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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51화 (51/180)

51화

몸을 일으킨 그가 잠시 로만을 바라보다 이내 자일에게 시선을 옮겼다.

“왜 나를 살려두려고 하는 거지?”

자일은 솔직히 말했다.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지.”

하르만 백작가의 차남이자, 푸른달의 수장.

륀델 하르만.

가주의 핏줄을 이은 그가 살수집단의 수장이 된 이유는 그의 모친에게 있었다.

첩의 자식.

아마 그가 지겹도록 듣던 말일 것이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는 가주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장남인 기레스 하르만과 동급의 재능, 그 이상의 카리스마, 훌륭한 인망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통성(正統性)이라는 고리타분한 벽에 가로막혀 가주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한지 오래였다.

형의 그림자가 되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전부인 삶.

장남의 폭언과 폭행은 일상이었고, 가주 또한 그를 자식이 아닌 도구로 여겼다.

경쟁조차 불가능했다. 애초에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참고 인내했다.

오로지 주인만을 따르는 순종적인 개를 연기하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 깊숙한 곳 한편에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고작 핏줄 따위로 인해 자신이 이러한 취급을 받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 보면.

결국에는 자신이 밟고 올라설 수 있을 거라 소망하며 매일 같이 견뎠다.

지금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건네진 이 동아줄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삶의 끝에 다 달아서야 기회를 얻게 되는군. 그러나 기레스 하르만을 죽인다고 한들….’

자일이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너도 날 이용하고, 나도 널 이용하는 것 뿐 이니까. 서로 목적이 일치하면 된 거지.”

목적…….

가주가 되고 싶다. 개가 아닌 주인이 되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핏줄 하나만 믿고 나를 핍박하는 저 놈의 면상을 뭉개고 싶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끔.

간절한 소망이었다.

푸른달의 수장이 되어 충분한 실적을 쌓고, 부하들에게 신임 또한 얻었지만 결국 자신은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영영 변치 않을 것이라는 것도.

가주를 죽여도, 기레스 하르만을 죽여도, 가문의 원로들은, 가문의 방계들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첩의 자식이다. 기레스 하르만을 죽인다고 해서 내가 가주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원로회의 늙은이들이 눈을 부라리며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 설령 그들을 다 죽인 다 하여도 또 다시 새로운 이들이 내 정통성에 대해서 논하겠지. 죽은 가주가 일어나 직접 승계라도 하지 않는 이상…….”

“하면 되지.”

“뭐…?”

“승계하면 되잖아.”

뢴달은 문득 자신 앞에 선 남성이 지금껏 보아왔던 흑마술사들 중 가장 뛰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가, 가능한 것인가?”

“물론. 저기 저 미라 잠깐 일으켜서 말만 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 어려울 거 없지. 내가 가진 힘을 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나?”

자일은 순간, 주변에 시체들을 일으킬까 했지만 이내 관두었다.

로만에게 들었던 얘기로 그는 자신의 수하들을 꽤 아끼는 편이었다고 했다. 물론, 그 수하들을 눈앞에서 전부 죽인 것이 다름 아닌 자일이었지만.

“어때, 이제 좀 대화할 마음이 드나?”

뢴달이 불편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멋대로 저택에 쳐들어와 내 수하들을 모조리 죽여 놓고 하는 말이 죽어서 노예가 될지, 살아서 노예가 될지 선택하라는 것 아닌가? 협박이라는 단어를 예쁘게 포장한다고 해서 뜻이 달라지나?”

자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 부분은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대화로 끝낼 거였으면 진작 했겠지. 어차피 너희들도 우리가 이 저택에 들어온 시점부터 끝장을 볼 셈 아니었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살기를 풀풀 풍기면서 다가오는 놈들한테 미안하지만, 대화 좀 나눠볼래? 라고 정중히 요청이라도 하라는 건가?”

자일의 말대로 뢴달은 자일일행이 이 저택에 침입한 시점부터 그들을 살려둘 마음은 없었다.

허나 뢴달의 입장에서 어디까지나 침입자는 자일 일행이고, 그 침입자들로 인해 뢴달은 자신의 수하들을 잃었다.

“……뻔뻔하군.”

자일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의 손아귀에서 뻗어져 나간 마기가 뢴달의 숨통을 조였다.

“컥!”

“뢴달 하르만. 지금 내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를 따지자는 것으로 보이나…? 당장이라도 네놈의 머리통을 박살내 마물로 되살릴 수 있지만 친히 자비를 베풀어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 말이 네놈에게는 그렇게 어렵나?”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든 뢴달의 얼굴.

“…켁, 커억!”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 자일이 마기를 거두자, 뢴달이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하아…. 그래. 네 말에도 일리가 있지. 대신이라 하기에는 뭐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저들을 언데드로서 다시 살려내도록 하겠다. 여기 있는 로만처럼 자아는 보존한 채로. 시간이 없으니 빨리 선택하도록. 영기가 흩어지면 그 후에는 나도 불가능하다.”

“부탁하지….”

병주고 약주는 꼴이었지만 자일은 그렇게라도 뢴달의 마음을 붙잡고 싶었다.

비록 또 다시 생명력을 소모해야 했으나 레메게톤을 얻게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였다. 어차피 레메게톤을 얻지 못하면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거기에 더해 수준급의 무인들을 전력으로 삼을 수 있었고, 수하들을 아끼는 뢴달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지금 이 행동은 결국 그를 묶어두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될 터였다.

