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첫 수업 (3)
“교수님입니다.”
루빈의 목소리가 교실 안에 울렸다. 오직 에겔러 교수의 귓가에만 닿는 소리였다.
그 순간, 생도들은 방음막이 겹겹이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에겔러 교수의 추가 조치였다. 이제 다른 아이들은 루빈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교수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나라니? 내가 설계 마법이라는 건가, 루든 생도.”
“그렇습니다.”
루빈은 담담했고, 그 담담함이 에겔러 교수를 더 흥미롭게 했다.
루빈에 앞서 대답했던 생도들은 모두 정답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오답의 대부분은 ‘공간’에 쏠려 있었다. 동굴 같은 내부가 실은 가짜라거나, 현재 교실의 온도가 실제와는 다르다거나.
에겔러 교수는 가볍게 웃었다.
“정답을 말할 만한 생도들을 다 걸러낸 줄 알았는데, 하나를 놓쳤나 보군. 계속 설명해 보겠나?”
“지금, 교수님은 투사체(幻影體)입니다.”
“흠…….”
교수는 짧게 침음을 흘렸다. 정답이었다.
루든의 말대로, 교실에 있는 그의 모습은 ‘허상’이었다. 에겔러가 설계한 마법에 따라 그대로 재생되고 있을 뿐. 진짜 에겔러 교수는 지금 전혀 다른 공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마법이 쓰였는지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정답이었지만, 에겔러는 곧바로 방음막을 해제하지 않았다. 이대로 대화를 끝내긴 아쉬웠다.
“괜찮은 마나 감응력을 지녔군, 루든 생도.”
마나 감응력이 교수가 생각하는 정답의 근거였다. 이것이 뛰어난 생도라면, 마적석에 설계해 둔 환영 마법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으니까.
아마 마나 감응력이 출중한 클로이나 달리아에게 대답을 말할 기회가 있었다면, 그들 역시 정답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의 생각과 달리, 루빈은 마나 감응력 덕에 환영 마법을 알아낸 게 아니었다.
“그것 말고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음? 무슨 소리지?”
“그냥 감이었습니다. 몇 가지 단서가 제 눈에 보였거든요.”
애초에 루빈에게는, 교수가 생각하는 정도의 마나 감응력을 갖추지 못했다. 마나 감응력으로만 보자면 루빈은 C반에서 최하위에 속할 정도였으니.
그리고.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하게 짚을 필요가 있어. 마나가 뛰어나다 오해받으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까.’
앞으로 나와 모두에게 마법 시범을 보이라고 한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을 것이다. 가끔은 단순한 운으로 위장하는 것도 필요한 법.
‘물론 암연으로도 쉽게 간파할 순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암연을 쓸 필요도 없었다. 루빈이 말한 그대로, 그저 눈썰미만으로도 알아챌 만한 명백한 단서가 많았으니.
“여러 가지 사실을 조합해서 나온 결론입니다.”
“설명해 줄 수 있겠지? 궁금하군. 내 환영 마법에 빈틈이 있었단 얘기니까.”
“일단 교수님은 오늘 세 시간의 수업 내내, 교단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죠. 움직여야 할 일에는 전부 조교를 시키셨습니다.”
“그 정도만으로 확신하긴 힘들었을 텐데?”
“조교를 바라보는 교수님의 시선의 각도가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건 에겔러도 인지하고 있었다. 사소한 것이라 일부러 교정하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굉장히 미세한 각도 차이라 눈치채기 어려웠을 텐데.”
“제겐 말하는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거든요.”
“흠, 또 있나?”
“오스카가 밀가루를 뒤집어썼을 때요. 그때 저도 오스카와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교수님은 저를 벌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벌을 받을 만했는데 말이죠. 분명 밀가루 때문이었을 겁니다.”
에겔러는 더욱 흥미로워졌다. 처음에는 그저 넘겨짚은 정도 같았는데. 루든이 말하는 근거들이 점점 핵심에 다가가고 있었다.
‘일부러 벌주지 않은 것도 눈치챘군.’
루든의 말대로 밀가루 때문이었다.
오스카와 달리, 루든은 투사체와 너무 가까웠다. 루든에게 벌을 주다가, 자칫 밀가루가 교수 쪽으로 튄다면, 교수가 허상이라는 걸 모두에게 들켰을 것이다.
“더 있나?”
“그림자도 있습니다.”
“설명해 보게.”
