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칙명부의 끄나풀 (2)
“제기랄! 이게 뭔 개소리야? 페르? 걘 또 누군데 죽이라는 거야?”
가이젠의 거친 말소리가 방음막 내부에서 울려 퍼졌다. 교수는 잘 정돈됐던 머리를 마구 헝클더니, 표정을 구기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혹시 신입생 명부에 이름이 있으려나?’
그는 한 손으로 담뱃불을 붙이고, 다른 손으로는 신입생 명부를 뒤적였다.
A반부터 D반까지, 각 반에 소속된 학생의 이름을 모두 살폈지만.
‘없잖아.’
아무리 찾아봐도 페르 로렌치니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니지. 이름이 없는 게 당연해.’
생각해 보니 그랬다.
마적석에 녹화된 영상에는 ‘학교에 숨어 있는’ 페르 로렌치니를 찾아 죽이라고 했으니까. 숨어 있다는 건 곧 신분을 위장했다는 의미일 터.
“흠.”
가이젠 교수는 깃펜을 들었다.
그리고 학생명부를 다시 훑어보며 몇몇의 이름 위에 선을 죽 그어나갔다.
일단 페르 로렌치니일 가능성이 없는 학생들부터 제외시켜 두는 것이다.
신분이 확실한 학생들, 이를테면 클로이 위더스푼이나 에릭 이엘로스, 달리아 델린 같은 유명 가문의 자제들 말이다.
그렇게 담임으로 있는 D반부터 시작하여 A와 B반까지 확인해 갔다.
가장 마지막으로 C반의 명단으로 넘어간 교수는 우선 클로이와 달리아의 이름부터 제거했다. 이 두 명의 생도 중에 페르 로렌치니가 있을 확률은 제로.
“…….”
그때.
부드럽게 나아가던 가이젠 교수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나란히 붙어 있는 두 이름.
루든 포이넨. 그리고 오스카 투니오.
가이젠 교수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 두 생도는 베니테즈 교수가 선점한 학생들인데.
마법사 가문도, 명망 있는 귀족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베니테즈 교수가 선점을 했던 터라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베니테즈라는 작자가 워낙 독특한 철학을 지닌 교수여서 그러려니 넘어가긴 했지만.
‘루든 포이넨, 이 생도는 위더스푼의 딸과 아는 사이란 말이지.’
이윽고 가이젠은 깃펜으로 루든의 이름 옆에 따로 표시를 남겼다.
현재로서는 이 아이가 페르 로렌치니라는 근거는 없지만, 어쨌거나 살펴봐야 하는 학생 중 하나인 건 분명했다.
‘그건 그렇고.’
은밀하게 죽여야 한다고?
페르 로렌치니를 찾아내는 것도 문제였지만, 이 또한 그를 골치 아프게 하는 문제였다.
여긴 마법학교고, 그는 이 학교의 교수였다. 게다가 죽여야 하는 대상은 학생 중 하나다. 그냥 처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은밀하게 죽이라니.
‘아무리 내가 저들한테 묶여 있다고 해도, 뭐 이딴 개 같은 경우가 있는 거지?’
쾅!
신경질이 뻗친 가이젠 교수가 책상을 힘껏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쾅! 쾅! 쾅!
손이 얼얼해졌지만 화가 가시지는 않았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쉰 가이젠은 옷매무새를 다잡고 헝클었던 머리를 다시 손질했다. 회색의 긴 머리를 다시 제대로 묶었다.
피이이잉.
서재 안에 펼쳤던 방음막을 제거하던 중, 그의 눈길이 창문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었지만,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인가?’
아니면 새인가? 가끔씩 날아들어 창문을 부리로 콕콕 쪼곤 했으니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창문이야 어쨌든 간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늪에 빠진 것 같은 이 빌어먹을 상황. 교수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되돌아봤다.
사실, 이 모든 걸 초래한 건 가이젠의 도박 습관이었다.
마법약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갔던 상업도시 아베른. 그곳에서 가이젠은 심심풀이로 구경하던 검투 도박에 빠지게 되었다.
돈을 걸었던 검투사마다 속절없이 패배했고, 가이젠은 돈을 크게 잃고 말았다.
거기서 멈췄으면 돈만 잃고 끝났을 테지만, 가이젠은 그만두지 않았다.
그에겐 잃었던 돈을 만회할 뿐만 아니라, 형편없는 검투사도 강인한 무인으로 만들 나름의 능력이 있었으니까.
불법 마법약 제조. 그는 자신의 전공을 악용했다. 자신이 돈을 거는 검투사가 이길 수밖에 없는 마법약을 제조했다.
‘그때라도 멈췄어야 했는데.’
