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23. 피어오르는 악의
* * *
23. 피어오르는 악의(4)
추적추적 떨어져 내리는 비는 흙바닥을 질펀하게 적시며 그다지 개운치 않은 소리를 낸다.
빗방울이 두꺼운 천막을 두드리는 소리나, 싸구려 갑옷을 때리는 텅빈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비오는 날이 싫다.
이 유쾌하지 못한 분위기가 싫고,
마치 너희들의 울음소리를 덮어주겠노라 하는 속편한 하늘의 배려같이 느껴져 더더욱 싫다.
그래도... 주변의 술렁이는 발소리와 찢어지는 곡소리가 조금은 묻혀 가는 느낌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검댕을 머금은 지저분한 빗물이 얼굴을 때리며 흘러내린다.
검은 하늘과 끕끕하고 축축한 공기는 내 답답하기만 한 가슴속을 대변하는듯하다.
그 많은 수의 시체 조각들을 빠짐없이 회수하여 제대로 장례를 치르기에는 당장 팔다리를 짜맞출 인력조차 부족하다. 당장 이곳은 산 자보다도 죽은 자가 더 많은 웃지 못할 상황이다.
폐허의 무더기 속에서 시신을 파내는 것도 일이었을뿐더러, 애초에 훼손이 심해 신원을 확인하는 게 불가능한 이들도 수두룩했다.
거기다 눈치도 없이 쏟아져내리기 시작한 비는 반쯤 붕괴된 투기장의 지반을 더 불안정하게 만들어 노아가 그들을 돕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어이없는 추가 희생자가 나올 뻔했다.
결국 잔느가 원성을 들어가면서 끝내 내린 결정은 투기장의 공동묘소화였다.
지금까지 파낸 시신들은 제대로 주변의 땅에 매장하겠지만, 말이 묘소이지 사실상 시신들의 완전한 회수가 불가능한 시점에서 투기장을 완전히 붕괴시켜 시신들을 한꺼번에 매장한 후 그 위를 평탄화하여 비석을 세우겠다는 계획이었다.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지만, 합리를 내세우기에는 이미 저들은 불합리한 상실을 겪었다.
열흘의 유예는 나에 대한 유예이지만, 저항군에 대한 유예기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은 당장 죽은 이들보다는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그 시간을 써야 할 테지만 그게 말만큼 쉽지 않다.
노아 역시 말했다. 이곳 투기장에는 저항군의 가족이기도 한 이들이 상당수 수용되어 있다고.
그런데 이런 결과다, 반수는커녕 단 한 명의 목숨조차 구해내는데 늦어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을 만한 수가 아니다.
나 역시 아직도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투기장에 도착해 시신의 무더기를 보고 뇌리에 그 충격적인 광경이 강렬히 남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로는 지크프리트와 서로 찌르고 찔리기를 반복하는 무뢰배와 같은 싸움을 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전투 중에는 자신의 발이 시신을 짓밟는 것도, 혹은 자신이 피해낸 공격이 그들을 산산조각 내는 것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니 말이다.
전투가 끝났을 때는 이미 반쯤 붕괴된 투기장의 벽면이 시신 무더기의 위를 덮쳤고, 지하로 구멍을 내며 무너져 내린 지반을 따라 우수수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제정신이라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광경들이다.
동요해야 흔히들 말하는 정상의 범주일 거다.
하지만 생사결의 일선 위에서 나는 물론이고 소녀도, 그리고 용사조차도 마치 감정이 마비된 것처럼 검을 휘두르고 공격을 피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무섭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자신의 목숨에 위기가 닥치면 다른 누군가를 생각할 수는 없게 되어버리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일뿐더러 이런 세상에서는 식상한 소재일 뿐이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길들여지는 것이다.
두렵다.
이대로 절망에 익숙해져 버리는 것이 말이다.
몰아세워진 육신과 정신은 그 이상의 피로나 충격을 거부하며 메마른 감성 위로 쏟아지는 검은 빗물을 삼키려 들지 않는다.
... 그것은 오히려 절망 그 자체보다도 공포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홀로 생각했다.
저벅, 저벅.
빗물을 머금고 늘어진 천막을 젖히고 안쪽으로 들어온 무거운 발소리가 천막 안에서 사망자의 명단을 정리하고 있던 잔느의 주의를 끌어다 놓는다.
"지금 떠나시는 건가요."
"그래."
"...."
안 그래도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나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는 걸까, 그녀의 눈 아래로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것이 보인다.
남부지구의 은신처에서 곧바로 동대륙 하르펜으로 향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굳이 투기장에 다시 돌아온 것은 미처 빌어주지 못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서다.
그들이 과연 내 기도를 달가워할지는 모르겠으나, 묘소의 구색이 갖춰지면 호세르가 다시 한번 그들을 위해 기도를 올릴 테니 그것만으로도 반쯤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잔느, 저는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떠나겠다는 내 말에 잠시 입을 다문 잔느를 대신하여 그녀의 옆에 서있던 거구의 사내가 나선다.
당연한 반응이다.
인류 배반자라는 흉흉한 이명으로 불리는 데다가, 가장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 누구 하나 제대로 구해내지도 못한 신용하기 어려운 상대가 거래를 앞두고 모르부스를 떠나있겠다니... 게다가 동행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억지를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면 그거야말로 문제가 있다.
