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푸르릉!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검은색 말이 움직일 때마다 모습이 흐릿해졌다.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상처조차 입힐 수 없는 유령마(幽靈馬)의 대표적인 특징이었다.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 윤기가 흐르는 은색 머리칼. 눈알을 가득 채운 검은 동공, 그리고 찢어진 입.
내 앞에 멈춰 선 기사, 정확히는 손에 쥐고 있던 머리가 입을 움직였다.
“D'admhaigh mé tú, ach níor mhionnaigh mé go foirmiúil fós.”
아스모데우스가 없었기에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새삼 그녀의 빈자리가 커다랗게 느껴졌다.
단순 무력을 제외하고도, 번역 기능까지 갖춘 다재다능한 그녀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절대 그녀를 편리한 번역기 따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
“Ní iarrfaidh mé ach bhfabhar amháin ort.”
다행히 적의를 내비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기껏 소환하였는데 적으로 돌변하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소환에 응해준 덕분인지 그녀의 의지만큼은 내게 똑바로 전달되고 있었다.
그때.
피칠갑을 한 이든이 악에 받힌 목소리로 소리쳤다. 꽤 깊게 베인 것인지 그의 옆구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조장!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저 마물은 분명 저희가 만났던 듀라한이잖습니까! 설마… 조장이 저 마물을 불러낸 겁니까? 조장이 말한 방법이 고작 듀라한 따위를 소환하는 거였다고요?”
“그래.”
“젠장! 내가 미쳤다고 당신을 믿었지! 듀라한이 제 아무리 환상종이라지만 이블을 상대로 통할 것 같습니까? 이제 갓 각성에 접어든 것도 아니고 무려 날개까지 돋아난 놈입니다! 이대로면 시험이고 뭐고, 모두 전멸이라고요!”
여전히 짜증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블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각성 중이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 괴물을 상대로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이든의 상태는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이 자리에서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철두철미하게 숨겨왔던 이든이었다.
그런 이든이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무작정 내 부탁을 들어주고 있을 리가 없다. 분명 자기 목숨 하나는 부지할 만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내가 패를 숨기고 있듯이, 그 또한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의 패를 숨기고 있을 터.
지금 보여준 무위 또한 이미 신입생의 수준은 훌쩍 넘었지만, 그마저도 전력이 아닐 게 분명하다.
분명 내가 모르….
“커헉!”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허공에 뜬 이든이 날아가 바닥에 쳐 박혔다.
어찌나 세게 날아갔는지 땅에 떨어지고 난 뒤에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바닥을 굴렀다.
다행히 목숨은 붙어있는 것 같았으나 왼쪽 발목이 완전히 돌아가고, 오른팔은 축 처진 채 힘없이 덜렁거렸다.
“…….”
그와 눈이 마주쳤다.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 힘조차 없어 보였다.
‘음…. 어…. 그…. 내가 미안하다….’
앞서 생각했던 것들이 순전히 내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지만 자잘한 것들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집착 광공 그녀가 다시금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유독 나를 노리고 있던 것 같았다. 이성이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원한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는이도?교 돼?어죽야 나쁜?건 가내 아라니 이?도?교야.”
후웅!
그녀의 날개가 펄럭였다. 까마귀가 떠오르는 검은 날개였지만 그보다 몇 배는 커다랬다. 날 바라보던 그녀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관용적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 귀에 걸렸다는 말이었다. 뒤이어 그녀의 입에서 엄청난 속도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네?가 잘못했잖아. 죽어. 네가 나쁜 거잖아. 죽어. 네?가 잘못했잖아. 죽어. 네가 나쁜 거잖아.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나쁜 거잖아.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나쁜 거잖아. 죽어. 네가 잘못했잖아. 죽어. 네가 나쁜 거잖아.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나?쁜 거잖아. 죽어. 네가 나쁜 죽어. 거잖아. 죽?어. 네가 잘못했잖아. 네 죽어. 가 나쁜 거잖아. 네가 잘못 죽어. 했잖아. 네가 나쁜 거잖아.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나쁜 거잖아.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나쁜 거잖아.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나쁜 거잖아.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나쁜 거잖아. 네가 잘못했잖아. 네가 나쁜 거잖아.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전신에 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 돋는 광경이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방금까지만 해도 내 앞에 있던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
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흉흉한 예기를 띤 흑색 검날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Chun annihilate naimhde a sheasann ar an mbealach. Cloífidh mé le d’orduithe.”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달았다.
