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36화 (136/137)

〈 136화 〉 23. 피어오르는 악의

* * *

23. 피어오르는 악의(3)

"...."

"..."

나는 스스로가 어색한 분위기에 둔감한 편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그저 내 경험이 얕았기 때문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지하 은신처의 부러질 듯 휘청이는 테이블에는 세 인물이 자리하고 있다.

"... 차를 내어오겠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최대한 침착과 냉정을 유지하고자 분투하고 있는 잔느를 대신하여, 거구의 사내가 먼저 몸을 움직여 찻잎을 우려내기 시작했다.

음습한 지하에 퍼져나가는 정돈된 차향에 이 분위기도 조금은 누그러질 법도 했지만, 당장 이 지하의 상층에서 들려오고 있는 울음소리, 혹은 고함소리와 같은 격앙된 감정들의 소용돌이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폐허가 되어버린 투기장에는 먼지로 분칠한 시체의 무더기가 제 팔다리나 몸통을 잃어버린 어수선한 꼴로 언덕을 이루고 있었고, 잔느를 뒤따라 투기장에 도착한 이들은 대부분이 무너져내린채 곧장 일어서지 못했다.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용사 일행이 가질 법한 이런 훌륭한 마음가짐에 매료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용사가 곁에 있었기 때문인지, 평소라면 부정했을 이런 정의롭고 희망적인 이야기들에 나는 여전히 동심을 붙든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지크프리트를 쓰러뜨렸지만 그런다고 희생된 이들이 살아돌아온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승리를 착각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잃고 말았다.

이런 것,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구해내지 못했지. 미안하다."

"에단 씨가 사과할 만한 일은..!"

"뭐, 그렇지. 내가 사과한다고 해서 누군가 한 명이라도 살아돌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건 그저 너희의 기대를 배신하게 된 것에 대한 사과일 뿐이야."

노아는 내 말에 금방 입을 다물게 되었다.

내 목소리에 깔린 경계심에 닿은 것이겠지.

.. 최악이다.

이제 와서는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호의까지도 전부 거짓이고 불순한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 번 싹튼 불신은 먹이를 주는 대로 그 덩치를 불려나간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당장의 상황에서 더 갈등을 빚어내고 싶지는 않았던 만큼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를 외면하기로 했다.

"... 아니요. 이건 전부 제 부족함에서 비롯된 일이니까요."

잔느는 애써 목소리를 냈지만 그 속에 숨겨진 떨림을 나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적에게 보기 좋게 속아넘어가, 심지어는 그로 인해 희생자가 나오고 말았다는 사실을 금방 극복해 내는 건 어렵겠지.

뭐, 별 수 있나.

그녀로서는 늘 최선의 선택과 결정을 내려온 결과가 이것에 그쳤을 뿐이고, 은신처의 위치를 알고 있으면서도 적이 공격해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보통 할 수 없으니까.

... 꼴사나운 세 명의 실패자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의 찻물이 식기만을 기다리며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못한다.

이 세계에서 영웅 노릇을 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 아무리 적과 싸워 이기더라도 무엇 하나 이루어지는 건 당장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주변의 것들을 잃어버리기만 할 뿐인 고된 현실 때문일 것이다.

마치 작은 손바닥 하나로 강의 급류를 막아낸다거나, 먼 옛날 하늘 위에 떠있던 태양을 가리려 드는 우행 정도에 불과하다.

.. 연초 생각이 절실해지는 때다.

커다란 악을 처단하여 미래에 벌어질 비극을 막았다고 자위하기에는 당장 내 발밑에 깔린 시체의 수가 너무나도 많다.

그들의 영혼은 떠나지 않고 내 등 뒤에 서서 언제까지고 나의 행보를 핏발선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다음 비극을 기다려 줄 만큼, 이 세상은 그리 상냥하지도 않으니까."

".. 그렇네요. 에단 씨는 황제의 거래에 응하실 건가요?"

"그야 응해야겠지. 이 방법 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둥의 소리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실감하고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건 당신뿐만이 아니니까."

"..."

그녀는 황제가 제안한 거래에 목숨을 저울질하며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한다는 사실에 치가 떨리는 거부감을 느끼는 듯했으나, 한 편으로는 내가 이 거래에 응하겠다고 말해온 사실에 기뻐하며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감정이 뒤섞인 눈동자를 그녀는 금방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저 잠시 동안 나와 시선을 피하며 얼굴의 인상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내면서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물론 내게 그녀의 저런 심경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미 수많은 가족들을 잃게 된 시점에서 더는 누구 하나 잃지 않고 나머지 다른 가족들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게 된다면, 아마 황제가 지목한 게 내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되었다 하더라도 분명 같은 선택을 했겠지.

무엇보다 그녀는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입장에 서 있었으니 말이다.

더는 어찌 될지 기대되지도 않는 세계의 명운보다는 당장 내일 자신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식량의 공급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그전에, 황제는 당신을 로잔느라고 부르더군."

".. 네, 맞습니다."

"귀족은 전부 처형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 설마 이 저항군을 이끌고 있는 네 진짜 이유는 가문의 복권과 자연스럽게 따라올 왕위 찬탈 때문은 아니겠지."

따가운 시선을 느낀다.

테이블의 가까이에 서있는 거구의 사내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내가 저런 것에 재밌는 반응이라도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걸까 싶을 뿐이다.

