허물어진다.

정적이 찾아들었다.

"다르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 다르크는 황급히 물러섰지만, 이미 작전은 끝났다. 방금 전의 굉음으로 잠입은 불가능해졌고, 애초에 당장 시야에 닿는 거리에 황제의 칼날이 둘이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 검붉은 갑옷의 기사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무기를 들지 않은 반대쪽 팔을 잔느를 향해 내뻗고 있었을 뿐이었다.

"...."

손바닥을 위로 하고 말아쥔 주먹이 이쪽으로 내밀어져 있었기에, 잔느는 그가 무언가를 쥐고 있고 그것을 자신에게 전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저벅... 저벅..

허리춤의 검을 뽑지도 않고 잔느가 검붉은 기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딘다.

방금 전 동료를 무참히 살해한 그를 상대로 감정이 동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더는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상대를 자극해서 좋을 것도 없다는 판단이 더욱 빨리 그녀의 머릿속에서 답으로 정리되었다.

이건 그저 이쪽의 쓸데없는 도주나 저항을 막기 위해 전력차를 눈 앞에서 확인시킨 일종의 극이었을 뿐이다.

"..."

끼리릭...

전신 갑옷까지 입고 있다 보니 덩치 차이가 더 두드러지는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드디어 꾹 쥐어져 있던 기사의 주먹이 열리고 그 안쪽의 구겨진 편지지가 보인다.

망설였지만 잔느는 끝내 손을 뻗어 이를 받아들었고, 용건은 그걸로 끝났다는 듯이 기사는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갑옷의 불길한 검붉은 색감이 어둠 속에 완전히 잠겨 사라질 때까지 이곳의 모두는 숨 소리조차 함부로 낼 수 없었다.

잔느 역시 마찬가지, 그녀도 붉은 갑옷의 기사가 떠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떨리는 손으로 심각하게 구겨진 편지지를 펴 안쪽의 내용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

"거래..?"

지크프리트와의 전투가 끝나고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그는 뜬금없이 거래를 제안해 왔다.

"그래, 하지만 잠시 기다려주지 않겠나? 아직 또 한 명의 거래 상대가 도착하지 않았거든."

"그건 또 무슨.."

그리고 이번에는누군가 또 다른 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체 모를 거래에 응할 이가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걸까.

"..."

노아는 방금 전 붕괴로부터 나와 실비아를 데리고 빠져나온 것만으로 벅찬지 다시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고, 소녀는 여전히 내 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싼 저 검붉은 갑옷의 기사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나 황제의 칼날이라는 존재에 대한 악명과 위험성 만큼은 잔느로부터 충분히 주의를 받았으니 섣불리 도망치는 것도 좋은 방법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

그러나 저 꺼림칙한 상대가 제안해온 거래에 응하는 것도 불안할 뿐이었으니 내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나는 다급한 두 발소리가 이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 루이..!!!"

"잔느! 멈추세요!!"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황성으로 구출작전을 나섰을 잔느와, 호위처럼그녀의곁에서 떨어지지 않던 거구의 사내였다.

"늦지 않게 도착했군. 편지는 잘 전해진 모양이야."

".. 베르디히...!!!"

분노로 점철된 잔느의 고함소리가 폐허가 된 투기장을 광광 울린다.

물론 상대는 그런 반응조차 즐겁다는 듯이 입꼬리를 당겨올렸을 뿐이었다.

저벅... 저벅..

"자자, 오늘은 우리들 모두에게 득이 될만한 이야기를 하러 온 거니 너무 그리 성내지 말라고 로잔느."

폐허가 된 투기장의 잔해가 만들어낸 그림자 속에서몇 발자국을 앞으로 걸어나온 그의 모습이 드디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짧게 자른 적갈색 머리칼과 그 위로 대충 비스듬히 얹어둔 화려한 제관.

어깨 위로 두른 망토와 제복은 그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었다.

"닥쳐!! 루이는 어디에 있어?! 네놈이 데려간 거겠지!!"

"물론, 편지에도 그리 써두었을 텐데? 네 사랑스러운 동생은 이쪽에서 잘 맡아두고 있을 거라고 말이야."

"크윽..."

으득..!

이를 악문 그녀의 어금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현재의 심경을 대변한다.

"이미 봤겠지만 딱히 집을 지키던 개들이나 다 죽어가는 시체들에 손을 댄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군."

"웃기지 마..! 은신처의 위치를..! 우리들이 황성으로 향할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아낸 거야!"

눈앞의 이가 황제를 자처하는 인물이었음에도 조금도 기죽는 기색없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잔느의 모습에는 반대로 여유가 너무나도 없어 보였다.

루이, 분명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니 아마도 황제가 이야기한 잔느의 동생인 걸까.

"흠.. 굳이 대답해 줘야 할 만큼 어려운 문제인 건가?"

"뭐?"

다소 실망스럽다는 눈빛을 내비친 황제는 커다란 보석이 박힌 반지들이 눈에 띄는 손으로 턱 아래를 매만지며 말을 이어나간다.

"내가 왜 병사들을 늘 같은 시간, 같은 경로로 경비를 서게 두었을까?"

"... 무슨 소리를.."

