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점심 시간대가 조금 지날 무렵.
아델리아 일행이 탄 마차가 보육원 앞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껑충 뛰어내린 아델리아가 예상보다 큰 규모의 보육원을 보며 놀란 눈을 떴다.
‘소문이 안 좋은 보육원이 많아서 걱정했더니, 여긴 괜찮을 거 같아.’
전하께서 후원하는 곳이라 그런가?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흥,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이들 표정을 봐야죠! 겉과 속이 다른 곳일 수 있으니까요!]
‘응, 맞는 말이야. 아이들 표정은 숨길 수 없으니까.’
2층짜리 보육원 건물은 밝은 회색 벽돌로 쌓아 올려 전체적으로 따스한 분위기가 흘렀다.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 잡은 통창문 덕분에 답답해 보이지도 않았고 건물 앞으로는 널찍한 운동장이, 담장 아래로는 아담한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에 아델리아는 일단 안도했다.
카를리나 역시 마차에서 내리며 보육원 건물 크기에 놀랐다.
“크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우선 들어가요, 우리.”
“네.”
두 사람이 보육원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원장으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나타났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레나인 자작가의 니시아 드레나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차분한 분위기의 자작 부인이 아델리아와 카를리나를 향해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에스테르 공작가와 로즈힐 후작가에서 아이들을 후원해 주시겠다 연락해 주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답니다.”
자작 부인은 아델리아와 카를리나를 응접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귀족 가문들도 많이 후원하지 않나요?”
“다른 보육원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희 보육원은 단 한 가문만이 후원하고 있었어요.”
“한 가문만요?”
“예, 그렇습니다. 사실, 이런 변두리 영지의 보육원에는 관심들이 없거든요. 후원을 해 봤자 크게 티가 나지도 않으니까요.”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이 보육원을 후원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귀족 가문들은 보여 주기식의 후원을 즐겼다.
자신들의 높은 신분과 많은 재력을 이런 식으로 과시하는 것이 유행했던 탓이었다.
“후원을 위해 두 분 공녀께서 직접 찾아 주시니 아이들은 더욱 윤택한…….”
응접실 문을 열고 먼저 들어서던 자작 부인이 불현듯 말을 멈췄다.
응접실에 먼저 온 손님이 있었던 까닭이다.
“어?”
아델리아와 카를리나 역시 놀란 얼굴을 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은 카르세스였다. 이 상황을 카르세스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지, 카르세스가 소파에서 일어서며 아델리아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리센드로 백작님!”
그때, 자작 부인이 카르세스를 향해 뛰어갔다.
엥? 리, 리센 뭐?
아델리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자작 부인과 카르세스를 번갈아 보았다.
카르세스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대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자작 부인.”
“예, 그동안 왜 이리 뜸하셨습니까?”
“일이 그리되었습니다.”
그러더니 문 앞에 서 있는 아델리아와 카를리나를 쳐다보았다.
“에스테르 영애도 오랜만이군요.”
로즈힐 영애도. 하며 카르세스는 아델리아와 카를리나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안녕하셨어요? 리센……, 드로 백작님.”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델리아가 눈치껏 호칭을 바꾸어 부르자 카를리나도 아델리아를 따라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자작 부인이 물었다.
“다들 아는 사이셨나요?”
카르세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친우거든요.”
옅게 미소 짓는 카르세스를 보며 아델리아는 가슴 앞으로 주먹을 말아 올렸다.
‘또, 친우…… 라고 하셨어.’
아델리아가 내심 감격하자, 리그하르트가 콧방귀를 꼈다.
[상황에 따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는 사람이잖아요. 전에 누렁이 앞에서 누님더러 친우라고 했던 거 잊으셨어요?!]
그러나 아델리아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친우…….’
세상에. 이쯤 되면 정말 전하께서 마음의 빗장을 여신 게 아닐까?!
[아니라니까요…….]
아델리아가 일렁이는 눈동자를 하고 자작 부인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카르세스를 바라보았다.
카르세스는 가슴에서 검은 봉투를 꺼내어 자작 부인에게 건넸다.
“올해 후원금입니다. 작년보다 아이들이 많이 늘었으니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그때 다시 연락을 주십시오.”