그 짧은 순간, 내 가슴팍을 노리고 다가온 이블의 검-검이라 부르고 갈빗대라 읽는다-을 듀라한이 튕겨낸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이.
‘역시 그때는 최소한의 힘만 사용한 거였나. 일시적인 계약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걸 보면……. 내 예상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지금 내 신체에는 다중 술식(術式)으로 이루어진 복합강화마법이 중첩되어 있는 상태. 순수한 신체능력만을 따지자면 5성급 기사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응은커녕 눈으로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지친 상태라는 것을 감안해도 ‘이블’이라는 존재가 지닌 힘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다시금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듀라한이 내 예상보다 더 강력한 건 희소식이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진명(眞命)도 밝히지 않은 임시 계약 상태. 즉, 본래의 힘을 일부분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지금은 팽팽한 듯 보여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균형이 무너질 것이다. 저 괴물을 쓰러트리려면….’
결국에는 내 추측이 맞기를 기도해야만 했다.
어차피 마무리 짓는 것은 결국 내 몫이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듀라한과 이블은 치열한 공방을 이어갔다.
듀라한은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이블의 공격들을 모조리 읽어내기라도 하듯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검을 휘둘러 흘려냈다.
우아하고 절제된 검술.
그것은 검술이라기보다 격식 높은 예법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는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
허나 팽팽하게 유지되던 균형은 금세 무너졌다.
검술 수준은 듀라한 쪽이 압도적으로 뛰어났지만, 지니고 있는 힘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한 번 무너진 균형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영체에 가까운 듀라한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만큼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목 없는 기수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은색 머리칼이 휘날렸다. 정확히는 손에 쥐고 있던 머리가 움직였다.
분명 괴기스러운 광경이건만 어째서인지 혐오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신성제국의 첫 번째 기사.”
이제는 잊혀진, 망국의 기사.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세월의 잔재.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도 전해졌다.
‘…갑옷에 새겨진 순백색 방패.’
그것은 신성제국을 상징하는 국기였다. 그리고 그녀의 검에 새겨져 있는 글귀.
Ⅰ. go dtí an chéad chlaíomh den Impireacht Le meas agus le meas.
Paladin Ilya.
“―팔라딘 일리야.”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백색 섬광이 사방을 뒤덮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하얀 말을 타고 있는 백색의 기사였다. 갑옷, 검, 말, 그녀가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이 온통 하얗게 변모했다.
마치 허물을 벗어낸 나비처럼, 이제야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는 듯 그녀의 전신에서는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종족이 듀라한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손에 쥐고 있던 그녀의 머리가 여실히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허나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마물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흑마술사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어찌 보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그녀는 지금껏 내가 마주한 그 어떤 존재보다도 성스러웠기에.
자칭 성녀라고 지껄이는 그 빌어먹을 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며, 아름다웠다.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볼 정도로.
그저 감탄을 자아낼 만큼 기품 있었다.
바다를 품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차갑게 식은 눈동자에 깃든 고결함.
그녀가 입을 열었다.
“Ó Dhia. an raibh grá agat dom fós.”
찬가(讚歌).
천사가 노래를 하는 것 같은 부드러운 미성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그녀의 검에 광채가 깃들었다.
이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마신의 사도인 내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 만큼 강렬했으니까.
뒤쪽에서 경악에 가득 찬 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마물인 듀라한이 성마술(聖魔術)을 사용한다고? 그럴 리가….”
신성력(神聖力).
주신의 총애(寵愛)를 받는 이들이 부여받는 고귀한 축복.
순리를 거부하고 마물이 되었음에도 그녀의 신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비록, 삶에 미련을 놓지 못해 추악한 몰골이 된 과거의 망령이라 할 지어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어떠한 형태를 하고 있든 여전히 그녀는 기사였으니까.
신이 신도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있어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네가 나를 추앙하는 한 나는 너의 신이며, 네가 나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의 부모라고.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