"우리 쪽의 단조로운 움직임을 보여주면, 너희는 어떻게 행동할까? 이를 파악하고 이용하려고 하겠지?"

아, 그런가... 저 여유가 넘치는 낯짝을 보니 알겠다.

이전에도 느낀 의문이었지만 그때는 미처 닿지 못했던 생각이 저 말을 듣고서야 알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나는 너희가 이용할 만한 안전한 길목에만 눈을 배치하는 걸로 최소 인원에 의한 최대 효율을 이끌어낼 수 있지. 파악된 너희의 경로를 역추적해 은신처의 위치까지 특정해 내는 건 그다지 일도 아니고."

만약 상대에게 자신의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상대는 섣불리 공격해오지 않는다.

오히려 예측불가능한 공격을 해올 위험까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빈틈을 보일 때, 여유가 없는 자일 수록 그 함정에 쉽게 걸려들고 만다.

저항군에게 일개 경비병력을 쓰러뜨리지 못할만큼 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닌 만큼 싸움을 최대한 피하는 것을 우선시 할 수밖에 없다.

이 때 황제는 고의적으로 병력의 움직임을 노출시켜 상대에게 빈틈을스스로찾게끔 유도했다.

그리고 그 빈틈을 노려올 것을 예상하여 은밀하게 감시를 이어나가는 것으로 병력의 피해와 감시인원을 동시에 최소화해낸 것이다.

"그런! 그럼 어째서 지금까지.. 우리를 내버려 두고 있었던 거지?"

"나는 저항을 가치를 높게 사거든, 절망에 맞서 힘을 모으고 하나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은 예술품 따위로는 가히 담아내기 어려운 아름다움이지."

까드득...! 까득...

턱을 매만지던 그의 손이 우두둑 움직이며 다섯 손가락에 낀 반지들이 서로 격한 마찰음을 내어 온다.

말을 할 때마다 귀에 거슬리게 깔려들어오던 건 저 소리였나.

"하지만 그것도 슬슬 질려서 말이야. 자네들은 너무 약해빠졌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는 있지만 그것뿐이지. 그러니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네."

"...?"

"오.. 에단,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줄곧 들어왔지. 나는 그대에게 크나큰 흥미를 가지고 있어."

구역질이 날 것만 같은 눈빛이다.

분명 호의가 담긴 시선이었지만 그 너머로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인 것일까.도저히 그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환하지 않겠나. 자네와 내 아이들의 목숨을."

".. 뭐?"

그러나 그가 뒤이어 던진 거래의 조건은 너무나도 듣는 귀에 좋았다.

"자네가 내게 와주면 로잔느의 동생도, 그리고 황성의 지하에 있는 이들 역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겠네."

내가 그에게 간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크프리트의 건으로 대부분 지켜내지 못 한 나머지 인질들을 풀어주겠다고 말해왔다.

"물론 담보로서 자네가 확실하게 내 것이 되기 전까지는 절반 만을 해방할 테지만 말이야."

".. 무슨 소리인지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만."

"뭘,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네. 나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의 모두를 참살하고 저항군을 마저 쓸어버린 후 살덩이가 된 자네를 회수해가도 된다만?"

나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황제의 칼날이 둘러싼 이곳에 도망칠 곳은 없고 그럴만한 기력도 남지 않았으니 이 자리의 모두가 이미 그에게 있어 인질에 불과하다.

"..."

거래다 뭐다 하고는 있지만, 주어진 건 단 하나의 선택지 뿐인 것이다.

내가 그의 거래에 응하지 않으면 모두를 죽이고 강제로 데려갈 뿐이라는 시점에서 이미 선택은 강요되고 있다.

하지만... 실비아가 제대로 눈을 뜰 때까지는 그 옆을 지키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전투로 깨닫게 된 바가 있어, 해야 할 일을 한 가지 떠올리게 되어서 말이다.

"... 당장은 곤란하군."

"그렇다면.."

황제의 손이 당장이라도 공격지시를 내릴 것처럼 위를 향하는 것을 본 나는 다급히 뒷 말을 이었다.

".. 그러니열흘의 유예를 주지 않겠나. 거래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인질의 절반을 곧바로 풀어줄 것도 요구하지."

"흠, 열흘이라."

까드득... 까득,

까드드득....

고민하듯 반지들을 엇맞물려 한동안 말없이 소음만을 이 광장에 풀어놓던 그는, 끝내 무거운 고개를 끄덕인다.

"좋네, 안될 것 없지."

"...!"

"하지만 약속한 날이 지나고도 자네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단언컨대 이 모르부스의 그 누구도두 번 다시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길 수 없게 될 거야."

".. 그렇겠지."

내 대답에 만족한 듯이 그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부자연스럽게까지 느껴질 만큼이나 천진난만한 미소다.

"잠깐..! 루이는..!"

투기장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의 그림자가 일제히 물러난다.

황제 베르디히 역시 순순히 등을 돌리곤 어둠 속으로 잠기듯 사라졌고,

그의 웃음기 섞인 낮은 목소리만이 이곳에 남았다.

"그럼 이만, 다시 만날 그때를 기대하고 있겠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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