“교수님의 그림자는 지금 빛의 각도로는 절대 불가능한 형태거든요. 역시 아주 미세한 각도 차이지만요.”
교단 위에 드러난 교수의 그림자 또한, 투사체 마법만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별도의 마법을 시전해 만들어 놨었는데, 그 각도의 차이를 또다시 눈치챈 것이다.
이것들 말고도 근거야 더 있었지만, 루빈은 그 정도에서 멈췄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이군.”
처음이었다. 지난 5년 동안 에겔러 교수의 수업은 늘 투사체로 진행되었고, 그걸 찾아내지 못한 학생들이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광경으로 끝이 났다.
간혹 정답을 맞히는 학생이 있긴 했지만 모두 마나 감응력에 따랐을 뿐이었다.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전혀 다른 접근법이었기에.
하지만.
‘눈썰미는 좋군. 단순 그 정도라 생각하면 되려나.’
마법생도로서의 재능이라 보기엔 어려웠다. 그래서 대화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정답이다. 루든 포이넨 생도가 제대로 대답했다.”
모든 방음막을 해제한 교수는 다른 생도들을 향해 말했다.
“저, 정답이라고?”
“진짜?”
잠시 후, 생도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루빈 다음으로 순서를 기다리던 생도들은 밀가루를 피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반면 루빈보다 앞서 오답을 말했던 생도들은 도대체 무엇이 정답이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와, 나는 살았다. 저 애 덕분에.”
“도저히 나는 정답을 못 찾겠던데, 어떻게 찾아낸 거지?”
“아이 씨, 궁금해 미치겠네. 교수님이랑 무슨 말들을 나눈 걸까?”
지켜보던 에겔러 교수가 소란을 잠재웠다. 투사체로는 마지막 말을 남기는 셈이었다.
“모두 조용히.”
투우우우.
교수의 투사체가 아득한 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교수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다들 가만히 기다리세요. 이제 곧 교수님이 다시 나오실 겁니다.”
첫 수업의 구경거리를 놓친 조교가 아쉬움을 억누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시 후, 층계를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생도들은 교실의 출입구를 지켜봤다.
교수는 아까 등장했던 그대로 교단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그가 걸음을 내딛는 바닥 위로 푸른빛이 일렁였다.
“생도들, 저 바닥의 푸른빛, 그리고 여기 교단에 있는 푸른빛이 보이나? 이건 며칠 전에 내가 이 교실 바닥에 설계 마법을 걸어두었던 흔적이다.”
교수는 곧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 설계 마법에 쓰인 마적석은 구하기 힘들다 했던 2급 마적석이었다. 3급으로는 이 정도로 정교한 환영 마법은 불가능하니까.”
그제야 생도들은 교실에 어떤 설계 마법이 있었던 건지 이해하는 것 같았다. 마법에 대한 지식이 얕은 생도들은 주변 아이들에게 질문하기 바빴다.
한동안 교실 안에 번지는 웅성거림.
교수는 그걸 다잡기보다는, 잠자코 기다렸다.
“환영 마법? 나도 그런 걸 본 적은 있는데, 저 정도는 처음이야.”
“교수님이 그랬잖아, 2급 마적석으로 한 거라고. 네가 이제까지 본 건 3급이거나 그 이하라는 뜻이지.”
“하긴 내가 본 투사체는 일렁이거나 끊기기도 했어.”
잠시 후, 떠들 시간을 충분히 줬다고 생각한 에겔러 교수가 또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다들 이걸 보도록. 이제 마적석의 등급에 따라 마법에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지를 비교해 보겠다.”
툭, 툭, 툭.
칠판에는 세 개의 마적석이 붙어 있었다. 각각 4급, 3급, 2급의 마적석이었다. 교수는 각 마적석에 똑같은 환영 마법을 걸었다. 이번에도 ‘투사’였다.
피이잉.
투사의 대상은 동일한 새 조형물이었다.
“말했다시피 아까 나를 투사시킨 건 2급 마적석이다. 다른 두 마적석에 비해 보유한 마나의 양도 풍부해서, 앞으로도 여러 번 ‘투사’를 펼칠 수 있는 거다.”
칠판 앞으로, 똑같은 세 마리 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4급 마적석은 누가 봐도 투사체라고 알아볼 만큼 볼품없었다. 색깔도 제대로 담지 못했고, 투사체엔 일렁임이 만연했다.
3급은 그보다는 나았다. 언뜻 보면 투사체인지 못 알아볼 정도. 밤에는 더더욱 분별하기 어려울 터였다.