하지만..
"나야 상관없지만 네 아가씨께서는 꽤나 상관이 있으실 거다."
"네놈..!"
"막아선다면 쓰러뜨리고 지나갈 테니, 안 그래도 사람 손이 부족한 마당에 그녀는 결말이 뻔한 싸움이 일어나는 걸 두고 보지 못하겠지."
저 커다란 덩치로 보나 허리춤의 무식하게 생긴 몽둥이를 보나 사실 기사의 모습이 그리 잘 연상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왕가의 방계에 있는 높으신 가문의 기사라고 했으니 그리 말할 수 있을만한 실력은 분명 있을 거다.
"... 잔느! 부디 허가를..!"
그러니 자신을 무시하는 내 언사에 저렇게 쉽게 불이 붙는 것이다.
허나 장담컨대, 아무리 지금 내 몸이 당장 부서질 것처럼 삐걱대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고작 다리 한쪽, 그리고 팔 한쪽이 잠시 부러지는 것을 감수하면 결국 평범한 사람일 뿐인 그로서는 어떻게 해도 날 막아설 도리가 없다.
"다르크, 사제님에게 마차를 내어주도록 하세요."
"잔느...! 저 뿐만이 아닙니다! 저항군의 동료들 대부분은 그가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열흘의 시간을 번 것도, 그리고 황성 지하에 감금되어 있던 반 수의 가족들을 해방시켜준 것도 모두 그가 거래에 응하겠다고 황제에게 직접 대답해 준 덕분이에요."
"..."
그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그도 할 말은 없을 거다.
나라고 다를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라고 해서 무언가 해낸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저라고 사제님이 돌아오기만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당장은 돌아오겠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도중에 예상치 못한 위험과 맞닥뜨릴 수도,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말은 그렇게 해도, 피로에 찌든 저 눈동자는 내가 약속대로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 보이지만 말이다.
"..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 가족을 무사히 되찾은 이들만큼은 잠시 몸을 피할 수 있게끔 동부지구에서 서성이는 스폴의 마연 상인들을 통해 빼돌릴 수 있을 만큼 빼돌릴 겁니다. 그리고 저희 역시도 용사님과 함께 나름대로의 준비는 마쳐두어야겠죠."
"... 잔느, 그러기 위해서는 가문의.. 전 가주님의 유품들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황제는 이미 저희들의 움직임과 은신처의 위치까지도 전부 파악하고 있었고, 언제 흥미를 잃고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차라리 유예라는 시간이 생긴 걸 감사히 여겨야 할 지경이니까요. 그저 시기가 눈에 보일 만큼 앞당겨졌을 뿐이에요."
"..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녀는 저런 성격의 부하를 어떤 식으로 회유하고 이끌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던 모양이라 이쪽의 수고가 덜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로 나를 절대적으로 신용하는 것은 아니라며 그의 입장에 공감하며, 허술하기는 해도 내가 약속을 어기는 상황에 대한 대비책까지 생각해 두었다는 것을 드러냈다.
듣고 있는 내 기분이야 고려하지 못한다 볼 수 있지만, 나는 그다지 이런 건 신경 쓰지도 않으니 말이다.
다르크가 끝까지 나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못 한 채 터벅터벅 걸어나가고, 잔느가 나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인 것은 그에 대한 작은 사죄의 표현으로 보인다.
어쩌면 꼭 돌아와 주었으면 한다는 부탁의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보았을 때 그렇게나 당당했던 모습이 겹쳐 보이며 다소 안타까운 마음은 들었지만, 여러 책임을 짊어진 그녀의 자책과 좌절을 내가 당장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뭔가 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을 테고 말이다.
"늦지 않게 돌아오지."
그렇기에 이 한 마디만을 짧게 남긴 나는 이미 흠뻑 젖은 후드를 다시 뒤집어쓰고 다르크를 따라 검은 빗속으로 들어섰다.
의외로 그는 내게 적의만을 거두지 않았을 뿐 쓸데없는 말로 마찰을 일으키지는 않았고, 준비해 준 마차에 관을 싣고 두꺼운 모포로 감싼 실비아를 그 옆에 눕히고 있을 즈음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마 곧장 일손을 도우러 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자리에 계속 있었다가는 참지 못하고 나를 막아설지도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그다지 마주치기를 바라지 않았던 상대가 내 옆으로 슬쩍 발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에단 씨."
"...."
비가 내리기 시작한 탓에 급격하게 떨어져 내린 기온을 신경 써 실비아의 턱 아래까지 꼼꼼하게 모포로 감싸둔 나는, 그러고 나서야 숙이고 있던 허리를 일으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손을 가리기 위해 씌워둔 것임을 이제는 알게 된 그의 장갑이 괜스레 내 시선을 끈다.
"...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곳의 사람들은 제가 반드시 지키고 있을 테니까요."
".. 그래, 부탁한다."
우려섞인 그의 목소리는 내가 정말로 돌아올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닌, 이만한 전투 직후에 쉬지도 않고 곧장 길을 떠나는 나를 걱정하며 배웅하는 것이었지만..
...나는이를 느끼고도 끝까지 그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