진짜 심각한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그가 검투사에게 제공하는 마법약이, 흘러들어 가서는 안 되는 작자들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귀족 가문인지, 왕족인지, 용병단인지. 아니면 상인 길드인지 모르겠지만.
나중에야 가이젠은, 자신이 영향력의 끝을 가늠할 수도 없는 미지의 세력에 휘말렸다는 걸 깨달았다.
‘나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었어.’
이름과 나이, 가족관계. 그리고 가이젠이 카포티니 마법학교의 교수라는 사실도.
심지어는 언젠가 이 학교의 교장으로 올라서려는 가이젠의 숨은 욕망까지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우리 말을 잘 따르면, 학교 역사상 가장 젊은 교장으로 만들어주지.”
도대체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눠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들은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은 채로 가이젠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이번 신입생도들의 담임교수를 자처한 것도 저들의 지시 때문이었다.
사실, ‘학생 선점’에서 선택한 학생 중에는 가이젠 교수가 원하는 학생이 없었다. 이 역시 정체불명 세력의 지시를 따랐을 뿐.
그런데.
‘이젠 학생까지 찾아 죽이라니. 이 개새끼들, 나를 말려 죽일 셈인가.’
그때였다.
가이젠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교수님?”
“……?”
“괜찮으십니까?”
톰슨 조교가 서재 문을 붙잡은 상태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두 시간 전에 심부름을 핑계로 저택 밖으로 내보냈는데 지금 막 돌아온 것이다.
“노크했는데도 대답이 없으시길래…….”
“됐어. 사 오라는 건 사 왔지?”
“예, 여깄습니다. 내일 신입생들 수업에 쓸 재료입니다.”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교가 건네는 상자를 받았다. 당분간 수업에 사용할 마법약 재료들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교수는 재료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그러면서 문밖에 서 있는 조교를 향해 말했다.
“네.”
“다들 마법약제조학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야. 신입생도들도 알게 모르게 다른 교수들 수업을 중시하는 것 같고 말이지. 공격 마법이라느니, 운신 마법이라느니. 뭐, 그런 것들. 안 그런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지요.”
조교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젠을 살피는 그의 눈빛에는 불안함이 서렸다.
뭐지? 심부름 다녀온 사이, 가이젠 교수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예전부터 날카로운 구석이 있긴 했는데, 지금 교수한테서는 음습함마저 느껴진다고나 할까.
“방금 네가 오기 직전에, 아주 색다른 교육법이 필요하겠다는 결론을 내렸지.”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쳐왔기에, 조교는 가만히 몸을 움츠렸다.
“이번 신입생도들은 유독 욕심이 난단 말이야. 기대주들도 많고, 또 내가 처음으로 담임을 맡기도 했으니.”
“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 수업에 치유마법학 조교를 대동시키도록 해.”
“네?”
“못 들었나?”
교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집중 좀 하지? 내일 내 수업 중에 학생들의 경미한 부상이 예상되니까, 치유마법학 조교를 대동시키라고.”
조교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 들었나 했는데 아니었다. 치유마법학 조교라니.
마법학교이다 보니, 종종 수업 중에 크고 작은 부상이 발생하긴 했다. 십수 년에 한 번꼴로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고학년들한테나 벌어졌다. 신입생도들의 수업에, 그것도 학기 초에 치유마법학 조교를 대동할 일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하지만 가이젠 교수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한 조교는, 그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신입생 명부를 거칠게 움켜쥔 교수가 서재를 나설 때까지, 가만히 몸을 움츠리기만 할 뿐.
* * *
“야!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얼마나 기다렸는데.”
기숙사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오스카의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파앙!
대답도 하기 전에 천장 쪽으로 손을 뻗어야 했다. 루빈의 손에 오스카가 던진 마나구가 쏙 들어왔다.
“…….”
루빈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오스카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루든, 뭔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루빈은 어깨를 으쓱이며, 받은 마나구를 다시 투명천장 너머로 날렸다. 이 간단한 동작만으로, 몸속 마나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버린 건 덤이었다.
마나구를 받아낸 오스카가 목을 가다듬더니, 에겔러 교수 말투를 흉내 냈다.
“이봐, 룸메이트. 네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지 않나?”
“글쎄, 모르겠는데.”
“잘 들어봐. 내가 기숙사 식당에 갔는데, 마침 우리 반 어떤 여자애가 있더라고. 그런데 걔가…….”
루빈은 오스카의 잡다한 말들을 그저 한쪽 귀로 흘려들었다. 그는 오스카를 지켜보면서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루빈의 머릿속에서는, 오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어지럽게 떠돌고 있었다.
가이젠 교수가 칙명부의 끄나풀이라는 건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미처 파악해 두지 않았던 교수였기에 약간 의외였을 뿐.