2급은 그야말로 본체와 똑같았다. 만져보면 만져질 것처럼. 루빈처럼 외부적인 차이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결코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적석에 부여된 마법은 휘식이 보이지 않는군.’
생도들이 신기한 눈으로 마적석의 차이에 집중할 때, 루빈만은 다른 생각 속에 있었다.
조금 전 에겔러가 ‘투사’를 펼칠 때.
그땐 루빈의 시야에 ‘투사’의 휘식이 나타났다. 그런데 마법이 마적석에 내장된 뒤, 정작 투사가 발현됐을 땐 휘식이 보이지 않았다.
글레이튼의 팔찌를 통해 상대방의 휘식을 알아낼 수는 있지만 설계 마법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달리아 델린, 질문 있습니다.”
“뭔가?”
“그렇다면 1급 마적석에 ‘투사’를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른 학생들도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2급 마적석이 이토록 정교하다면, 1급 마적석에는 어떻게 될까.
“…그건 나도 모른다.”
“네?”
“아까 말했다시피, 현재 1급 마적석은 황궁에만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지. 그래서 ‘투사’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른다는 거다. 하지만 추측해 볼 만한 근거는 하나 알고 있다. 바로 오래전의 대마법사 글레이튼의 기록이다.”
제국으로 통일되기 이전의 시대, 대마법사로 칭송받던 글레이튼은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고 했다.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라고.”
“네?”
“그뿐이다. ‘투사’ 마법과 1급 마적석에 관한 기록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루빈은 그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투사의 격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인가?
마침, 조교가 자리를 돌아다니며 수업용 4급 마적석을 모두 수거하기 시작했다. 에겔러 교수는 칠판에 붙여놓은 마적석을 하나씩 떼어내며 수업이 끝났음을 알렸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다음 시간엔, 어째서 마법에 관한 지식도, 경험도 없는 신입생도들 커리큘럼에 설계마법학이 존재하는지부터 짚어가겠다.”
층계를 내려가기 직전, 교수는 루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잊을 뻔했군. 루든 포이넨 생도. 상점 10점이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 * *
학급이 다를지라도, 대개 신입생도들의 학기 초 풍경은 비슷하다. 날카로운 경계심과 어색한 침묵만이 가득한 교실.
그건 쉬는 시간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각 학급이 너무도 조용한 나머지, 교수와 문답을 주고받는 수업시간이 그나마 활기를 띨 정도였다.
웅성웅성.
하지만 C반은 달랐다.
쉬는 시간이 주어지자, C반은 또다시 시끌벅적한 시장 한복판으로 변했다.
베니테즈 교수가 내준 과제 때문에 조용하려야 조용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더구나 여기엔 클로이라는 유명인물이 있었고, 좀처럼 입을 다물지 않는 오스카까지 있었다.
“에겔러 교수가 투사체였다는 걸 어떻게 알아차린 거야?”
“대답 좀 해줘! 바로 앞자리에서 봤는데도 몰랐거든.”
“클로이랑 달리아는 마나 감응력으로 알고 있었다던데, 루든, 너도야?”
루빈은 한동안 질문세례에 시달렸다. 원래는 클로이에 관한 일화만으로 대화거리는 충분했다. 그런데 첫 수업 이후로 아이들은 투사체를 찾아낸 방법을 알고 싶어 했다.
“그림자하고 바람하고… 그런 것들을 관찰하다 보니까 알 수 있었어.”
“그렇게도 알아낼 수 있었구나. 나는 사냥꾼 아버지를 두고도 그걸 못 알아봤네.”
그렇게 생도들과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파악하던 중, 이번엔 오스카가 루빈 맞은편에 앉았다.
“야, 루든. 너 혼자 벌점 복구하는 거냐?”
“아… 생각해 보니 그러네. 너는 아직 기숙사에서 받은 벌점이 있었지. 벌점 10점이었나.”
“그래. 이 배신자 자식아.”
스레힘 사감한테 받은 벌점 5점이 있던 루빈은 상점 10점을 받으면서, 상점 5점이 되었다. 반면 오스카는 여전히 벌점 10점에 머물고 있었다.
“근데 오스카, 상점을 많이 쌓으면 뭐가 있는 거야?”
“흠, 그건 나도 궁금해서 알아봤지. 그런데 매년 다르대. 어떤 땐 마도구를 주고, 어떤 땐 제도(帝都)나 수도를 견학할 기회를 주기도 한대.”
