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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52화 (52/180)

52화

기레스 하르만의 별채 내부.

호화로운 방 안에는 만취한 기레스 하르만과 여인들이 술판을 벌이며 놀고 있었다.

사방에 나뒹구는 술병과 방안을 가득 채운 약 냄새. 눈이 풀린 채 연신 술병을 흔들어대던 기레스 하르만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으하하하! 축제다, 축제! 모두 즐겨라! 마셔라! 오늘은 이 기레스 하르만님이 전부 사는 날이다! 용사가 마왕을 무찔렀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렇지?”

“네에에에!”

“호호, 기레스 하르만님이 용사보다 더 멋지답니다!”

“제국의 밤을 지키는 것은 기레스 하르만님이지 않습니까! 용사가 마왕을 토벌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기레스님께서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그래. 다들 즐겁게 마시고 오늘 죽어보자!”

촤아아악!

그가 흔든 술병에서 술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검은 로브의 사내는 마치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단장께서 내린 임무라고는 하나 이딴 버러지를 도와야 한다니 구역질이 나는군.’

술에 취한 기레스 하르만이 뭉개진 발음으로 그를 불렀다.

“어이. 거기 파트너도 한 잔 하지 않겠나?”

“사양하겠다.”

“여전히 쌀쌀 맞은 사람이로구만. 얼굴도 그렇게 꽁꽁 가려놓고. 혹시 뭔가 숨기는 것이 있나?”

검은 로브의 사내는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

기레스 하르만이 능글맞은 미소를 짓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래. 뭘 숨기고 있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쪽이 누구든, 나한테 돈만 많이 주면 되는 것이지! 대체 어떤 물건을 찾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애를 쓰고 있는 모양이야. 그만한 계약금을 주는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과묵한 형씨도 나한테 붙여놓고. 으하하하! 까다로운 주인을 두어 형씨도 고생이 많구만?”

“잡담은 삼가지.”

“크하하하! 그래, 그래. 과묵하고 좋구만. 아주 좋아. 자 축배를 들자고 다들! 마셔, 마셔! 오늘 가보자고!”

순간적으로 살의가 들끓었지만, 사내는 임무 수행을 위해 간신히 참아냈다.

‘…임무가 끝날 때까지만 참자.’

일보일검(一步一劍). 외팔 검사 자간.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자신의 키만한 대검을 휘두르며 적을 반으로 갈라버린다는 괴물.

그는 인간과 마족의 혼혈인 반인반마(半人半魔)였다.

연합 내에서도 스스로의 힘을 증명을 한 이들만이 얻을 수 있는 간부의 한 축이었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징계를 받아 이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어떻게든 이번 임무를 무사히 끝내고 잃어버린 단장의 신임을 다시 얻는 것이 그의 목표.

그것을 위해선 이 버러지 같은 놈의 주정을 받아주어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꾸역꾸역 인내하고 있었다.

‘…10초. 아니, 7초면 충분하겠군.’

그는 본능적으로 이 방안에 있는 인간들을 두 동강 내는 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검을 쥐고 나서부터 생긴, 오래 된 습관 같은 것이었다.

덜컥!

문이 열리며, 호위를 맡고 있던 기레스 하르만의 부하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레스 하르만님!”

방금까지 헤실헤실 웃고 있던 기레스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쨍그랑!

그가 술병을 던졌다. 유리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문을 열고 들어온 부하의 얼굴을 긁었다.

뚝. 뚝.

핏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야, 이 버러지 같은 새끼야. 내가 놀고 있을 때 함부로 문 열지 말라 그랬지.”

부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뺨의 고통보다, 당장 기레스에 대한 공포가 더욱 큰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허나 급한 사안이라…….”

소매 끝에서 단검을 꺼내들려던 기레스 하르만이 이내 짜증을 삼키고 물었다.

“말해. 별 거 아닌 거면 꼬챙이로 만들 줄 알아.”

