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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46화 (46/180)

46화

내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설마, 흑마술을 사용하는 걸 본건가?’

순간,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만약 그녀가 내 정체를 알게 됐다면 앞으로 있을 계획의 상당부분을 수정해야만 했다.

물론. 이럴 때를 대비해 변명거리는 만들어 놓았지만, 과연 그것이 통할 지는 의문이었다.

이대로 그녀에게 의심을 사게 된다면……. 어쩌면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맞나보네.”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 지금 내 선택에 따라 그녀의 운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녀 또한 앞으로의 계획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퍼즐조각 중 하나.

그렇기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샬럿.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오해는 없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확고한 눈동자.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러한 애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어느 것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순백의 갑옷과 순백의 검. 전신을 아우르는 신성한 기운. 틀림없이 고귀한 영령(英靈)이겠지.”

……응?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나는 말을 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꿋꿋이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처음 그 기사를 봤을 때는 당황했어. 한 손에 머리를 쥔 기수. 영락없는 듀라한의 형상이잖아?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지. 성마술(聖魔術)을 사용하는 마물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이때다 싶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 그렇지! 그녀는 대대로 우리 가문을 수호하던 기사야. 거기엔 복잡하게 얽힌 사정이 있어서 그런 형태를 하고 있지만…….”

내가 무어라 떠들어대든 이미 그녀는 생각을 정리한 듯 했다.

“역시 지그하르트 가문에 대한 전설은 진짜였구나. 그 정도의 신성력(神聖力)을 지닌 수호령(守護令)이라면 아마 복잡한 사연이 있겠지. 어째서 네가 그런 영령을 다룰 수 있는 건지는 더 이상 묻지 않을게. 다만 이 한 마디는 하고 싶었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응시했다.

“목숨을 구해줘서 고마워.”

그리고는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야. 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아마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거야.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거라 생각해.”

벌써 두 번째 당황이다.

설마 그 샬럿이! 싸가지 없고, 자존심만 강하고, 고집불통인 샬럿이 내게 이렇게 감사의 표현을 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거 몰래카메라나 그런 거 아니지?”

샬럿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물었다.

“그게 뭔데?”

“있어. 그런 게. 어쨌든 알아줘서 고맙네.”

“고마운 건 고맙다고 하는 게 진짜 귀족이니까.”

피식 웃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마음가짐 변치마라. 나는 먼저 들어가 볼 테니까. 적당히 하고 들어와. 무리하다가 다음 날 골골대지 말고.”

“신경 꺼!”

휙 돌아선 샬럿은 다시 연무장 중앙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기숙사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쪽 다리를 의자 위에 올려놓은 벨라 트레이가 연초를 꼬나문 채 나를 바라봤다.

재떨이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꽁초를 보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왔냐.”

“아, 예. 다녀왔습니다.”

“가서 쉬어라.”

그녀를 지나쳐 방으로 향했다.

똑똑.

노크를 해도 별 반응이 없자, 그대로 문을 열었다. 당황한 프레이가 허겁지겁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품에는 익숙한 인형이 안겨져 있었다.

“자, 자일!”

“프레이…?”

아무래도 인형을 만지고 있던 모습을 들킨 것이 부끄러운 듯 했다.

[왔느냐, 계약자여. 그래, 교주 놀이는 재밌었느냐?]

‘재미는 무슨. 고생만 하다 왔지. 뭐.’

[말은 그렇게 해도 몸은 솔직하구나. 수확은 좀 있었느냐?]

얘는 대체 내 머릿속에서 뭘 뒤져본 거야.

‘그건 이제부터 내 몫이지.’

[호오. 이번에는 또 어떤 재미난 짓을 보여줄지 기대하고 있겠다.]

프레이가 내게 인형을 건네며 말했다.

“이 인형 혹시 자일 겁니까?”

“네.”

“허락도 없이 만져서 미안합니다. 인형이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얼마든지 만져도 괜찮아요. 그런데 프레이. 이 인형이 귀엽나요?”

내 눈에야 그렇다 쳐도.

프레이 입장에서 검은 날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부끄러운 듯 말을 늘렸다.

“…예. 특히 이 날개가 제법 귀엽습니다. 크기도 제각각이고, 엉성한 게 제 취향입니다. 혹시 까마귀를 본 따 만든 것입니까?”

그냥 취향이 특이한 거였다.

“아마… 그럴 겁니다. 제가 만든 게 아니라서….”

“혹시 여성분이 만든 겁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차가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그, 그렇죠?”

“혹시 아카데미에 있는 여학생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저희 S 클래스에 있는 분이 만들어 주신 겁니까? 아리아? 실프? 서, 설마…….”

아니, 실프는 여학생이 아니라 중성인데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다급히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저희 영지에 있는 아이가 제가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하여 선물해준 겁니다. 프레이! 저는 일단 샤워 좀 하고 오겠습니다!”

“아…. 시간을 뺏어서 미안합니다. 자일.”

“괜찮습니다.”

[아주 난봉꾼이 따로 없구나.]

‘조용히 해.’

* * *

다음 날.

아침식사를 끝마치고 강의실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조교님.”

“좋은 아침입니다. 자일 지그하르트 학생. 다만, 앞으로는 조교님보다는 무명이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군요.”

“아……. 예.”

여전히 한결 같은 컨셉충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요한이 오기를 기다렸다.

현재 시간은 9시 10분.