마도구와 제도 견학이라.
“루든. 너, 나랑 같이 할 거지?”
“뭘? 제도 견학?”
“아니? 그런 불가능한 얘기를 왜 해, 나 놀리냐? 상점 받는 거 말고… 아까 수업 때 에겔러 교수님이 말한 거 있잖아. 찾으면 상점 50점 준다고 한 거!”
무엇을 말하는지 곧바로 떠올랐다. 카포티니 마법학교 내에 1급 마적석이 내장된 숨겨진 장소가 있다는 소문. 에겔러 교수는 가볍게 무시했지만, 몇몇 학생들 반응은 진심이었다.
“나랑 같이 찾아보지 않을래?”
지금 보니, 오스카도 진심인 것 같다.
“왜 뜸 들이지, 룸메이트? 설마, 헛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글쎄.”
“그건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설과도 같은 얘기라고! 비밀의 방이 분명 어딘가 숨겨져 있을 거야. 그 안에 뭐가 있을까?”
눈을 반짝이는 오스카. 루빈이 아무 대꾸도 해주지 않자, 그가 도끼눈을 떴다.
“설마… 벌점 10점짜리 친구는 안 받아주겠다는 건 아니지?”
“생각해 보고.”
“칫. 오케이, 알았어. 그나저나 다음 수업은 뭐냐… 에? 시시한 교양과목이네.”
곧바로 이어지는 수업은 ‘카포티니의 역사’였다.
학교엔 크게 두 분류의 수업이 있었는데, 마법 수업과 비마법 수업이었다.
비마법 수업은 대륙 전반의 역사와 지리를 비롯한 교양과목들로 채워졌다. 오스카 말처럼 시시하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아이들의 긴장감도 덜했다.
그럭저럭 오늘치의 수업을 모두 끝낸 뒤.
진이 빠진 신입생도들은 힘없는 걸음으로 카논 관을 나섰다.
첫 수업을 기념하여 기숙사에서 특식이 나온다고 기대하던 오스카조차 어깨가 축 늘어져 힘겹게 걸음을 옮길 정도였다.
“뭐? 기숙사로 안 간다고? 오늘 특식 나오는데?”
“오늘 서점에 가봐야 해.”
기숙사로 향하는 길. 루빈은 갈림길을 앞두고, 오스카에게 그렇게 둘러댔다. 오스카도 룸메이트가 출판사업을 하는 귀족 가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서점을 이유로 대면 쉽게 납득했다.
“내 몫까지 많이 먹어.”
“역시 귀족들이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루빈은 곧바로 곤돌라를 타고 카포틴 호수를 가로질렀다. 기숙사가 아닌 외부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마탑지구 내 상업구역 쪽으로 향하는 부유한 생도들이 보였다.
하지만 루빈의 목적지는 그쪽이 아니었다.
“…….”
스윽스윽 나아가는 곤돌라 위에서 루빈의 눈빛은 차갑게 변했다.
그의 곤돌라가 향한 곳은 마탑지구 밖이었다. 주거지역 중 하나, 웅장하고 견고한 집들이 모여 있는 부촌이었다.
이곳에는 카포티니의 행정직 고위급들이나 마법 관련 상업으로 부를 이룬 자들이 모여 살았다.
그리고 마법학교의 교수들 중 몇몇도, 학기 중에는 이곳에다 거처를 임대했다.
‘어두워지려면 좀 남았군.’
루빈은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인적이 드문 곳이긴 했지만, 암연을 넓게 펼치는 걸 잊지 않았다.
냐아아옹.
담벼락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일몰이 만들어내는 주홍빛에 물들었지만 본래 털의 색깔은 한없이 새하얀 고양이였다.
“티나. ‘그자’의 집 근처로 가. 그리고 그가 귀가하면 알려줘.”
냐아아옹.
고양이가 유연한 몸놀림으로 담벼락에서 내려와 골목 밖으로 나갔다.
루빈은 모든 마법생도들에게 지급된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입고 있던 마법생도 로브를 벗은 다음, 그걸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검은색의 로브를 꺼냈다.
“흠.”
스으으으으.
아공간은 냉기로 가득했다.
영혼무구인 핏빛서리가 뿜어내는 혹한의 서리. 루빈은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주인을 인식한 검이 빠르게 냉기를 잠재웠다.
그 상태로, 핏빛서리를 꺼낼지 말지 잠시 고민을 이어가는 루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