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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14화 (14/180)

14화

―용사파티의 짐꾼 칼 데미안, 아니 소천마 천악천은 특유의 공허한 눈동자로 앞을 바라봤다.

산양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뿔. 허나 그것을 제외하고는 ‘인간’이라고 부르는 종족과 다른 점은 딱히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뽑자면, 탁월한 신체능력 정도.

뿔이 달린 사내는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숨을 헐떡이며 검을 바로 잡았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자신보다도, 이미 전투불능이 된 부하들을 챙기기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미련했다. 그로 인해 취할 수 있는 선택 범위는 좁아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전투의 양상은 더더욱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왕(魔王), 데아몬.

그것이 사내의 이름이었다. 단신으로 용사파티에 총 공세를 버틸 만큼 훌륭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애초에 마왕을 전면전에서 이길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던 용사 일행은 그를 상대하기보다는 서서히 그의 숨통을 조이기로 결심했다.

그가 부하들을 끔찍하게 아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마교의 주인이 될 천악천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간사한 계획이었다.

이쯤 되면 누가 마왕이고, 누가 용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독을 풀고, 납치를 해 고문을 하며, 마왕성의 비밀통로로 들어가 손쉽게 간부들을 제압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왕 데아몬이 들이닥쳤지만, 부상이 심한 부하들로 인해 제 실력을 낼 수가 없었다.

극심한 충성심을 지닌 마왕의 부하들은 자신들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에게 간청했다.

우리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제발 본인의 무위를 드러내시라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 받쳐도 아깝지 않다고.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아몬은.

“내 어찌 너희들을 버릴 수 있겠느냐. 너희들의 땀과 노력으로 쌓아올린 국가다. 그리고 그 국가의 수장이 된 나이고. 신하를 버린 주군에게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직하고, 미련하다. 허나 천악천은 그 점이 싫지가 않았다.

'마음에 들었다.‘

이 세계에서 본 그 어떤 인간보다도 가장 무인(武人)에 가까운 이였다.

‘그 미련함이 너를 살릴 것이다.’

용사 라스의 전신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여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만 사용할 수 있는 신성기(神聖技)였다.

“이제 끝이다. 빌어먹을 마왕 놈아. 용사 라스님께서 네놈을 죽이고, 악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겠다.”

마왕, 데아몬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너희 인간들은 언제나 우리를 ‘악’으로 취급하지만 정작 너희들이 그 누구보다 ‘악’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죽을 때가 되니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내 말이 틀린가? 마족의 기나긴 역사에서도 우리가 너희 인간들의 영역을 먼저 침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우리의 땅을 침략하는 것은 너희 인간들이었지! 제멋대로 우리를 악으로 규정하며, 인류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우리 동족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던 것들이 바로 네놈들이지 않은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그러나 용사는 어떠한 동요도 없이 감정 없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겠느냐? 네놈이 마족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해라. 마족은 인류의 적이다. 그러므로 악이다. 그것이 세상의 법칙이고, 여신의 뜻이다.”

성녀 리아와 마도사 린 메이지가 거들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간악한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 없습니다. 용사님.”

“그래. 살기 위해 꾸며낸 번지르르한 말에 우리가 눈 하나 깜빡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꼴에 마왕인 주제에 호소하는 꼬라지를 보니 같잖네.”

기사단장인 테레사만이 묵묵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데아몬은 체념한 듯 검을 쥐었다.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의 생명을 태워낼 생각이었다.

“…반드시 되돌아올 것이다.”

황금색 물결이 요동치는 용사의 검이 데아몬의 심장을 향해 나아가려는 순간.

“멈춰라.”

서슬 퍼런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이목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향했다.

용사 라스는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하자 실소를 터트렸다.

“뭐? 멈춰라? 하…. 이제는 하다하다 별 병신 새끼가 다 끼어드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용사 파티의 짐꾼 칼 데미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눈앞에 라스를 본체만체 하며 마왕 데아몬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게 일렁거렸다.

“마왕, 데아몬.”

더 이상은 용사 파티의 짐꾼 칼 데미안의 음성이 아니었다.

“너 이 새끼 진짜 미쳤냐? 네가 진짜 죽고 싶은….”

“그대는 살고 싶은가?”

그것은 만마(萬魔)의 종주이며 천하(天下)를 일통(一統)한 천마의 유일제자(唯一弟子), 소천마(小天魔) 천악천(天惡天)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까지 불같이 화를 내고 있던 용사 라스마저도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감히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의 공포가 파도처럼 그를 덮친 것이다.

천악천이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마족의 왕이여. 그대는 살고 싶은가?”

실로 오만하고 여유가 넘치는, 허나 그 이상으로 품격이 넘치는 미소.

그것을 본 마왕 데아몬의 전신에 전율이 흘렀다.

마치, 그들이 모시는 마신 [오르바스]를 마주했을 때처럼.

“나는, 나는….”

데아몬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살고 싶소! 격하게 살고 싶소! 이대로 죽고 싶지 않소!”

절규의 가까운 외침.

뒤늦게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용사 일행이 다급히 전투태세를 갖췄다.

