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칙명부의 끄나풀 (1)
조금만 더 기다리면 날이 어두워질 것이다.
루빈은 골목 깊숙이 몸을 숨긴 채, 어둠이 내려앉기를 기다렸다. 은폐할 수 있는 건물들을 이용한다면 굳이 어둠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곳에서, 루빈은 페르 로렌치니에 관한 사실들을 떠올렸다.
‘페르 로렌치니…. 오스카.’
오스카가 바로 그 광기의 선봉 마법사라는 루빈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황제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진짜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회귀했음에도 아직 알지 못하는 사실들 말이다.
페르는 왜 가명을 쓰고 숨어 있는 거지? 어떻게 그 정도의 경지까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거지? 어째서 암살검가를 그토록 증오했던 거지?
오직 페르를 제거하기 위해 이곳 카포티니를 위장별채로 선택했던 루빈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마주하게 된 건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이었다. 예상치 못한 구도와 뜻밖의 세력들.
‘칙명부… 로젠탈러. 이것부터가 평범하진 않아. 로젠탈러는 말단 관리요원이 절대 아니야. 그런 그가 어째서 여기에 있지?’
죽기 전의 루빈은 여러 칙명부 관리요원을 마주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들 중엔 특정 도시에 상주하는 말단요원도 있었지만, 작전의 규모나 중요도에 따라 움직이는 요직들도 있었다.
루빈이 파악하기에 로젠탈러는 결코 체급이 낮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어쩌면 칙명부의 비전 검술까지 익힌 자일지도 몰라.’
루빈이 로젠탈러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무인의 자취라면, 그럴 확률이 컸다.
그런 자들은 현장이 아닌 칙명부 수장의 곁을 지키는 게 일반적인데.
‘로젠탈러가 여기에 있는 건 페르 로렌치니 때문인 걸까? 아니면…….’
루빈의 머릿속에서 여러 경우의 수들이 복잡하게 얽혔다. 일반적이지 않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선 페르가 마법생도로 있는 동안의 교장이 키건이라는 점. 키건은 마법사여단장 후보에 꼽힐 정도의 실력 있는 마법사였다.
거기에, 교류학생으로 와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제국귀족 위더스푼가의 막내딸이라는 점.
그리고 페르의 동기 중에 삼휘의 기수 이엘로스 가문과 그에 준하는 델린 가문도 있다는 점.
‘내 회귀가 개입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구도는 루빈의 전생에서도 똑같이 펼쳐졌다는 뜻이다.
‘그 속에서 페르 로렌치니라는 괴물이 만들어진 거고.’
어쩌면 페르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진실은 고작 한 움큼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대신, 페르조차 모르는 진실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진실이, 황제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무기’가 될거란 확신이 들었다.
‘로젠탈러… 우선 로젠탈러부터 접근해야 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티나의 전음이 루빈의 머릿속에 울렸다.
-루빈, ‘그자’가 귀가했어.
때가 됐다.
루빈은 골목을 나섰다. 빠르게 그 건물로 나아갔다.
담벼락 위. 흰 고양이가 여유롭게 꼬리를 펄럭이고 있었다. 티나 곁으로 반딧불이가 너풀거리듯 날아다녔고, 티나는 거기에 정신이 팔린 채였다.
그러다가 루빈을 발견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뀌었다.
-음, 왔어?
-교수는?
-서재에 있어. 하인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냈고. 지금 들키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2층 창문이랑 뒤란 통로뿐이야.
루빈의 암연도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담벼락이 높을 뿐, 그 외의 경비 시설은 갖춰지지 않은 저택이었다.
사실, 마법도시로 유명한 카포티니는 평화로운 도시였다. 도시의 경비병들이 제 역할을 할 만한 사건 자체가 드문 곳이었다.
중요 시설들이 마탑지구 내부에 있는 데다가, 마탑지구는 밤과 아침 사이에 자체적인 결계를 운용했으니, 치안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루빈? 왜 저 교수를 감시하는 거야?
-로젠탈러와 연결된 사람이니까.
-저 사람이? 저 교수… 이름이 뭐였더라?