자아가 있다고는 하나 결국 모든 결정권은 쥐고 있는 것은 나였으니.

시체더미로 향한 나는 피를 떨어트렸다. 방금 전투로 인해 전신이 피투성이였기에 수고를 덜었다.

툭. 투두둑.

“사자소생(死者蘇生).”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급격히 생명력을 소모한 까닭이다.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마기를 일으켰다.

잠시 후.

시체더미에서 몸을 일으킨 살수들이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될 것인지 영문 모를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대장.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분명 방금까지 흑색 창이….”

그리고 나를 발견함과 동시에 뢴달의 주위를 둘러싸며 적의를 드러냈다.

“――!”

“…대장.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뢴달은 그런 부하들을 바라보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내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떠한 제약도 걸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뢴달이 품에서 붉은색 물약을 꺼낸 뒤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멈췄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나를 바라봤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필요 없다. 내 제안에 대한 대답은?”

“받아들이겠다. 정말로 그대가 나를 살수집단의 수장 따위가 아닌 이 백작가의 주인으로 만들어준다면 내 힘이 닿는 한 그대를 도울 것을 약조하지.”

“좋다. 나를 배신하는 것은 너의 자유이지만 선택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를 거라는 것을 명심해라.”

뢴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로만은 푸른달의 살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방금 전까지는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적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옛 동료일 뿐이었다.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자일과 뢴달 또한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마음을 굳힌 것인지 뢴달은 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역시 룬델 공작가였나.”

뢴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그런 대단한 가문이 그대를 노리고 있는 것인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거면 충분해.”

자일의 예상대로 그의 죽음을 사주한 것은 룬델 공작가였다.

사딘 룬델의 성격상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낸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철혈검가(鐵血劍家).

명실상부 제국 최고의 권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통의 명가(名家).

그러나 그 가면 뒤에 가려진 추악한 진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가주는 언제부터 저런 꼴이 된 거지?”

“형님…. 아니, 그 버러지 같은 놈 짓이지.”

전말은 이러했다.

현 가주와의 승계 다툼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기레스 하르만. 빠른 시일 내에 왕좌에 오르고 싶었으나 가주의 뜻은 확고했고,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가주를 독살한 것이었다.

서서히. 시간을 들여서.

미쳐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아주 소량의 극독을 음식에 풀어, 본인의 손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한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가주의 죽음을 밝히고, 자신이 가주 자리에 오를 생각이었겠지.

가주는 노쇠했고, 그는 젊었다. 온갖 종류의 뇌물을 받쳐 원로들을 구워삶고, 방계를 압박하며 자신만의 지지 세력을 구축한 그에게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쓰레기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알면 알수록 더욱 밑바닥의 끝이 있음을 보여주는 놈이었다.

결국 정통성에 대한 집착이, 본인과 그의 선조들이 오랜 시간 일궈왔던 가문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끝내 자신의 핏줄의 손에 죽게 된 것이다.

“내가 아는 정보는 이게 전부다. 기레스 하르만의 견제 탓에 푸른달의 내려오는 지령 외에는 쓸만한 정보를 알지 못한다.”

“그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뢴달이 착잡한 얼굴로 물었다. 예상치 못한 기회를 얻었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아는 기레스 하르만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기레스 하르만은 현재 별채에…….”

그때였다.

한쪽 구석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던 라다무스의 입에서 방언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다가온다. 거대한 어둠이 다가온다. 아아, 운명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짙고 어두운…….”

이변을 느낀 자일이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영감님…? 괜찮으십니까…?”

라다무스의 고개가 휙 꺾이며 자일에게로 향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흰자만이 가득한 눈동자가 미동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의 자일은 소름이 돋았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이것은 죽음의 전조다.”

떨림이 멈추었다. 정신이 돌아 온 것인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영감님. 왜 그러십니까?”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야 하네.”

자일은 문득 세간에서 그를 무어라 부르는지 떠올렸다.

서쪽 숲의 눈먼 현자.

그것은 마신의 저주로 인해 생긴 이명이었다.

예지와 개화의 권능을 지닌 마신,「단탈리온」으로 인해.

“……혹시 미래를 보신 겁니까?”

라다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보았네. 지금 이곳으로 기레스 하르만과 그의 수하들이 오고 있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 그 사내는 위험해. 여기 있는 우리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다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어서 저택을 나…….”

지이잉!

거대한 마나의 태동(胎動).

자일은 저택 전체를 뒤덮는 마법이 발동되었음을 느꼈다. 이만한 마력양과 범위라면 최소 7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발동한 것이 분명했다.

라다무스가 절망적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아…!! 벌써 이곳까지 도달한 것인가…. 이리도 허무하게 끝이 나다니, 결국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정해진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냐! 참으로 짓궂구나, 마신이여! 희망의 끝에서 무너져 가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겠지! 결국에는 나를 능멸하기 위해 이러한 권능을 내린 것이었구나!"

절규와 증오로 얼룩진 그의 외침에 자일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영감님. 대체 무엇을 보신 겁니까!”

그는 체념한 듯한 얼굴로 자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상반신이 떨어져 나간 시체.”

“누구의 시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와 하르만 백작가의 차남 그리고…….”

뒤이어 나온 노인의 말에 자일의 표정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자네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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