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문제적 암살자 (2)
그로칼의 요청으로, 천막 안에는 그와 루빈만 남았다.
“루빈 도련님, 환혈족 사람을 아십니까?”
“알아, 환혈족. 소수부족이잖아. 무엇으로든 변신한다는.”
환혈족은 거혈족, 수혈족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능력을 지닌 소수부족 중 하나다.
거혈족이 몸체를 거대하게 바꾸어 육체적 힘을 증폭시키는 종족이고, 수혈족이 짐승들과 감응하고 소통하는 종족이라면.
환혈족은 7성 대마법사도 성공시키기 어려운 변신을 천부적으로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환혈족은 완전히 멸족하지 않았나?”
“잘 아시는군요.”
황제 텔마흐의 정복 이후. 거혈족과 수혈족은 제국에 편입되었지만, 환혈족은 그럴 수 없었다. 황제가 그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긴, 그럴 것이다. 몸이 거대해진다거나 동물을 조종할 수 있다는 건, 잘 이용만 한다면 제국의 도움이 될 능력이었다.
그러나 변신하는 환혈족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생명체로 변신한 환혈족을 구분하는 건 제국의 그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평화주의적인 자들이지만, 언제든 자신을 속이고 적으로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점. 그것이 황제의 불안이었다.
“30년 전쯤, 환혈족은 자신들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황제는 연회를 베푸는 것처럼 모든 환혈족을 모아놓고 그들 전부를 죽여 버렸습니다. 이 세상에 환혈족 한 명 남기지 않으려는… 피의 청소였죠.”
가만히 대화를 듣던 루빈은 ‘피의 청소’라는 표현이 귀에 맴돌았다.
“생존자가 있었어?”
“예. 극소수에 불과하지만요.”
루빈은 그로칼의 반응을 눈여겨보면서 설명을 거들었다. 역사책에서 읽은 구절을 읊는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말투도 변조했다.
“환혈족은 제국의 눈을 피해 제국 곳곳으로 도망쳐 살았지만, 결국 몇 년이 되지 않아 전부 적발되었다. 적발된 환혈족 사람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한마디 더.
“운 좋게 살아남은 녀석들은, 팔다리가 잘린 채 귀족 가문의 놀잇감이 되었다.”
“…환혈족에게 관심이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봤거든.”
“서고에만 틀어박혀 있다는 막내 도련님에 관한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 그로칼의 눈동자. 루빈은 그 눈동자에 집중했다. 더욱 큰 울림을 줄 수 있도록, 잠깐 뜸을 들이면서.
“나도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거든. 무슨 생명체로든 변신할 수 있다니. 장난감으론 제격이잖아.”
그로칼의 눈빛에 나타나는 미세한 흔들림, 루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 말, 진심이십니까?”
“생각해 봐. 팔다리를 잘라 버리면, 팔다리 없는 개나 고양이로 변할 거 아냐? 그건 그것대로 재밌을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로칼이 말의 의도를 곱씹는 사이, 루빈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로칼.”
“네, 루빈 도련님.”
“그럼 지금 쫓고 있는 표적이 환혈족이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암살검가 안에 환혈족 암살자가 있었다는 거잖아.”
그로칼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적이나 다름없는 환혈족을 암살검가 안에 놔두었다니.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 이 사실은 알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비밀이 있는 건지.
“이건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비밀입니다. 세이렌 가주님과 저희 랭 척살조, 거기에 직속 가신 정도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알아도 되는 걸까?”
“저희는 근방 10킬로미터 이내에서 표적의 마지막 흔적을 놓쳤습니다. 근처에 루빈 도련님 일행이 있다는 걸 안다면, 표적이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다른 자도 아닌 암살검가를 배신한 암살자였다. 그런 암살자가 로이넨 혈통의 자제와 조우한다면, 상황이 좋게 흘러갈 리 없었다.
보호 차원에서라도 루빈에게 알려줄 수 있는 정보였다.
“호위가신들이 아무리 뛰어난 자들이라 해도, 환혈족의 변신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변신하면, 그녀가 지녔던 암연까지도 사라지니까요. 사실상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녀?”