그의 옆에 앉아있던 여인이 요염한 표정으로 기레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에이. 우리 백작님. 기분 좋은 날 왜 그러실까~ 조금만 기분 푸세요~”

탁!

기레스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야 이 썅년아. 지금 분위기 파악 안 돼? 너도 얼굴 다 찢어줘?”

여인이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부하가 곧장 말을 이었다.

“저택에 침입자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침입자?”

감히 어떤 쥐새끼가 제국의 밤을 책임지는 하르만 가문의 저택에 침입한단 말인가.

“누군데?”

“…그, 그것까지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가주님의 방 안에 설치된 아티팩트가….”

그 순간.

푹!

기레스 하르만이 던진 단검이 부하의 미간에 꽂혔다. 그가 으르렁 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누가 가주야? 그 늙은이가? 말은 똑바로 해야지. 하르만 백작가의 가주는 나, 기레스 하르만이다! 알아들어?”

말을 하던 부하는 눈도 감지 못한 채 그대로 자리에 고꾸라졌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몸을 바르르 떨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말론.”

커튼 사이로 중후한 인상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는 8서클의 경지에 이른 마도사(魔道士)로서 기레스 하르만이 상당히 신임하는 인물이었다.

“예, 주인님.”

“지금 당장 저택으로 간다. 공간전이 마법 준비해.”

“알겠습니다.”

기레스가 고개를 돌렸다.

“형씨.”

자간이 벌떡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준비됐다.”

말론이라 불린 사내가 품에서 스크롤 한 장을 꺼내 찢자,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잠시 후.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저택 앞마당에 도착한 게르스 하르만이 인상을 구겼다.

“뭐야? 경비 새끼들 다 어디 갔어?

코를 찌르는 피 냄새와 위화감이 들 정도로 고요한 저택. 그리고 저택 내부에서 풍겨져 나오는 진득한 마기.

상황을 눈치 챈 자간이 말했다.

“…마기(魔氣). 저택 안에 흑마술사가 있군.”

“흑마술사? 어떤 미친 새끼가 감히 내 저택에……. 로즈!”

달빛에 가려진 그늘 사이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주인님.”

“그림자들 모조리 소집해서 내 주변 경계하라고 해.”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림자. 푸른달과는 별개로 오로지 가주의 명만을 받들며, 365일 그를 호위하는 직속 살수들이었다.

“말론. 저택 봉쇄해. 쥐새끼 한 마리도 나가지 못하게.”

“알겠습니다.”

말론이 영창을 하기 시작하자, 그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마법이 완성되며 저택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결계가 펼쳐졌다.

지정봉쇄(指定封鎖).

공간 계열 7서클 마법이었다.

어느새 등에 매고 있던 거대한 대검을 손에 쥔 자간이 말했다.

“내가 앞장서지.”

“이제야 그 잘난 실력 좀 보겠구만. 손에 쥔 그 고철덩어리가 폼이 아니길 바래. 외팔 형씨.”

자간은 임무가 끝나면 반드시 저 놈의 사지를 썰어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저택 내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후웅!

그가 대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자일이 만들어낸 사귀(邪鬼)들 대여섯이 두 동강이 났다.

‘사귀(邪鬼)라……. 사령계 흑마술사인가?’

머리로는 생각을 하며, 육체는 부단히 검을 휘둘렀다.

태풍에 휩쓸리듯, 우수수 쓰러지는 사귀들.

저택 1층을 가득 메웠던 사귀들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놀라운 광경에 기레스가 감탄하며 소리쳤다.

“이야-! 내가 뭐 할 것도 없이 형씨가 다 끝내놨구만? 인정하지. 자고로 사내란 말로만 떠들어대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법이지. 이 기세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

자간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계단을 올랐다. 저택에 있는 살수들을 전부 마물로 만든 것 마냥 발을 내딛을 때마다 사귀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지만, 그는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마치 기계처럼.

베고, 걷고, 베고 걷고, 그저 정해진 동작들을 수행해나갔다.