자작 부인이 봉투를 건네받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예, 백작님. 아이들을 위해 쓰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그럼,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염려 놓으셔요, 백작님.”
“예, 부인만 믿고 갑니다.”
카르세스가 다정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던 아델리아는 잠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카르세스가 아델리아의 옆을 지나치며 작게 소곤거렸다.
“마차에서 기다리지. 이야기 좀 해.”
“…….”
카르세스는 곧장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잠시 돌아보다, 자작 부인의 목소리에 다시 몸을 돌렸다.
“갑자기 정신이 없었네요. 이리로 앉으세요, 공녀님.”
“네.”
아델리아와 카를리나는 자작 부인과 마주 앉았다.
카르세스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카르세스가 신분을 숨기고 있는 만큼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조금 이따가 여쭤보면 되겠지.’
아델리아는 우선 후원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었다.
사실, 후원은 핑계였다. 바라크를 만나러 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여기 서류에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아델리아와 카를리나는 각각 자작 부인이 내민 서류에 서명했다.
서명을 마친 아델리아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찾는 아이가 있는데, 만나 볼 수 있을까요?”
그러자 자작 부인이 싱긋 웃었다.
“당연하지요. 누굴 찾으시나요?”
“바라크.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아이예요.”
“아아, 바라크요. 알지요. 으음……. 그런데.”
자작 부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실례지만, 어떠한 연유로 그 아이를 찾으시는지…….”
“친구예요.”
그러자 자작 부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친구라고요?”
“네.”
아델리아가 눈매를 접으며 싱긋 미소 지었다.
자작 부인은 조금 혼란스러워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이를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자작 부인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친구라니요?”
귀족 영애의 친구가 보육원에? 카를리나 역시 자작 부인과 마찬가지로 놀란 듯 보였다.
“카를리나도 잘 봐 둬요. 이 친구가 나는 물론, 카를리나의 광산 사업에도 큰 도움을 줄 테니까.”
잠시 후, 응접실 문이 열리고 자작 부인과 바라크가 들어왔다.
바라크는 아델리아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건조하던 황금빛 눈동자에 순간, 생기가 돌았다.
바라크와 잠깐 눈이 마주친 아델리아는 자작 부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드레나인 부인. 아이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공녀님.”
편히 이야기를 나누라며 자작 부인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아델리아가 그제야 바라크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야, 바라크.”
그러자 바라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아델리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너. 그때, 그 투기…….”
바라크가 문득 말을 멈추고 아델리아의 옆에 앉아 있는 카를리나를 쳐다보았다.
투기장 이야기를 해도 될지 가늠하는 듯했다.
‘눈치가 아예 없는 아이는 아니네.’
아델리아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우리 편이야.”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카를리나는 조심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환경이 그리 만든 것인지. 바라크라는 소년은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에, 무엇보다 시선을 잡아끄는 붉은 머리카락.
‘저 아이가 광산 사업에 도움이 된다고……?’
카를리나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크를 바라보았다.
바라크는 심드렁한 얼굴로 카를리나를 쳐다보다가, 금세 아델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방금 내 이름을 불렀지.”
“맞아.”
“어떻게 알고?”
“우리 가문이 제법 능력이 좋아.”
“뒷조사……, 그런 건가?”
“비슷해.”
뒷조사는 아니지만, 바라크가 꼬치꼬치 캐물을 기세여서 아델리아는 대충 비슷하다고 얼버무렸다.
“그런데 넌 날 어떻게 알아본 거야? 그날은 후드를 쓰고 있어서 내 얼굴을 못 봤을 텐데.”
“눈동자.”
아……. 아델리아가 짧게 탄식했다. 찰나였지만, 짧게나마 바라크와 눈이 마주친 것은 사실이었다.
‘눈썰미가 좋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바라크는 관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움직이던 아델리아를 봤다고도 했었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라크가 물었다.
“역시, 넌 날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투기장 감옥에서 날 꺼내 주러 왔던 거지? 그렇지? 그러면서 왜 아닌 척 돌아간 거야? 내가 필요했던 거 맞지?”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많았던 건지, 바라크는 한꺼번에 많은 궁금증을 쏟아냈다.
투기장 감옥? 카를리나가 화들짝 놀라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대체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