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아델리아가 숨을 급히 들이켰다.
‘이 목소리…….’
설마.
아델리아가 놀란 눈을 뜨고 몸을 되돌렸다. 그러자 유리관에서 황금빛 광채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성검이 깨어났다!”
사람들의 탄식과 성검에서 흘러나오는 진동음이 뒤섞여 대강당과 신전을 흔들었다.
아델리아도 입을 벌린 채, 유리관을 깨부수고 있는 성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쿵, 쿵, 쿵! 째앵—!
견고한 결계로 보호받고 있던 유리관이 종이처럼 너무도 간단히 깨져 버렸다.
“설마……. 저거 성검이야?”
데릭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유리관을 깨고 공중으로 높이 치솟은 성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게. 나도 누군가한테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야, 오빠.’
물론, 성검이나 오러의 힘이 있었다면……. 하고 바랐던 적은 있다.
테오스와 데릭을 지키기 위해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아무래도 일곱 살짜리의 몸으로 한계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식은 아니었어.’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성검의 주인으로서 세상에 공표되던 그 날을.
‘이럴 거면 이전 삶과 다를 게 뭐가 있어!’
저 녀석이 다른 사고를 치기 전에 달아나야 한다.
‘도망을…….’
[누님 맞죠?! 그쵸?!]
재차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델리아는 그대로 굳었다.
[와와! 누님인 줄 알았어! 딱 촉이 왔다니까?! 누님!]
“…….”
[누님? 누님?!]
왜 뒷걸음질 치는 거예요? 어딜 가요? 어? 어어?
누님?
성검이 멀어지는 아델리아를 보며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라, 누님이 아닌가? 아닌데? 맞는데……. 작아지긴 했지만 오러는 분명 누님의 오러가 확실한데……?]
리그하르트가 아델리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뭐……? 오러?
‘지금 내게서 오러를 느꼈다고?’
상황을 헤아리기도 전에 허공에 떠 있던 성검이 폭발하듯 광채를 터트렸다.
[누님! 제가 갑니다아아! 받아 주세요!]
‘뭐?!’
리그하르트의 외침에 아델리아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순간, 자신을 향해 방향을 틀어 빠르게 날아오는 성검이 시야로 들어왔다.
‘안 돼!’
[에?]
아델리아의 반응에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속도가 붙어 버린 리그하르트는 멈출 수 없었다.
쐐애애애애액—! 성검의 검날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으아아악!]
‘야이! 멍청아! 소리치고 싶은 건 나라고!’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한 아델리아가 어떻게든 리그하르트를 잡아내겠다는 일념으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때.
“아델!”
동시에 데릭이 아델리아를 향해 몸을 날렸다.
까앙—!
순간, 허공에서 빛이 번쩍했다. 무섭게 날아들던 성검이 무언가와 부딪히며 아델리아에게 닿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허공에서 날아온 거대한 망토가 아델리아의 몸 위로 떨어졌다.
‘억!’
그 엄청난 무게에 짓눌리듯 감춰진 아델리아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러자 누군가가 아델리아를 단단히 부축했다.
“괜찮아, 아델.”
온통 까매진 시야 너머로 데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중으로 솟구친 성검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성검은 높이 떠올랐던 만큼 신전의 대리석 바닥에서 몇 번이고 튀어 오르며 구석으로 미끄러졌다.
뎅그렁, 까앙, 깡, 깡깡, 꺼엉, 데구르르르르—
성검이 구르는 것을 멈추자, 전쟁통처럼 소란스럽던 대강당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
“…….”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아델리아가 조심스레 천을 끌어당겨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자신을 감싸 안고 있는 데릭과 눈이 마주쳤다.
“오ㅃ…….”
아델리아가 입을 뻥긋거리자, 데릭이 말했다.
“쉿.”
데릭은 아델리아에게 소리 내지 말라는 신호를 주었다.
아델리아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데릭은 걱정 말라는 시선을 보낸 뒤, 다시 망토를 아델리아의 머리 위로 덮어 주었다.
‘남청색 망토…….’
데릭의 등에 붉은 망토가 걸려 있는 걸 보니 데릭의 것은 아니었다. 아델리아는 망토 속에 몸을 숨긴 채 망토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아빠가 아침에 걸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이걸 지금 내가 왜 뒤집어쓰고 있는 거지?
그때, 아델리아의 등 뒤에서 낮고 무거운 음성이 들렸다.