“환혈족 암살자는 여성입니다. 물론, 남성으로도 변신할 수 있기에 무의미한 정보겠지만.”
루빈은 천막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천막을 들춰 바깥을 내다봤다.
두 사람의 원활한 대화를 위해 호위가신과 척살조원들 모두 멀찍이 흩어져 있는 상태.
“그로칼,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시죠.”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그게 무슨 말씀인지.”
“만약 네가 척살조에게 쫓기는 그 암살자라면? 환혈족 출신의 암살자라면 말이야.”
쫓는 자는 도망치는 자의 심리로 생각하라.
지금 루빈은 그런 조언을 해주고 있는 걸까? 그로칼은 루빈이 던진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흐흠, 환혈족처럼 생각한다면… 그랬다면 좋겠군요. 그게 가능했다면 저는 이미 표적을 잡았을 테니까요. 환혈족처럼 생각하지 못해서, 지금 이렇게 제 상태가 오리무중인가 봅니다.”
그러면서 어색하게 웃는 그로칼. 루빈은 그를 등지며 몸을 돌렸다.
“하긴, 그런가.”
그러면서도 그로칼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그로칼이 느끼지도 못할 사이, 루빈은 감추었던 나머지 암연도 펼친 뒤였다.
예민해진 감각 속에서 그로칼의 손이 허벅지에 매두었던 검집으로 내려가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
“설마 날 죽이려는 건가? 그다음 나로 변신하려고?”
“……!”
루빈이 돌아섰다. 복면 속 눈동자는 어느새 완전히 평온을 잃었다.
-루빈!
그때 뒤늦게 위험을 감지한 하네케가 다급히 루빈을 불렀다.
루빈은 그로칼 쪽에 던져둔 그물 같은 감각을 놓지 않았다. 어떤 과정이 있었건 간에, 척살조장 그로칼을 제압한 자였기에, 경계를 늦추어선 안 되었다.
‘하네케, 지금 간단한 상황이 아니에요.’
-나도 알고 있네.
하네케는 일찍이 루빈 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실 그 역시 루빈에게 막 경고하려던 참이었다. 결국 한발 늦었지만.
-자네도 눈치챘나? 역시 회귀 덕분인가?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회귀랑은 상관없었다.
의심의 시작은 ‘피의 청소’라는 말부터였다. 그 말을 내뱉을 때, 그로칼의 태도에서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미처 감추지 못한 환혈족의 감정을 감지한 것이다.
분노. 슬픔. 복수심.
루빈에게도 익숙한 감정이기에, 눈치채는 것은 쉬웠다.
이후에도 루빈은 환혈족의 비극을 조롱하는 말을 던져 보았다. 아주 짧은 찰나이긴 했지만, 거기에도 그로칼은 평온을 잃었다.
그리고 또 하나.
루빈이 알고 있는 척살조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임무 중에 자신을 가리키는 주어를 단독 형태로 쓰지 않는다.
‘저자가 정말로 랭 척살조의 그로칼이었다면, ‘저는’이 아니라 ‘저희는’이라고 말했을 거예요. 그게 척살조의 방식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정말 적절한 순간에 떠오른 회귀 전의 기억도 도움이 되었다. 루빈이 죽기 3년 전쯤. 은퇴를 앞둔 그로칼과의 대화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언젠가 낭패를 본 적이 있습니다. 환혈족 표적에게 제압당했던 일이요. 더한 수치는, 한동안 놈이 제 행세를 하면서 랭 척살조를 지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의 대화가 떠오르면서 퍼즐이 맞춰진 것이다.
“자, 말해봐. 그로칼로 변신한 문제적 암살자.”
“…….”
“네 이름까지는 알아내지 못하겠어. 아직 내 권한이 거기까진 안 닿거든. 그러니까 대답해. 네 이름이 뭐지?”
다시 환혈족 맞은편으로 돌아온 루빈은 적의가 없다는 듯 의자에 앉았다.
“네 이름을 말하면, 어쩌면 내 기억과 연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거든.”
“세이렌의 아들 아니랄까 봐 빈틈이 없네. 환혈족을 모욕했던 것도 결국 나를 시험했던 거였다니.”
