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아델리아의 방.
공작저로 도착하는 즉시, 데릭이 의사를 불렀다.
“지금은 안정을 취하시는 게 가장 우선입니다.”
“알았어. 아버지께는 내가 말씀드리도록 할게.”
“예, 도련님.”
공작가의 주치의 레널드와 이야기를 나누며 데릭이 방을 나갔다.
사람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아델리아가 감고 있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잠시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문을 응시했다.
오고 가는 발소리도,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문 너머로 들리던 크고 작은 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됐다.’
그제야 아델리아는 대충 이불을 뻥, 발로 차 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아델리아가 자신의 왼쪽 소매 안으로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세 번 정도 휘적거리더니, 무언가를 붙잡고 끄집어냈다.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펴자, 손바닥 위로 길쭉한 펜던트가 드러났다.
검 모양을 한 펜던트였다.
아델리아의 자그마한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는데, 어린이용 포크보다도 작아서 목걸이에 걸고 다녀도 좋을 만한 크기였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에 반사되어 검날이 맑은 푸른빛으로 반짝거렸다.
“너 진짜!”
아델리아가 펜던트를 보며 어금니를 짓이겼다. 그러자 아무런 미동도 없던 펜던트가 파르르르, 진동했다.
[누, 누니임……!]
으아앙! 역시 누님도 절 기억하시는군요! 펜던트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펜던트처럼 생긴 작은 쇳덩이는 사실, 성검 리그하르트였다.
리그하르트는 검으로써 뛰어난 자질을 가진 무기였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모양이나 크기를 바꾸는 거였다.
조금 전, 신전에서 성검이 깨어났다.
망토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아델리아는 바닥에서 나뒹굴던 리그하르트를 발견했다.
순간, 아델리아는 고민했다.
성검을 피해 달아나느냐, 아니면 취하느냐.
‘방금 날 누님이라고 불렀어.’
오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로 보나, 보자마자 굉장히 반가운 듯 아는 척하는 거로 보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리그하르트는 아델리아를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결단은 빨랐다.
‘데리고 가자.’
성검은 자신의 주인에게로 귀소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리그하르트는 이미 아델리아를 알아본 상태였다.
지금은 테오스에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은 듯 보였지만, 언제 또다시 요란을 떨며 자신에게 날아들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또다시 황제의 도구로 살고 싶지 않아.’
성검의 주인, 제국 영웅의 삶은 외롭고 치열하며 극도로 희생적이었다.
과거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번 삶에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너! 당장 이리 와! 크기 줄이고!’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머릿속으로 소리쳤다.
[……저, 저요?]
‘그래! 너! 여기서 너 말고 누가 또 내 생각을 들을 수 있겠어? 그만 들썩거리고 크기나 줄여!’
[아, 네!]
‘그대로 들키지 않게 조용히 움직여서 이리로 와.’
[네! 누님!]
마침, 대강당은 테오스와 신관의 언쟁으로 분위기가 험악해진 상태였다. 그 누구도 바닥에 나자빠진 성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덕분에 크기를 작게 줄인 채,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성검을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델리아는 자신의 발끝까지 다가온 리그하르트를 재빠르게 낚아채어 소매 안에 숨겼다.
‘얌전히 있어.’
[네!]
아아, 아늑해! 리그하르트는 아델리아에게 붙잡히자마자 안도하듯 탄식했다.
하아……. 아델리아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다시 망토 속으로 머리를 숨겼다.
다행스럽게도 마차를 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들키지 않았다. 물론, 신전은 지금쯤 발칵 뒤집혔겠지만.
아델리아는 회상에서 빠져나와 리그하르트를 바라봤다.
“릭.”
[네!]
“날 기억해?”
[그럼요!]
“뭘, 어디서 어디까지?”
[어……. 제가 누님을 선택했죠! 그리고 누님과 함께 전장에서 엄청난 활약도 했었고요! 크흐—!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그 시선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아, 그리고…….]
신이 나서 떠들어 대던 리그하르트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내가 죽었지.”
[……네에.]
정말, 기억하는구나. 전부…….
순간, 코끝이 시큰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치고 올라와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도 같았다.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오롯이 저 혼자라는 생각이 외로움을 재촉했는지 모른다.
과거의 불행과 역경이 거품처럼 사라진 것 같아서 서러움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주지 못할 그 외로움을, 과거의 고단했던 기억을 나눌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아델리아가 입술을 꾹 다문 채 침묵하자, 리그하르트가 살짝 흔들거렸다.
[누님?]
갑자기 왜 그래요, 무섭게.
아델리아는 코를 한번 훌쩍이며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그런데 너, 아까 신전에서 오러 이야기 뭐야?”
[아!]
리그하르트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탄식을 터트렸다.
-[어라, 누님이 아닌가? 아닌데? 맞는데……. 작아지긴 했지만 오러는 분명 누님의 오러가 확실한데……?]
분명히 리그하르트는 오러라고 했다.
“지금 내게 오러가 없는데 어떻게 오러로 날 알아봤냐고.”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무려 스무 해를 돌아왔다. 은발과 붉은 눈동자가 흔치 않다고는 하지만 대번에 자신을 알아볼 줄은 몰랐다.