정말로 루빈을 놀라게 한 건 칙명부의 목적이었다.
‘칙명부가 페르를 제거하려 한다…. 칙명부가 대체 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듣고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 정도로.
루빈이 알고 있는 미래에서는, 칙명부와 페르는 한 덩어리였다. 둘의 합심으로 모든 암살검가를 멸문시킨 것이다.
그랬으니, 칙명부가 페르 로렌치니를 제거하려 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연막인가?’
심지어 이런 의심까지 피어오를 정도였다. 칙명부와 가이젠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자신을 혼란에 빠트리도록 그런 연극을 펼친 거라고.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그게 가능하려면, 칙명부는 루빈이 회귀자라는 걸 눈치채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루빈이 이 학교에 온 목적이 페르의 제거라는 걸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분명 숨어 있는 페르를 찾아내 제거하라고 했어.’
루빈은 가이젠 교수의 저택 앞에서 반복해서 울렸던 그 목소리를 떠올렸다. 누구인지 정체를 숨긴 데다 변조된 목소리. 그 목소리는 분명 ‘숨어 있는’ 페르를 찾으라고 했다.
이 말인즉, 칙명부는 아직 누가 페르 로렌치니인지 모른다는 뜻.
‘페르의 위장 신분이 오스카 투니오라는 걸 모른다. 그와 동시에, 페르가 자신들의 편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조차도.’
생각해 보면 그럴 수 있었다.
미래를 알고 있는 루빈으로선 페르가 당연히 황제의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중에야 만들어진 구도일 수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절대 성립할 수 없는 관계 말이다.
어쨌거나.
‘어째서 자신을 죽이려 한 황제의 편으로 돌아서게 된 거지?’
만약 지금의 상황이 루빈이 알고 있는 미래로 이어진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칙명부는 페르를 죽이려 했지만, 끝내 실패한다. 그리고 페르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칙명부의 편에 서게 되고, 암살검가 토벌군의 선봉장이 된다.
‘그렇다면.’
루빈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앞으로 어떡하면 좋을까.’
칙명부를 도와 페르를 제거, 미래의 선봉장이 출현하는 일 자체를 없애 버린다?
아니면, 일의 전후 사정을 좀 더 파헤친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페르를 루빈의 편으로 끌어당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루든!”
그때, 오스카가 소리쳐 루빈을 불렀다.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혼자서 실컷 수다를 떨던 그였다. 루빈은 턱을 긁적였다.
“아, 방금 뭐라고 했더라?”
“내 얘기 하나도 안 듣고 있었던 거냐?”
“기숙사 식당에서…까지만 들었어.”
“거긴 이야기 처음 부분이잖아!”
결국 루빈은 오스카의 이야기를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줘야 했다.
이번엔 루빈으로서도 집중해서 들을 필요가 있었다. 칙명부가 오스카를 제거할 계획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오스카를 둘러싼 상황도 최대한 많이 파악해 둬야 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특별한 건 아니네.’
전부 일상적인 얘기에 불과했다.
오스카가 C반의 여자애 한 명과 함께 기숙사 식당에서 식사하며 에겔러 교수를 험담했다는, 쓸데없고 빤한 이야기였다.
“잠깐!”
“…어? 뭐야? 왜그래!”
“방금 뭐라고 했어?”
하지만 이야기 마지막 부분만큼은, 무심한 루빈조차 끌어당겼다.
“훗. 이제 관심 좀 생기냐? 내 친히 다시 말해주지. 내가 내일 수업시간표를 말해주니까, 그 여자애가 활짝 웃으면서 ‘아 진짜? 고마워! 정말 친절하구나?’라고…….”
“아니, 그거 말고.”
“음? 그럼… 활짝 웃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쪽으로 넘길 때, 나랑 3초 동안이나 눈을 맞췄다는 거?”
“그것도 말고. 네가 그 애한테 말해줬다는 내일 시간표 말이야. 조금 전에 나한테는 대충 말했던 그거.”
“지금 이 풋풋한 이야기에서 고작 내일 시간표가 뭔지 궁금했던 거야?”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오전 수업은 시시한 수업인데.”
물론 오스카에게는 시시한 수업이겠지만, 루빈에게는 그렇지 않은 수업이었다.
“뭐냐면, 가이젠 교수의 ‘마법약제조의 첫걸음’이라고. 그 말총머리를 한 젊은 교수 있잖아. 달리아가 D반 담임교수라고 했던 거 같은데… 에릭이 그 반이라고 했고.”
마침 잘됐군.
가이젠 교수를 제대로 마주해 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페르에 대한 열쇠는 놈이 쥐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