그때, 저택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졌다. 서재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온 것이다.
“…….”
우연하게도, 남자의 눈길이 조금 전 루빈이 서 있던 자리에 머물렀다. 이제는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지만.
치익.
남자는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그가 발견할 수 없는 사각지대로 피한 루빈과 티나는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버릇인 듯, 남자는 뒤로 묶은 장발의 회색 머리를 잠시 매만졌다. 그 틈에 루빈은 티나의 질문에 마저 답했다.
-가이젠.
담배를 다 피운 가이젠 교수가 주변을 쓱 살피더니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
쿵!
발코니와 연결된 서재의 문이 닫혔다.
가이젠 교수. 그는 D반의 담임이었다. 루빈이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전공은 ‘마법약제조학’. 카포티니에서 교수로 지낸 지는 올해로 3년에 불과했다.
‘입학 무도회 때.’
가이젠 교수가 로젠탈러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 바로 그날이었다.
당시 루빈은 쿠제에게 두 가지 지시를 내렸다. 하나는 투니오 가문에 대해 조사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도회가 진행되는 동안 로젠탈러를 면밀히 살피라는 것이었다.
‘마법학교 내부에 칙명부와 닿아 있는 인물이 나 하나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저 교수일 줄은.’
처음에 의심했던 대상은 키건 교장이나 에겔러 교수였다. 둘 다 마법사여단에 속했던 자들이었기에, 칙명부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전부 드러났다. 로젠탈러가 학교 안에 심어둔 사람은 가이젠 교수.
-칙명부의 끄나풀이라면, 저 사람이 칙명부에 대해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
칙명부를 알고 있다는 것.
칙명부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암살검가이기에, 이건 곧 그가 암살검가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니. 모를 거야.
루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칙명부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황제만의 비밀 조직이었다. 칙명부 수장 룰포조차 황실 안에서는 전혀 다른 직책으로 있을 터였다.
-로젠탈러가 지금 벌이는 일은 칙명부 이름으로 하는 게 아닐 거야. 두 사람의 접선 방식이 그걸 말해주고 있거든.
그날, 로젠탈러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가이젠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입학식이 치러진 행사장의 작은 틈에다 암호가 적힌 종이를 숨겨놓는 식이었다.
그런 다음, 무도회가 끝나고 반 배정식이 진행되기 직전에 나타난 가이젠 교수가 종이를 회수한 것이다.
하지만 그날 로젠탈러도 가이젠도, 루빈이 미리 그 종이 내용을 확인했다는 걸 몰랐다.
딸각.
루빈은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응? 뭐가?
바로 그때. 가이젠 교수의 저택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쿵. 쿵. 쿵.
로젠탈러가 남긴 쪽지 그대로였다. 쪽지에는 ‘월요일 7시에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쓰여 있었다.
-루빈. 웬 꼬마 애가 왔는데? 로젠탈러가 아니라.
티나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담벼락 위를 이동하여, 저택 현관 너머를 확인했다.
루빈은 놀라지 않았다. 이 역시 예상했던 바. 로젠탈러가 직접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골목의 꼬마를 심부름꾼으로 이용하는 거겠지.
가이젠 교수가 저택을 나와 작은 정원을 가로질렀다.
끼이익.
“…….”
현관문 앞에 서 있는 꼬마의 모습에, 교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저… 이걸 갖다 드리라고 했습니다.”
“누가?”
“모르겠어요, 어떤 아저씨가…….”
“다른 말은 없었고?”
“네. 없었어요.”
가이젠 교수가 받아 든 건 자그마한 상자였다. 손으로 상자를 열어보려던 교수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상자를 그냥 움켜쥐었다.
쿵.
다시 현관문을 닫고, 교수는 몸을 돌렸다. 서둘러 들어가서 상자를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담벼락 위에 앉아 있는 흰 고양이를 발견했다.
“…거슬리는군.”
냐아옹!
고양이는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담벼락 저쪽으로 뛰어내려 눈앞에서 사라졌다.