[네……? 아니, 그거야……. 누님한테서 오러가 보여서 오러라고 했을 뿐인데, 어떻게 알아봤냐고 하시면 저는 또 그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
언젠가, 성검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자신을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했냐고.
-[누님의 오러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강렬하고 반짝거렸어요! 처음 보는 오러라서 더 궁금하기도 했고요.]
리그하르트는 아델리아의 오러가 특별하다고 했다. 그러니 리그하르트가 아델리아의 오러를 알아보지 못할 이유도, 헷갈릴 이유도 없다.
생각을 정리하던 중, 리그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누님의 오러가 맞습니다! 확실하다고요!]
리그하르트가 억울하다며 울부짖었다.
진짜 오러라고? 지금 내 몸에 오러가 있다고?
‘설마…….’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를 협탁 위로 던져 놓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두 손을 얼굴 높이까지 올린 채 집중했다.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적막하기만 했다.
그때.
스스슷. 모든 문이 단단히 닫힌 침실 안에서 얕은 바람 소리가 일었다.
“……!”
아델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푸르스름한 광채가 반사되어 일렁거렸다.
‘정말, ……오러잖아?!’
***
“아델리아는?”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데릭은 곱게 접은 망토를 테오스에게 내밀었다.
“때마침 아버지께서 와 주셔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
테오스가 말없이 망토를 건네받았다.
남청색의 망토에는 분홍빛이 도는 금색 실로 공작가의 문양이 수 놓여 있었다.
넝쿨이 휘감은 사각 틀 안에 세 개의 별, 그 별 아래로 겹쳐진 검과 방패의 문양이었다.
테오스는 예배당에서 나온 뒤 신전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평소와 달리 신전의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신전 건물이 알 수 없는 진동으로 흔들리기까지 했다.
소란은 대강당에서 일어났다.
-성검이 깨어났다!
대강당 안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에 테오스의 고개가 그곳으로 향했다.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높게 솟구친 성검이 보였다.
‘저게 성검인가 보군.’
그냥 쇳덩이. 테오스의 감상평은 그러했다.
별일이 아니었다. 성검이 깨어나든 말든. 테오스는 그렇게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강당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검이 방향을 바꾸는 게 아닌가.
‘홀로 허공에서 방향까지 바꾸는 검이라.’
저건 조금 신기하군. 쇳덩이 주제에 별걸 다 한다 싶어 시선이 조금 더 붙들렸다.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성검의 검 끝이 향한 곳에서 자신의 딸, 아델리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당황한 탓인지, 아델리아의 몸에서 오러가 희미하게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성검보다 테오스의 걸음이 먼저 움직인 것은.
그는 곧장, 자신의 검을 뽑아 날아들던 성검을 힘껏 쳐 냈다.
까앙—!
성검을 쳐 낸 테오스는 신전 바닥으로 자신의 검을 강하게 박아 넣으며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다.
그 누구도 아델리아의 오러를 보지 못하게. 자신이 무엇을 숨기려 드는지,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자신이 걸치고 있던 망토를 빠르게 풀어 아델리아의 몸 위로 집어 던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남청색의 망토가 넓게 펼쳐지며 자그마한 아델리아를 삼키듯 덮었다. 그러자 아델리아의 푸른 오러는 감쪽같이 가려졌다.
테오스의 망토는 평범한 망토가 아니었다. 신화 속 아라크네의 거미줄로 만든 특수 망토였다.
그 망토는 어지간한 마법과 오러, 또는 신력이나 흑마법 따위를 막아 주고 감춰 주는 기능이 있었다.
덕분에 대강당에 모여 있던 사람 중, 아델리아의 오러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회상에서 빠져나온 테오스는 망토를 대충 옷걸이에 걸어 두고 돌아섰다.
“많이 놀랐을 거다. 깨어나는 대로 먹을 것을 좀 챙겨 주고.”
“예, 아버지.”
“다른 이야기는 아이가 깨어나면 하도록 하지.”
오러나 성검에 관한 이야기를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데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고개를 끄덕이던 데릭이 손바닥에 주먹을 콩, 내리치며 말했다.
“아, 맞다. 아버지,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어디를?”
“아델리아가 깨어나면 먹을 수 있게 푸딩을 좀 사 놓으려고요.”
“…….”
“데미오르트 3번가에 푸딩 가게가 있거든요.”
거기 푸딩을 아델리아가 좋아한다며, 데릭이 천연덕스레 미소 지었다. 그러자 테오스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런 건 다른 사람 시키고 넌 아델리아 곁을 지키도록 해라. 깨어났을 때 너를 찾을지도 모르니까.”
공작가에 고용인이 몇인데, 공작가의 후계자가 그런 일까지 직접 해야겠냐며. 테오스는 데릭을 꾸짖듯이 말했다.
“아……,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아버지.”
데릭이 테오스에게 인사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데릭의 걸음이 멀어지자, 테오스는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망토를 다시 내려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집무실 한편에서 대기 중이던 집사 일렌드에게 말했다.
“일렌드.”
“예, 각하.”
“말을 준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