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그런 카를리나의 시선에 아델리아가 하하,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델리아가 대답했다.
“숨넘어가겠다. 하나만 물어봐. 전부 대답해 줄 순 없어. 너에게 너만의 사정이 있듯이, 내게도 나만의 사정이 있으니까.”
하나만……? 바라크가 고심하느라 눈동자를 굴렸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바라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아델리아를 곧게 바라보았다.
“네가 투기장의 지하 감옥을 습격한 거, 날 구하려고 그런 거였어?”
“…….”
단 한 가지 질문만 하랬더니 핵심을 찔렸다.
‘요망한 놈.’
아델리아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널 구하려고 그런 거였어.”
그러자 바라크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그거면 돼.”
작게 중얼거리던 아이의 입가로 아주 희미한 미소가 고였다가 사라졌다.
그때, 아델리아가 물었다.
“강해졌어?”
강해지면 다시 만날 수 있다던 말, 기억하지?
아델리아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자, 바라크가 뚱하게 대답했다.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강해졌냐고 묻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하하. 아델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미안해. 사실 급한 일이 생겨서 좀 일찍 찾아왔어. 네 도움이 필요해.”
“……무슨 일인데?”
“여기, 카를리나가 광산 사업을 하고 있어. 나도 광산에 흥미가 생겼고.”
“…….”
“리티카야 부족이 광산 일에 능숙하다는 걸 알고 있어.”
리티카야 부족 사람들은 오랜 세월 바위산을 파고 들어가 생활했다. 그랬기 때문에 산의 특성과 지형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델리아의 말에 바라크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반짝거리던 황금색 눈동자에도 그늘이 졌다.
그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다 죽었어…….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만, 모두 그날 이후로 꼭꼭 숨어 나타나지 않아.”
바라크는 보육원에 들어온 뒤로 살아남은 부족 사람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찾으러 다녔다고? 어떻게?”
“날 여기 데려다준 사내가 도와줬다.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
“아.”
카르세스였다. 보육원에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끝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형편까지 보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전하셔.’
[크흠.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원래 그러셨어. 황제가 되셨다면 성군이 되셨을 거야.’
그러니까 이번에는 황제가 되시는 걸 꼭 봐야겠어.
아델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바라크가 말했다.
“날 데려가.”
“응?”
“광산 일할 때 항상 옆에서 보고 들었어. 어지간한 광부들보다 내가 더 쓸모 있을 거야.”
그러나 아델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널 데리고 갈 순 없어.”
“왜? 너도 우리 부족을 야만족이라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 바라크.”
“아니면, 내 붉은 머리카락이 불길해서?”
“아니, 불길하다니? 네 머리카락은 아름답고 강해 보이는 색이라고, 내가 전에도…….”
아, 이건 이전 삶에서 했던 말이었지. 크흠. 아델리아가 목을 가다듬고서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바라크, 잘 들어. 네 머리카락은 아름답고 강해 보이는 색이야. 불길한 색이 아니라고.”
“…….”
“그리고 난 리티카야 부족 사람들을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해.”
“지혜로워?”
“그래.”
사실,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방법은 공작저로 데려가는 거였다.
입 하나 더한다고 해서 흔들릴 공작가도 아니었으니, 곁에 두고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가문과 넌 맞지 않아. 네 성장을 방해할 거야.”
그러자 바라크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마음이 지끈거렸지만 어쩔 수 없다. 아델리아는 과거처럼, 바라크가 길드와 용병단을 이끄는 수장이 되길 바랐다.
“검술 말고……. 단체를 관리하고 운용하는 걸 배워야 하는데…….”
아델리아가 작게 중얼거리자,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카를리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데리고 갈까요?”
아델리아가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카를리나가요?!”
“네, 저희 가문이 검술보다 경영 쪽으로 우수한 편이니까요.”
“맞아! 그랬죠!”
로즈힐 후작 가문은 어린 시절부터 경영학을 가르친다고 들었다.
여자아이로 태어나 가문을 이어받을 수 없을지라도, 수업은 동등하게 이루어졌다고 했다.
“덕분에 제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수 있었죠.”
카를리나가 쑥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역시, 로즈힐 가문의 후계자다워요! 똑똑해, 정말!”
“아니, 뭐, 그, 그렇게까지…….”
아델리아가 바라크를 쳐다보았다.
“로즈힐 후작가로 가서 배우지 않을래?”
그러자 바라크가 카를리나를 한번 쳐다본 뒤 대답했다.
“거기에 가면, 자주 만날 수 있어?”
“누구를? 아, 나 말이야?”
바라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리아가 대답했다.