그에게 있어 몸을 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위협이었다. 다만 이 정도 숫자의 사귀들을 불러낸 흑마술사가 누군지 의문이 드는 정도.

뭐.

곧 있으면 그 낯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어차피 이 저택에서 살아나갈 수 없다.

그것은 오만 따위가 아닌, 지금까지의 숱한 경험에서 비롯된 확신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얕은 호기심을 내비칠 뿐.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는지 곱씹으며 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빌어먹을 놈들이 내 저택을 엉망으로 만들어놨군. 형씨 뭣 좀 알아낸 게 있나?”

“죽은 이를 되살리는 사령계 흑마술사가 이 중에 있는 듯하다.”

“뭐, 문제 될 건 없지?”

자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기레스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바닥에 침을 뱉었다.

“쓸데없이 돈 나갈 일만 생겼구만.”

죽은 수하들보다는 저택 수리 비용으로 나갈 돈을 걱정하는 그였다.

“…….”

자일 일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저택을 돌파하는 자간.

그야말로 속전속결(速戰速決)이었다.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어느덧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계단에 도착했다. 위를 올려다 본 자간이 물었다.

“이곳인가?”

기레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다리에 힘을 준 자간이 그대로 뛰어올랐다.

펑!

파공음과 동시에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자간.

제자리에서 점프한 것만으로 단숨에 가주실 문 앞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의 행동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곧장 가주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자간.

동시에 쇄도하는 붉은 칼날.

오러가 깃든 검이었다.

“뢴달!”

“지그하르트여! 내가 틈을 만들겠다!”

후우웅!

자간은 어떠한 준비동작도 없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고, 도리어 기습을 한 상대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날아가 벽에 쳐박혔다.

“크헉…!”

허나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검격.

하나하나가 급소를 노리고 있었고, 방금 전에 오러보다는 미약하나 제법 날카로운 기세를 띠고 있었다.

‘살수들의 방식이군.’

그는 방어대신 공격을 택했다.

선즉제인(先則制人).

공격이야 말로 최선의 방어라는 것이 그의 신념(信念). 나아가 그가 한평생 걸어온 검의 길이었다.

“―!”

살수들의 검이 자간의 살갗에 닿았다.

본래라면 살갗을 파고들어 뼈와 근육까지 썰어버렸어야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의 검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두툼한 벽이 그들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듯, 오러를 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얕은 생채기를 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자간이 검을 휘둘렀다.

종베기.

가장 기본적인 베기 형태.

그러나 그 파괴력은….

“끄아아악!”

그를 둘러싼 살수들을 단번에 썰어버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진 살수들을 보며 자간은 방금 그들을 베었을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이것들도 마물이었나? 내 생각보다 더 뛰어난 흑마술사가 있나 보군.’

그 순간.

정면에 있던 검은 머리칼의 사내 위로 떠오르는 검은 창.

흉흉한 마기를 피워내는 창을 바라보며 자간은 그가 이 사단을 벌인 원흉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사령계인 줄 알았더니 형태 구현이라……. 이만한 흑마술사가 남아있었다니 연합도 더욱 분발해야겠군.’

수십 개의 흑창이 일제히 자간을 향해 쇄도했다. 응축된 마기로 보았을 때 단순히 막아내기에는 어려울 듯 했다.

이 저택에 들어선 이후 그가 처음으로 마기를 끓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검붉은 마기가 대검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가 한 발자국을 내딛으며.

검을 휘둘렀다.

반마검. 제 1식(式). 도축(屠畜).

고요한 호수 위 잔잔하게 퍼지는 물결처럼 나아간 반달 모양의 검격이 창들을 분쇄하고, 점차 그 크기를 키워갔다.

이윽고 방 전체가 범위에 들어왔을 때.

서걱!

자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의 중앙의 선 하나가 생기더니 이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툭.

검은 머리의 사내, 자일은 덩그러니 놓아져있는 자신의 하반신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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