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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검가 로이넨-20화 (20/258)

제20화. 문제적 암살자 (1)

“제길…! 또 놓쳤어.”

나직한 한마디가 울창한 숲속을 떠돌았다.

회색 로브를 두르고 복면을 쓴 세 사람이, 날카로운 눈동자로 바닥을 훑었다. 그들은 어떤 흔적을 찾는 중이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 거냐.”

“간악한 년.”

세 사람은 각자 번갈아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서로의 뜻을 읽은 그들은 별다른 신호 없이 다시 흩어져 표적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10분쯤 지났을까.

다시 한자리에 모인 세 사람.

“새로 나온 흔적은?”

조장 그로칼의 물음에 나머지 두 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면 정말 증발한 거 같은데? 그래도 조금 전까지는 미세하게라도 보였잖아.”

“아마 또다시 변신했겠지.”

“하, 지겹군. 개 같은 변신 종자 같으니라고.”

실망스러운 대답을 내놓는 샤르코에 비해, 비르코는 뭔가 이야깃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야, 비르코. 흔적이라도 잡았어?”

“아니. 대신 인적을 찾긴 했어. 숲 사이로 난 길에서 느껴졌는데… 아무래도 근처에 야영지가 있는 것 같아.”

“야영? 지금 이 시간에?”

지금은 새벽 4시가 가까운 시간.

그로칼 랭은 다시 한번 질문했다.

“거리는?”

“20분 정도 걸릴 것 같아.”

그로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르코 랭과 샤르코 랭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좋아, 일단 야영지 쪽으로 접근하기로 하지.”

인적을 발견한 비르코가 앞장서 움직였고,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다시 시작된 세 사람의 질주. 마치 숲의 일부분인 것처럼 풍경에는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타닷. 쉬이이익. 타닷.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나뭇가지만 가볍게 흔들렸다.

암살자를 쫓는 암살자 집단, 척살조.

암살검가 안에서 그들은 ‘회색의 유령쥐’라 불린다. 회색 로브를 두른 몸에, 외부에 공개된 적 없는 복면 너머의 얼굴 때문이다.

임무를 수행하던 암살자가 변절한다면 상황을 판단한 로이넨 가문에서 척살조를 파견한다.

문제적 암살자를 생포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임무였기에, 척살조 개개인의 능력은 암살검가 안에서도 독보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강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삼인조라는 것. 단독으로 움직이는 게 일반적인 암살검가에서 척살조는 예외적으로 셋이 함께 움직였다.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함께 훈련을 받다 보니, 그들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의도를 읽어냈다.

“……!”

앞서가던 비르코가 갑자기 멈춘다.

“무슨 일이냐?”

샤르코의 질문.

반면 그로칼은 대답을 듣지 않고도 상황을 파악했다.

“암연이 느껴지는군. 셋… 아니, 넷인가?”

암연은 암살검가와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가신들의 고유한 힘이었다. 흉내 낼 수도, 복사할 수도 없는 고유함 그 자체.

이 말인즉, 표적이 근처에 있을 확률이 크다는 뜻이었다.

“넷이나 함께 있다니. 이 시기에 그럴 만한 일이 있을 수 있나?”

“잔치라도 열렸나 보지.”

샤르코가 빈정대듯 말했고, 거기에 비르코가 한마디 거들었다.

“말조심해, 샤르코. 가주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 말에는 그로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가주의 것이라 할 만한 암연은 없어.”

“그로칼, 아무래도 내가 느꼈던 게 저자들인 것 같아.”

“들러야 하나?”

“흠.”

그로칼은 이마를 긁적였다.

척살조의 존재는 다른 암살자들에게 드러나지 않을수록 좋았다. 게다가 저쪽에 있는 암살자들의 정체가 뭔지 파악할 수 없는 상황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그들에겐 표적을 쫓는 일이 우선이었다. 흔적을 놓친 상황에서 사소한 것 하나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암살자가 넷이나 모여 있는 것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잖아? 근처에 암살검가 저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확인해 보자는 거지?”

그로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그로칼. 혹시 로이넨서랑 지내는 암살검가 자제 일행은 아닐까?”

내키지 않았던 비르코가 이렇게 말했지만, 그로칼의 결정은 뒤집히지 않았다.

“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 앳된 암연이 하나 느껴지고 있긴 하니까. 그래도 상관없잖아?”

맞는 말이었다. 척살조의 뜻은 곧 모든 암살검가의 가주인 세이렌의 뜻. 지금 이 순간에는 표적을 쫓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샤악.

그로칼이 나뭇가지에서 튀어 오르면서 앞서자, 샤르코와 비르코도 뒤따라 뛰어나갔다.

* * *

앳된 암연의 주인은 루빈이었다.

루빈은 암연의 결을 다스려 2성 수준으로 위장했다. 상대가 감지하도록 일부러 투박하게 다룬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게 척살조가 접근해 올 것을 얌전히 기다렸다.

곧 그들의 접근이 감지됐고, 이를 뒤늦게 알아챈 호위가신들이 보고해 왔다.

“루빈 도련님, 아무래도 척살조가 저희를 발견하고 접근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신분 위장은 불필요했다.