“물론이지. 광산 일은 카를리나와 네 도움이 필요하거든. 보육원보다 로즈힐 후작가에서 지내는 게 훨씬 나을 거야. 제대로 배워 둬. 너한테 꼭 필요한 거니까.”
알겠지? 라고 묻는 말에 바라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바라크를 로즈힐 가문으로 데려가는 일도 절차가 필요했다.
자작 부인과 상의 끝에 이틀 뒤, 정식 절차를 거쳐 바라크를 로즈힐 가문에서 데려가기로 이야기를 끝냈다.
보육원에서 나오니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너무 늦었는데 기다리고 계시려나.’
[갔겠죠. 설마 아직까지…….]
리그하르트의 뒷말이 흐려졌다. 로즈힐 후작가의 마차 뒤로 문양이 없는 마차 하나가 서 있었던 탓이다.
[있네요.]
리그하르트가 지독하다며 혀를 찼다.
‘헤헤.’
아델리아는 푸히히, 웃음을 흘리며 카를리나에게 말했다.
“카를리나, 먼저 돌아가요.”
“네?”
마차로 향하던 카를리나가 놀라 걸음을 멈췄다.
“아델리아는요? 마차도 없잖아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턱 끝으로 로즈힐 후작가의 마차 뒤를 가리켰다.
“있어요.”
그 마차를 잠시 살피던 카를리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문양도 없는걸요?”
“황태자 전하예요.”
“네에?!”
카를리나는 조금 전, 보육원에서 마주쳤던 황태자를 떠올렸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대체 두 분. 무슨 사이예요?”
“무슨 사이긴요. 황태자랑 공녀 사이지.”
“……뭐, 약혼 이야기가 오고 간다거나.”
“예엑?!”
순간, 아델리아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마치, 썩은 음식물 냄새를 맡은 사람처럼.
“으으.”
“아, 아니면 말고요.”
카를리나가 그 표정에서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얼른 사과했다.
“어휴, 황태자 전하를 상대로 그런 말은 농담으로도 하지 말아요. 나 같은 애가 어울리기나 해요?”
그분 곁에는 조신하고 청순하며 얌전하고 순진무구한 분이 계셔야 한다고.
‘……나랑 반대로 말이지.’
[누니임…….]
큼! 목을 가다듬은 아델리아가 카를리나의 몸을 돌려세우며 마차를 향해 등을 떠밀었다.
“자자, 어서 돌아가세요. 영애께는 어두운 밤거리가 위험하다고요.”
“아델리아! 당신도 영애라고요!”
“난 조금 다르거든요?”
아델리아! 카를리나가 아델리아의 이름을 애절하게 불렀다.
그러나 결국, 아델리아의 힘을 어찌하지 못하고 마차 안까지 밀려 들어갔다.
쿵— 마차 문을 닫은 아델리아가 마부에게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급히 창문을 연 카를리나가 아델리아를 향해 외쳤다.
“아델리아!”
“다시 연락할게요!”
“아, 아델!”
“급하니까 애칭도 다 불러 주고.”
아델리아가 싱긋 미소 지으며 손을 높이 들어 붕붕 휘저었다.
“조심해서 가요!”
아델리아는 카를리나의 마차가 작은 점처럼 보일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빙그르르 몸을 돌려 자신을 기다리던 남청색 마차를 향해 갔다.
똑똑— 아델리아가 마차 문을 작게 두드리자, 마차 문이 열렸다.
“헤헤. 오래 기다리셨죠?”
아델리아가 마차 안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손을 내밀었다.
“들어와.”
“넵!”
카르세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른 아델리아가 흐트러진 드레스를 손보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쿵쿵— 카르세스가 마차 문을 두 번 두드리자, 마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잘 지내셨어요? 안 그래도 연락이 없으셔서 걱정하고 있었어요.”
아델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에 카르세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곧 서신을 보낼 참이었어. 그러기도 전에 이곳에서 만나 버렸지만.”
아, 그랬구나. 아델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리다 창밖을 슬쩍 흘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공작저.”
“저희 집이요?”
“응.”
“저 데려다주시려고 기다린 건 아니실 테고…….”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의 표정을 흘깃거렸다. 그는 평소처럼 무표정이었다.
“전하?”
아델리아가 다시 그를 불렀지만, 침묵은 조금 더 이어졌다.
덜컹, 덜컹. 마차가 굴러가는 소리만이 정적 사이를 채웠다.
그의 무감한 시선이 느른하게 움직여 창문 밖을 향했다. 아델리아는 그의 훌륭한 옆모습을 시선으로 그리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드디어 카르세스가 입을 열었다.
“바라크와는 어떤 사이지?”
“……네?”
아델리아가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