역시나 제 시간에 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평소와 같이 나태한 얼굴의 요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입이 찢어질 듯 하품을 하며 교탁 위에 선 그가 말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교수님!”

이든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요한. 보다 못한 무명이 그를 깨웠다.

“교수님. 교수님. 강의 하셔야 됩니다.”

요한이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대답했다. 눈 밑에 진 그늘이 전보다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아……. 미안합니다…. 뭔가 전해야 될 내용이 있던 거 같은데…”

조교가 조심스레 말했다.

“용사 일행에 승전 소식입니다.”

요한의 흐리멍텅한 눈이 우리를 향했다.

“아…. 고마워요, 카르파.”

“소피입니다, 교수님.”

“수업에 앞서 한 가지 전할 소식이 있습니다…. 이미 알고 계신 학생들도 있겠지만 나라에서 정식으로 공문이 내려왔기에 제가 직접 전해드리겠습니다.”

모두가 그의 말을 경청했다.

“마왕군 토벌을 위해 나섰던 용사 일행이 토벌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흠칫 놀라 나도 모르게 아리아를 바라봤다. 우려했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샬럿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고, 실프가 거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든과 프레이 또한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흥! 언니께서 직접 나섰으니 당연한 일이지. 역시 우리 언니야!”

“…인간 주제에 제법이군.”

요한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를 기념하고자 황제폐하께서 내일부터 7일간 축제를 여신다고 합니다. 황명(皇命)이니 만큼 축제기간 동안 저희 살로몬 아카데미도 교수의 재량에 따라 자율수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아마 형식상 오전 수업만 진행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S 클래스 학생들은 일주일 간 각자 하고 싶은 걸 하시면서 축제를 즐기시면 됩니다. 이상입니다.”

‘7일간의 축제……. 어쩌면 지금이 가장 적기일지도 모르겠군.’

내가 손을 들며 물었다.

“자율 수업이라 하셨는데 혹시 궁금한 게 생기면 교수님을 찾아가도 됩니까?”

“형식상… 자율 수업이지, 사실상 노는 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정 궁금하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왕이면 조금 더 축제를 즐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청춘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귀찮으니까 건들지 말라는 말을 잘도 돌려서 얘기하고 있었다.

“예.”

요한이 교탁 위에 놓인 거대한 서적을 펼쳤다.

“원래는 오늘도 자습을 할 예정이었지만… 내일부터 축제인 관계로 이론 수업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이 수업을 시작했지만, 나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였다.

‘마왕을 토벌했다라……. 과연, 진짜일까.’

의문이 들었다.

원래의 흐름대로라면 용사일행이 마왕을 토벌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파티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을 때 얘기였다.

다섯 명이 있을 때도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보조 마법사인 내가 빠진 상태로 마왕을 토벌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해냈다 하여도…….

천악천이라는 변수가 존재했다.

‘이 부분도 알아봐야겠어.’

갑자기 요한이 나를 불렀다.

“자일 지그하르트군.”

“네?”

“제가 방금 무엇에 대해 설명했죠?”

“그게……. 음….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리로 나와 보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탁을 향해 걸어갔다.

‘이번엔 또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수업 중 다른 생각을 한 건 내 잘못이었지만 여태 당한 게 있다 보니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자…. 학우들을 바라보고 서세요.”

우선은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저는 이제부터 셋을 센 뒤에 자일 군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갈길 겁니다….”

“네? 그게 무슨….”

“하나….”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교수님? 자, 잠시만요!”

“셋….”

심지어 둘도 없이 곧장 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

나는 다급하게 강화마법을 발동한 뒤, 양팔을 들어 올렸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퍽!

강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양팔이 저릿저릿했다.

저 비실비실한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뭐하는 인간이야…?’

내가 무어라 따지기도 전에 요한이 말했다.

“자, 다들 보셨죠? 방금 자일군이 여러분들에게 보여준 것이 바로 무영창이랍니다. 원리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사용하고자 하는 마법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서클에 마나를 불어넣어 차차 술식(術式)을 간소화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어려울지 몰라도….”

순식간에 요한의 손아귀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익숙해지면 이렇게 할 수 있답니다. 어때요, 참 쉽죠?”

그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정확히는 할 말을 잃은 것이었다.

그러나 샬럿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손에 마나를 끓어 모으고 있었다.

“…….”

뒤이어 불꽃의 표면의 서리가 끼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입을 벌린 채 감탄하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영창은 그저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 위한 자기 암시일 뿐. 결코 공식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생략을 하여도 이처럼 마법을 발동할 수 있죠. 마도학자들은 현대에 이르러 더욱 쉽게 마법을 구사하기 위에 구체화된 영창이 생겨났다고 추측합니다. 정해진 주문처럼 외우기만 하면 누구나 쉽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죠. 통상적으로 20자 이상의 음절을 영창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고대의 마법사들은 영창을 외우지 않았다는 것을 현 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얼음조각이 결정체로 분해되어 공중에 떠올랐다.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수 십 개의 얼음꽃들이 만개하여 교실을 뒤덮었다.

“중요한 것은 술식을 자신만의 방식대로「압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힘들게 영창을 외우지 않고도 쉽게 마법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게 되죠. 어떠한 현상에는 그에 맞는 원인이 있는 법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마법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뿌리가 있고요. 핵심은 본질입니다. 쓸데없는 것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마법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탐구하세요.”

투명한 꽃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것이 마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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