“지금 우리가 덕담을 나눌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환혈족 암살자는 검집에 갖다 댔던 손을 순순히 거두었다. 그러고는 로브를 펄럭이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루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를 제거할 생각이었나?”
“하, 그 정도로 무모하진 않아. 뭐, 널 이용할 생각이긴 했지만.”
“협상 카드로 말이지?”
“평생 척살조한테 쫓기면서 살긴 싫으니까. 지긋지긋한 유령쥐새끼들…. 근데 이렇게 세이렌 꼬맹이랑 대담이나 나누게 되다니. 나도 참 멍청해.”
환혈족은 여유를 잃지 않은 태도로 고개를 내저었다. 정체가 발각되었는데도 그녀는 느긋해 보였다.
“언제부터 날 따라온 거지?”
“네가 볼고튼 성문을 나섰을 때부터. 암연이 무더기로 느껴져 다가가 보니까, 호위가신들과 네가 있더군.”
루빈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호위가신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네 얼굴을 보고 확신했지. 얼음 같은 세이렌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으니까.”
루빈은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언뜻 환혈족 암살자의 여유로운 태도에 제한을 둘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입에서 자꾸 어머니 이름이 나오니까 듣기에 거북한데.”
그러면서 루빈은 암연에 공격성을 담아 환혈족을 향해 겨누었다.
칼끝처럼 날카롭고 서늘한, 잘 제련된 암연을 느끼는 순간, 환혈족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
그건 강력한 상대를 마주했을 때의 긴장이 아니라, 기이하고 불가해한 대상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무의식적 긴장감이었다.
환혈족으로 태어났지만, 그녀는 암살검가의 일원으로 성장했다. 암살검가의 혈통처럼 선천적인 암연은 아니지만, 의식을 거쳐 후천적인 암연을 물려받은 몸.
상대가 펼치는 암연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그 경지를 가늠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보통 눈앞의 꼬마 정도면 1성 정도의 암연을 다룰 수 있다. 그때의 암연은 단련되지 않아, 보통 투박하고 거칠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이 암연은……
최소 수십 년 이상 암연을 다뤄본 자의 능숙한 솜씨였다.
루빈이 이어 말했다.
“놀랐나?”
“…….”
“그러니까 너무 맘 편하게 있진 말라고. 허튼 생각도 버리고. 네가 나로 변신하더라도 이런 능력까지 갖추진 못할 테니까.”
이 한마디와 함께 루빈은 다시 암연을 감추었다. 순간적으로 잠깐 드러낸 정도에 불과해서 바깥에 있는 척살조가 알아차릴 틈도 없었다.
능숙하게 암연을 통제하는 솜씨 또한 환혈족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이제야 내 말을 경청해 주려는 것 같네. 고마워.”
“…문제적 암살자라는 말, 내가 아니라 너한테 써야겠는데?”
“칭찬으로 들을게.”
좀 더 여유로워진 건 루빈 쪽이었다. 척살조의 표적을 마주한 상황에서도 루빈은 심지어 미소까지 보여주었다.
“자, 환혈족 암살자. 아직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게 있잖아. 네 이름 말이야.”
그때 환혈족은 머릿속으로 탈출로를 계산하는 중이었다.
바깥에는 아직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척살조원 두 명이 있고, 그들 곁으로는 본가의 호위가신이 둘이나 있다.
거기에 맞은편에 앉은 로이넨 혈통은 예측 불가한 정체불명의 대상.
순간적으로 마주했던, 능수능란한 암연 운용 솜씨로 인해 그녀가 지녔던 상식은 틀어져 버렸다.
세이렌의 아들을 납치해서 척살조에게 쫓기는 상황을 타개하려던 계획이 허무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냥 이대로 도망쳐야 하나?’
전력을 다한다면 도망칠 순 있을 것이다. 다만 궁금했다. 눈앞의 이 루빈이란 아이의 정체가.
적의는 없어 보였다. 일단은 몇 마디 대화를 이어가 볼까.
“티나 키루하. 그게 내 이름이다.”
“…뭐?”
티나 키루하?
환혈족이 자기 이름을 밝힌 순간.
이번에 놀란 쪽은 루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