빠른 걸음으로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는 교수. 그는 서둘렀고, 잔뜩 긴장한 채였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는 다시 한번 주변을 살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현관문 앞에서 심부름꾼 꼬마를 상대하던 그사이, 저택 안으로 소리 없이 사라진 그림자가 있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루빈은 복도에 숨은 채, 가이젠 교수가 서둘러 서재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흑색 로브를 뒤집어쓴 루빈은 암연으로 자취를 죽이고 있었다. 그의 인영은 집중해서 바라보지 않으면 잘 분간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저벅저벅.
가이젠 교수가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그가 서재로 들어가자마자, 루빈도 더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위치로 이동했다.
교수는 서재 책상에 앉자마자, 머뭇거리지 않고 상자를 개봉했다.
“…….”
상자엔 잠금 마법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고차원의 잠금 마법은 아니었기에, 교수는 한순간에 풀어낼 수 있었다.
이내 조그마한 상자에서 나온 것은.
“마적석이잖아. 4급인가?”
가이젠 교수의 혼잣말이 방 안에 퍼졌다.
마적석이라. 교수를 지켜보는 루빈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안 그래도 오늘 오전 수업에서 마적석을 다루었는데.
4급이라면, 교육용으로 쓰이는 가장 하품의 마적석이다. 이건 우연일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 의심이 에겔러 교수에까지 뻗어 나가진 않았다. 구하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게, 바로 저 4급 마적석이었으니까.
“제길, 발동 조건이 뭐지?”
“…….”
가이젠 교수는 신경질을 부렸다. 이런저런 행동을 해보며 마적석을 발동시키려고 했다. 손가락으로 눌러 보고, 온기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유효하지 않았다.
그때.
“아.”
가이젠 교수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곧바로 다음 마법을 펼쳤다.
‘방음막이다.’
글레이튼의 팔찌 덕에, 가이젠 교수의 얼굴 옆으로 떠오른 휘식. 그걸 본 루빈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형성된 방음막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가이젠 교수의 비밀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터.
다행히 방음막의 면적은 넓었고, 루빈이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방음막 내부에 위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4급 마적석이 발현됐다. 발동 조건이 바로 방음막이었던 것이다.
피이이이잉.
루빈은 몸을 숨긴 상태로 지켜봤다.
마적석으로부터 어떤 인영이 나타나고 있었다.
다만 마적석의 품질이 낮았기 때문에 장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지지지직. 지지지직. 잡음이 섞여들었고, 화면이 계속 일그러졌다.
교수의 얼굴 위로 불빛이 어른거린다. 지금, 교수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가이젠 타디스 교수. 가…젠 타디… 교수.
잡음과 함께 화면 속 인체가 가이젠 교수를 호명했다. 그러나 가이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환영 마법은 현재 상태를 그대로 중계하는 ‘투사’가 아니다. 녹화된 장면이었다.
‘못 알아보겠어. 그래서 일부러 4급 마적석을 쓴 거였군.’
루빈의 흑안이 어둠 속에서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저 안에 대체 무슨 장면이 담겨 있을까.
‘뭔진 모르겠지만, 페르를 황제의 편으로 회유할 방법이 담겨있겠지.’
화면 속 남자는 얼굴을 가린 상태이긴 했지만, 그것 말고도 마적석의 상태가 형편없어 그를 알아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저 체형은… 로젠탈러가 아닌데?’
화면 속 정체불명의 남자는 계속 가이젠 교수를 호명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한 뒤, 이 녹화 장면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장면이 이어졌다.
“……!”
루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 것도 그때였다.
하마터면 온몸의 자취를 죽이는 데 집중한 암연이 흐트러질 뻔했다. 그만큼 예상에서 벗어난 내용이었다.
“미치겠군. 이게 뭔 소리인지.”
화면 속 지령을 듣고, 가이젠 교수는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난감해한들, 녹화된 장면은 그걸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를 여러 번 호명한 것처럼, 똑같은 문장의 지령을 여러 번 반복할 뿐.
-학교에 숨어 있는 신입 마법생도 페르 로렌치니를 찾아라. 그리고 죽여라. 학교에 숨어 있는…….
곧 제 역할을 다한 마적석에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올랐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자동적으로 폐기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