“린! 저 새끼 먼저 족쳐!”

“명령 하지 마! 네가 말 안 해도 그럴 거니까! 타오르는 염화의 빛을 바라오니….”

판단은 나쁘지 않았으나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다.

천악천의 전신에 아지랑이와도 같은 무언가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 우레와 같은 노호성이 터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커다란지 영창을 외우고 있던 린 메이지마저 집중력이 흐트러져 두 귀를 막았다.

“좋다! 나 소천마 천악천의 이름으로 이곳은 지금부터 대 천마신교(天魔新敎)의 영역임을 선포하겠다.”

동시에 그가 지면을 향해 발을 내리찍었다.

쾅-!

“모두 꿇어라.”

천악천이 내딛은 땅에 균열이 일어나며 용사 일행의 몸이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지 못한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이 전신을 짓눌렀다.

안간힘을 다해 저항했으나 그들 사이에 힘의 격차는 코끼리와 개미의 차이만큼 커다랬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간신히 숨을 헐떡이는 용사 일행.

오직 천악천만이 꼿꼿이 선 채 그들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보름날 밤, 붉게 물든 만월(滿月).

천마(天魔)의 재림(再臨).

뒤틀린 세계의 시발점이었다.

* * *

거울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잠깐 눈을 뜨고, 감았을 뿐인데 나를 향해 말을 걸던 거울은 사라져있었다.

마치 애초에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꿈이라도 꾼 것 같은 몽롱한 기분이었다.

어떠한 방식으로 도플갱어를 선정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듀라한에 이어서 도플갱어라니…. 금제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난이도가 비정상적이란 말이지. 파티의 수준을 감안해도 이건 말이 안 된다. 마치 얼마나 버틸 수 있는 지 의도적으로 시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일에 싸인 지그하르트 가문의 핏줄.

심지어 7명의 초월자들 중 한 명인 이사장, 아슈타르가 나서서 직접 변호하였으니 시험관들의 입장에서는 내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할 만도 했다.

허나 당연하게도 난 그들의 장난에 어울려 줄 마음이 없었다.

적당히. 딱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적정 수준까지만 보여줄 것이다.

나는 거울이 있던 장소를 빠져 나와 앞으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도착한 일행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일 먼저 나를 발견한 이든이 보기 드문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조장.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곧장 온 겁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이든이 바닥을 가리켰다.

“이것 좀 보십쇼.”

[거울의 숲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부터 이 숲의 규칙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중에 한 명 도플갱어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해가 지기 전까지 도플갱어를 찾아내 죽이지 못할 시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전부 사망합니다. 또한, 제한시간 내에 도플갱어를 처치하지 못하거나 혹은 도플갱어가 아닌 이를 죽일 시에도 모두 사망하게 됩니다.

1. 도플갱어는 자신이 복제한 인물과 동일한 경험, 기억을 복제합니다.

2. 도플갱어는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

3. 도플갱어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4. 도플갱어는 ‘인식’에서 자라납니다.

5. 이 숲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들 사이에 섞여있는 ‘도플갱어’를 찾아 죽이는 것 뿐 입니다.

이상, 건투를 빕니다.]

거울의 숲이 도플갱어를 테마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 처음 알았다.

“저희들 중에 도플갱어가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참 난감하군요. 이 중에 도플갱어가 있다니….”

프레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이번 시련에 대해 꽤 절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자일 공께서도 보셨겠지만, 도플갱어는 원본의 경험과 기억까지 복제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즉, 원형이 되는 인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인데 저희가 도플갱어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찾아봐야지요. 다행히도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머리를 맞대보도록 하죠.”

그때, 살럿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도플갱어 아니야?”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졌다.

“저한테 하는 겁니까?”

“그래. 당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처음에는 나에 대한 앙금으로 인해 무작정 지목한 건가 싶었으나 지금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상당히 진중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나랑 평민은 같은 방향으로 들어갔어. 거기에 거울이 하나 놓여있긴 했지만 딱히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그러니 우리 둘은 서로가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어. 뭔가 이상이 있었다면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렇지 평민?”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이든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예, 뭐 그렇긴 합니다만….”

샬럿이 더욱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일단 나랑 평민은 용의선상에서 제외한다고 치면 남은 건 당신과 프레이 뿐 이야. 근데 그거 알아? 프레이는 나랑 평민보다도 먼저 이곳에 와있었어. 그치 프레이?”

프레이는 커다란 눈동자로 나와 샬럿을 번갈아보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만큼 일찍 왔으니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겠지. 나랑 평민도 비슷한 시간에 왔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우리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늦었어.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 나는 당연히 당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어.”

궤변이다. 아니, 궤변 투성이다. 그녀의 논리에는 허점이 너무 많다.

“단지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도플갱어로 몰아가시는 겁니까? 그러한 사고방식이라면 이 중에서 가장 먼저 온 프레이가 도플갱어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저, 저는 아닙니다!”

그때, 무엇인가를 골똘히 고민하던 이든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장. 그렇다면 왜 늦은 것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명백히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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