척살조를 대면하게 된 이상, 그들에게 최대한 협조하여 서둘러 보내 버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무리 로이넨 혈통이라 해도 척살조와 친밀한 사이는 아니니까. 본가 소속인 두 호위가신이 긴장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두 호위가신의 눈에 비친 루빈은 태연하기만 했다. 본가의 자제여서 그런 걸까. 그 태연함이 왠지 믿음직스러웠다.

루빈은 숙영용 천막의 기둥에 손을 갖다 대고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곧 마주하겠군.’

루빈은 마차에서 빼내 온 의자에 앉으며 생각했다.

회귀 이전에 척살조를 몇 번인가 만난 적이 있었다. 로이넨 혈통의 한 사람으로서 우연히 마주쳤을 뿐, 다행히 그들의 표적이 될 만한 일을 벌이거나 연루된 적은 없었다.

그때, 회색 복면 사이로 보았던 냉담한 눈빛이 떠올랐다.

‘틸레망 척살조랑 랭 척살조였지, 아마.’

루빈은 랭 척살조의 조장과 독대했던 지난 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회귀하고 나서 9년이나 지났으니 기억은 많이 흐릿했다.

‘그때 어떤 옛날이야기를 해줬었지. 시기상 그게 이 무렵인 것 같은데. 어떤 얘기였더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도련님.”

호위가신들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타닥. 타닥.

천막 중앙에 조그맣게 피워둔 모닥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느 틈에 천막 밖으로 세 사람의 인영이 비치고 있었다. 등불에 드러난 것은 세 개의 그림자였다.

항아리 병처럼 펑퍼짐하게 둥근 인영이 하나.

막대기처럼 가느다란 인영이 하나.

그리고 둘 사이 균형 잡힌 모양새의 인영 하나.

척살조 세 사람은 움직임을 멈춘 채 천막 주변을 살폈다.

펄럭.

이윽고 관찰을 끝낸 세 사람이 천막을 들추며 안으로 들어왔다.

회색 망토, 두 눈동자만 드러낸 복면. ‘회색의 유령쥐’라는 이명에 걸맞았다. 개중 항아리형 몸체의 척살조원이 중얼거렸다.

“익숙한 냄새가 나.”

일단 표적이 아님을 확인했는지, 그들의 경계가 살짝 풀어졌다. 척살조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조원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저 덩치 큰 친구가 비르코, 여기 홀쭉이는 샤르코. 그리고 내 이름은 그로칼.”

짤막한 소개였다.

자기들을 소개하거나 말거나, 홀쭉이라 불린 샤르코는 천막 가장자리를 쭉 돌며 내부를 확인했다. 덩치 큰 비르코도 땅을 짚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동료들의 감식을 가만히 지켜보는 그로칼. 결국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는지, 둘은 고개를 내젓고는 그로칼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때까지도 루빈의 호위가신들은 입도 열지 못하고, 긴장 상태로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익숙한 냄새야. 그렇다는 건…….”

비르코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로칼은 바로 알아차렸다.

“본가의 암살자들이라는 거로군.”

샤르코와 비르코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칼은 루빈을 쳐다보며 한 발짝 나섰다.

본가의 가신들. 그리고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그렇다면 상황은 모두 파악됐다.

“로이넨 혈통을 뵙습니다. 루빈 도련님.”

그로칼이 먼저 몸을 숙이며 예를 표했다. 나머지 둘도 따라 몸을 숙였다. 오직 냄새만으로 루빈을 알아본 것이다.

“도련님을 뵙는 건 처음이군요.”

“나도 척살조를 보는 건 처음이야.”

루빈도 차분히 대답했다. 호위가신들의 긴장이 살짝 누그러질 만한 부드러운 만남이었다.

샤르코와 비르코는 그로칼 랭 뒤편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루빈의 호위가신들 역시 루빈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떠들썩한 환대 같은 건 없었다. 적막한 숲속의 밤에 어울리는 나직한 대화가 이어졌다.

“저희는 랭 척살조입니다.”

역시 랭이었군.

회귀 이전에 랭 척살조와 만나 이야기까지 나눠봤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복면 너머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건 똑같았다.

그로칼 랭, 샤르코 랭, 비르코 랭은 형제는 아니었지만, 척살조로 결성되면서 기존의 성을 버렸다.

척살조는 최소 세 명 이상의 집합이다. 그런 집합이 정확히 몇이나 더 있는지는 가주인 세이렌만이 알고 있었다.

“누굴 쫓고 있는지 말해줄 수 있어?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은데.”

루빈의 질문에 그로칼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당황이라기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로이넨 가문의 휘하에 있지만, 가문 안에서 생활하지 않는 척살조였기에 그로칼은 루빈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꼬마에게서 느껴지는 암연은, 루빈이 누군지 확실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출가 이전에 암연을 개화한 건가.’

암연 개화 직후라면, 1성 경지의 암연을 품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루빈에게선 벌써 2성 수준의 암연이 느껴졌다.

막 ‘1차 선택’을 끝낸 나이라고 하기엔 평균 수준을 한참 앞지르는 경지였다.

‘재밌군.’

그로칼은 루빈에게서 세이렌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는 사실에, 큰 흥미를 느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루빈은 아쉽다는 듯 질문을 되풀이할 뿐이다.

“아무리 로이넨 혈통이라 해도 역시 척살조의 임무를 알 수는 없는 거겠지?”

그로칼은 척살조장이 된 이후, 처음으로 이 루빈이라는 꼬마와 대화를 이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자신만의 규율을 깨보기로 했다.

“흠,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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