“신전이 지금, ……에스테르 공작가를 공격했다 여겨도 되겠습니까.”
정중한 어투였으나,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아델리아가 놀란 눈을 떴다. 이 목소리는 분명…….
‘아, 빠?!’
콰앙—!
테오스가 자신의 검을 바닥 위로 내리찍었다.
그러자 쩌어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신전 바닥이 거친 줄기를 그리며 갈라졌다.
신관들은 수직으로 바닥에 꽂힌 테오스의 검과 자비 없이 찢어진 대리석 바닥을 번갈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검은 마치, 전장 위 세워진 묘비처럼 느껴졌다. 그 묘한 위압감에 그 누구도 쉬이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꼿꼿하게 꽂힌 검의 손잡이 위로 테오스가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의 검이 붉은 오러를 울컥울컥 토해 내기 시작했다.
“신전은 정녕 에스테르 공작가와 척을 지려 하는가!”
분노로 채워진 공작의 음성이 신전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때, 신관 지누엘이 앞으로 다급히 걸어 나왔다. 지누엘 역시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고, 공작 각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것은 단지 저희도 예상치 못하고 있던 일인지라…….”
서늘한 테오스의 시선이 지누엘에게 꽂혔다.
“지누엘 신관.”
“예, 예, 공작 각하…….”
“신전에서 보관 중인 검이 에스테르 공작가의 아이들을 공격했습니다. 이것이 암살 시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테오스의 말에 신관이 펄쩍 튀어 오르며 손을 내저었다.
“암, 아아, 암살 시, 시도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조금 전 그 검은 성검이온데!”
그러니까 그 검이 바로, 거의 600년 만에 깨어나게 된 성검인데……!
그러나 테오스는 지누엘의 말허리를 단호하게 끊었다.
“성검은 검이 아닌가.”
“예……?”
“그 성검에 베이면 다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건…….”
공작의 말대로 성검도 검이다. 성물을 녹여 만든 탓에 오히려 다른 일반적인 검보다 더욱 날카로웠고 검기가 강했다.
성검의 주인이 나타나면 저 성검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되어 전장을 휩쓸었다.
그러한 검이 에스테르 공작가의 아이들에게로 날아들었다. 때맞춰 공작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지누엘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성검이라는 이유 하나로 면죄부를 가질 순 없는 법이지.”
“가, 각하.”
그때, 테오스의 뒤편에서 데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테오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테오스는 망토에 감춰진 아델리아를 바라보다 데릭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테오스는 바닥에 깊숙이 박힌 검을 가볍게 뽑아 검집에 밀어 넣었다.
테오스는 냉기가 채 빠지지 않은 시선으로 모여 있는 신관들을 훑었다.
“오늘 신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에스테르 공작가는 오늘 일을 그냥 넘기지는 않을 테니.”
“각하……!”
지누엘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테오스를 불렀지만, 그는 무심하게 말을 이어 갔다.
“신전이 어찌 대응하는지, ……지켜보겠습니다.”
테오스가 몸을 돌려 데릭에게 말했다.
“가자.”
“예, 아버지.”
데릭은 남청색 망토로 둘둘 싼 아델리아를 안고서 테오스의 뒤를 따라갔다.
“아니, 공, 공작 각하……!”
애처로운 지누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에스테르 공작가 사람들은 그렇게 시야에서 벗어났다.
아아……. 다리에 힘이 풀린 지누엘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지누엘 신관님!”
다른 신관들이 달려와 그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지누엘은 넋 나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대신관께서는 아직인가?”
“예……. 연락이 닿지를 않아서.”
“하아…….”
신관이 이마를 탁, 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구나. 공작께서 대단히 화가 나신 모양이다. 어서 빨리 대신관께서 오셔야 하는데……. 응?”
탄식하며 바닥을 대충 살피던 지누엘이 말끝을 흐렸다.
“왜 그러십니까?”
“그런데…….”
“예.”
“성검은, 어디에 있…….”
“……네?”
지누엘 신관이 바닥 한구석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구석에 처박혀 있던 성검은?!”
“어……?”
다른 신관들도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눈치를 살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릴 뿐.
그러고 보니 공작이 나타난 이후로는 성검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자 곧장, 지누엘이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차, 찾아…….”
“예?”
멍하니 되묻는 신관이 답답했던 것인지, 지누엘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쳤다.
“성검을 찾아라! 성검이 사라졌다! 어서 찾아! 어서!”
신전이 또 한바탕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