".. 그럴 리가요. 다르크도 그만해 주세요. 제가 곤란해질 뿐이니까요."

"저자는 집사인가? 차를 준비하는 게 꽤나 능숙해 보이던데."

"아니요, 다르크는 저희 가문의 기사입니다. 차는.. 그저 저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 그런 것뿐이니까요."

가명을 쓴다는 건 원래의 이름을 대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뜻이고, 이에 대한 의심을 숨기지 않고 말했지만 그녀는 자신이귀족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평범한 서민 여성이 흉내 낼 수 없는 분위기를 그녀는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숯칠로는 가려지지 않는 저 외모 또한 한몫했다.

좀 더 제대로 숨길 생각이 있었다면 대화를 할 때마다 번번이 보는 앞에서 차를 우려내거나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 루이는?"

"들으신 대로 남동생입니다. 제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침실을 배려 받은 덕분에 지금껏 모두에게는 들키지 않고 숨겨둘 수 있었지만..."

"..."

저항군 내에 그녀의 남동생에 대해 아는 이가 없는 거라면, 황제가 은신처의 그 누구도 죽이지 않고 오직 루이 한 명만을 데려간 건 딱히 배신자가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가 등 뒤로 질끈 묶어 늘어뜨린 적갈색 머리칼을슬쩍바라보며 그녀에겐 더더욱 곤란할 질문을 던졌다.

"황제와는 따로 연이 있는 건가."

"... 네, 그자의 모친 되시는 메리 슈비츠 양은 제 어머니의 친언니이니까요."

사촌 정도되는 가까운 인척이라면 그야 그녀에게 남동생이 있고 없고 정도는 모를 리가 없겠다.

"그런데도 용케 숨길 생각을 했군."

".. 싫어도 왕위찬탈을 노리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딱히 내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뜻은 아니지만."

"...!"

자신의 부족함에 책임감을 느끼는 귀족이라는 게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이만 하더라도 고작 레베카 한 명뿐이다.

그만큼이나 눈 앞의 이 여자는 별난 성격인 것이다.

"잠시 나는 실비아와 함께 모르부스를 떠나있을 거다."

"... 잠깐, 잠시만요. 그런 짓을 했다가는..!"

"열흘이 지나기 전에는 돌아올 테니 성급하게 굴지 마. 이번 싸움으로 상황을 고를 처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무리 미련한 나라도 깨닫게 되었으니까."

만약,

정말로 만약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뛰어난 마법사인 이브나 레베카가 지크프리트와의 전투에 함께하고 있었다면, 아니 혹은 그 이전의 싸움에서도 계속 함께하고 있었다면...

투기장에 지크프리트와 함께 파묻히고 만 그들을 구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렇기에 나는 익숙하지도 않은 책임감을 통감하며 거래에 응하겠다는 소리나 지껄여 버리고 만 것이다.

그저 내가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신탁의 빛을 봤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가야 했을 그녀를 줄곧 머릿속에서 밀어내고 외면하고 있었다.

아무리 순혈자라 하더라도 수인의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놈의 마력 적성과 감응 능력은 땅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가 있었다면..

실비아가 스스로를 그렇게나 몰아붙여야 할 이유도 없었겠지.

그리고 베르디히, 그 꺼림칙하기 그지없는 황제를 상대로도 말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열흘이나 되는 유예를 번 건 아니야, 당신이라고 그 황제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겠지?"

"그건.. 그렇지만..."

순순히 인질들을 풀어주겠다고는 했지만, 그 속내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애초에 성인이 되지 않은 이들을 잡아들인 이유부터가 의문인데다, 자신에 반하여 들고 일어선 저항군을 그저 유흥거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모습에서는 권력 자체에 대한 집착도 그다지 없어 보였다.

만약 정말로 인질들을 전부 풀어주었다고 치더라도 그 이후에는?

마음을 바꿔 다시 잡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황제와 저항군 사이의 힘의 구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니 다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을 거다.

그나마 타개책이라면 모두 함께 모르부스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 정도인데, 이를 황제가 두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있을 건지는 둘째 치더라도 도망친 곳에 반드시 낙원이 있을 거라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곳에 가능성이 있다면.. 붙들고 늘어져봐야 하는 거겠지."

"..."

노아의 시선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당장은 말해줄 수 없다는 둥 진실을 대답 하지 못하는 그를 완벽하게 신용할 수 없다.

... 쯧.

이것도 심지어는 지크프리트가 남긴 말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민다.

"노아."

".. 네, 에단 씨."

"너는 이곳에 남아서 저항군의 모두를 지켜줬으면 한다."

그러니 이건 필요에 의해서다.

그 미치광이 황제가 번거롭게 찾아와 거래를 제안해온 것조차도 만약 일말의 희망을 심어주고 방심한 사이 찾아와 짓밟으며 절망하는 꼴을 즐기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는 만큼, 은신처마저 발각된 상황에서 이들을 지켜줄 이가 필요했다.

".. 알겠습니다. 반드시 지켜내 보이겠습니다."

애써 담담하게 웃어 보이는 그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야 말았다.

어째서 이렇게 가슴께가 답답하게 죄여오는 걸까.

하지만 그 의문에 답하기보다 먼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택했다.

"나는... 신탁의 마법사를 만나고 오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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